< 초원 - [3] >
이후로는 무언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도 세 마리나 죽인 것이 어딘가.
이번은 이 정도 소득에 만족한 채 일행은 세계수에서 내려왔다.
결국 제대로 된 탐색은 못 되었다. 제대로 탐색에 나서려면 며칠 노숙할 것을 각오하고 미지의 장소를 찾아 헤매야 할 테니까. 그저 마주친 괴물 몇 마리 잡고 돌아온 것을 원정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그러나 잠자리에 들며 롤랑은 기뻤다.
저택에 돌아와 보니 조합에서 청소부들이 상아를 경매에 올렸음을 들었다. 뿐이랴. 제대로 된 탐색이건 아니건 첫 모험이 무사히 끝났다.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날이 밝자 실망스러운 일도 드러났다.
이번 사냥으로 모지와 롤랑은 레벨 업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물론 레벨 차이가 있는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일행 그 누구도 레벨 업 하지 않았다. 알론소는 물론 나병환자들도.
게임대로라면 한 파티에 속한 이상 그저 구경만 했어도 레벨 업 할 수도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역시나 그리 달콤한 현상은 벌어지지 않았다.
입맛이 썼다. 그러나 어쨌건 예상하기는 한 일이었다.
‘하기야 뭐, 코끼리 몇 마리 잡은 일쯤이야. 그 무슨 큰일이라고 어마어마한 소득을 바라겠나.’
******
천천히, 뼈에 금 가는 소리.
괴물의 거대한 코에 휘감긴 젊은 기사는 그저 머리만 마구 휘저었다. 다른 부위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결국 그 움직임은 발버둥조차 되지 못했다.
괴물 코끼리가 그 코를 조였다.
그 순간 들린 것은 엑, 하는 소리뿐이었다. 비명조차 없이 젊은 기사의 몸은 비틀려 으스러졌다.
뜯겨나간 각반 사이로 갈색 물이 뚝뚝 떨어졌다. 피와 배설물이 섞인 끔찍한 무언가.
칼 경은 새삼 악취를 느끼지는 못했다. 주변에 그런 액체가 너무나도 흥건했기에.
코끼리가 발을 들었다.
그 아래에는 또 다른 젊은 기사가 있었다. 다리가 으스러져 땅을 기는 소년. 이름은 알이었다. 명랑한 녀석이었다. 칼 경은 유독 그 녀석을 아꼈다······.
코끼리가 발을 내렸다.
알이 뭉개지는 동시에 칼 경은 비명 지르며 눈을 떴다.
일어나자마자 숨을 헐떡였다. 애써 진정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이 온통 컴컴했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칼 경이 눈동자만 굴리는 가운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깼습니까?”
“월렴? 여긴 대체?”
“굴속이요.”
“굴?”
“땅굴.”
뭔 소리인가? 칼 경은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더듬어보았다.
그래, 그 순간······.
월렴이 휘두른 발리사다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그리고 코끼리의 긴 코에 그 칼날이 살짝 박혔다.
칼 경을 향해 다가오던 코끼리 괴물이 일순 멈칫했다.
월렴은 있는 힘을 다해 칼에 힘을 주었다. 칼이 조금 더 파고들었다. 검신을 통해 피가 새어나오는 순간, 괴물이 코를 세차게 휘둘렀다.
월렴은 그 즉시 발리사다를 놓쳤다.
코끼리의 코에는 온갖 신경이 집중되어 있다. 고통에 미친 코끼리 괴물은 코를 움찔거리며 몸부림쳤다.
월렴은 그 즉시 칼 경을 일으켰다. 칼 경은 비틀거리면서도 애써 두 발로 섰다. 월렴은 그 손목을 잡고 죽어라 달렸다.
그리고 잠시 후, 뒤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괴물이 쫓아오는 것이었다.
미친 듯이 달리던 둘은 웬 구멍이 보이자 즉시 뛰어들었다. 그 순간 칼 경은 머리에서 둔탁한 충격을 느꼈다······.
‘잘못 떨어져서 기절했나.’
머리를 쓰다듬자 불룩한 것이 느껴졌다. 피멍이 든 모양이다.
“급한 와중에 도와줘서 몰랐네, 월렴. 정말 고마워. 그런데 왜 아직도 여긴가? 언뜻 보니 그다지 깊은 곳은 아닌 거 같은데.”
칼 경의 물음에 월렴은 우울하게 대답했다.
“밖에 아직 있거든요. 놈들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칼 경은 오한이 들었다. 엄습하기 시작한 공포를 몰아내고자 애써 물었다.
“뭐가?”
그리고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괴물이요. 나무코끼리들. 떼거지로 있더군요.”
과연 쿵쿵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지면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칼 경의 온몸이 경직되었다.
“대체?”
“우린 감시당하고 있어요. 한 마리 코 좀 긁은 보복으로.”
구멍 속은 어두웠으나 잘 보니 미세한 빛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코끼리들이 땅굴 위에 덮개를 덮어둔 모양이었다.
이 포로들을 잘 가둬놓고자.
칼 경의 가슴이 미친 듯이 박동하기 시작했다. 애써 구역질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땅굴이니 다른 쪽으로 파서 탈출하면······”
월렴은 조금 머뭇거리더니, 이내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투로 대답했다.
“주변에 있는 건 흙이 아니에요. 땅굴이라 했지만 사실 땅속이 아니죠. 여긴 나무 안속이에요.”
칼 경은 그 말을 쉬이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단 주변을 만져보았다. 그리고 흠칫했다.
딱딱했다. 땅굴을 확장하기에는 너무.
라타토스크라는 괴물이 있다. 세계수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그 괴물은 다람쥐를 닮았으나 실제 하는 짓은 나무를 잘 타는 두더지에 가깝다.
라타토스크는 세계수를 갉아대고 그 내부까지 침범한다. 심지어는 세계수 뿌리까지 제 집처럼 파고들 정도다.
그리고 라타토스크의 말예로서 뿔쥐라는 괴물이 있다.
뿔쥐는 두더지 혹은 생쥐 비슷한 괴물인데, 놈들의 머리에는 라타토스크와 같이 길쭉한 뿔이 솟아있다.
놈들이 그 뿔을 휘두르면 세계수에 상처가 벌어진다. 아마 이 땅굴도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다가 안속이 메워졌을 것이다.
이렇듯 뿔쥐들은 세계수 내부에 자기들만의 터널을 파고, 어디선가 멋대로 튀어나와 사냥감을 습격한다.
그 어떤 곡괭이로도 세계수에 손상을 줄 수 없음이 판명된 바였다. 그럼에도 어찌 놈들이 이 세계수에 터널을 팔 수 있는 것인지는 조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물론 이 두 명도. 이 세계수에 그런 미약한 생물들 따위가 어찌 구멍을 낼 수 있는지 조금도 알지 못했다. 지금 이 상황에는 절망적이게도.
칼 경은 필사적으로 물었다.
“발리사다는?”
그 룬검이라면 어찌 뭔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철저하게 기대를 배반했다.
월렴이 말했다.
“지금 없어요. 회수하지 못했어요.”
그렇다면 이제 남은 희망은 저 괴물들이 관심을 거두고 떠나가길 바라는 것뿐이다. 그 미약한 희망에 기댄 채 둘은 그저 웅크려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쿵쾅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점차 커졌다.
밖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무코끼리가 이쪽에 다가오는 것이다.
칼 경이 숨도 쉬지 못하는 가운데 덮개가 열렸다. 그리고 덮개 대신 그 자리에 나타난 코끼리의 눈을 보았다.
끔찍하게 거대한 눈. 눈은 급소인 법이지만 저 눈은 칼로 친들 상처도 낼 수 없을 것 같다.
코끼리의 눈이 멀어지고 이내 코끼리의 얼굴이 보였다. 코끼리의 코는 무언가를 머금은 듯 부풀어있었다.
이내 코끝이 이쪽을 향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갈색 물질들이 땅굴 속으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메워서 죽이려고?’
갈색 물질들이 쏟아져 내리는 가운데 둘은 공포에 질려 비명 질렀다. 그리고 그 갈색 물질의 분출은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끝났다.
구덩이는 무릎까지 메워져버렸다. 이제 몇 번 더 이 짓을 반복하면 숨이 막혀죽거나, 아니면 바닥이 채워진 나머지 결국 저 괴물들의 코에 붙잡혀 죽으리라.
최후를 예감한 둘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다시 덮개가 덮이더니 괴물이 물러갔다.
결국 한참 후에야 둘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바닥을 메운 이 갈색 물질이 흙 따위가 아니라 배설물임을, 저 괴물들은 이 둘을 단숨에 죽일 생각이 없음을 깨달았다.
나무코끼리들은 이 포로들을 천천히 죽일 생각이다. 분명했다.
포로를 조롱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
일행은 다음 날에도 세계수에 올랐다.
이번에는 전날처럼 순탄하지 않았다. 시작부터 습격이 있었다.
어쩐지 땅이 들썩인다 싶었다. 롤랑이 칼을 뽑아들기 무섭게 놈들이 땅속에서 뛰쳐나왔다.
“온다!”
삐죽한 뿔이 달린 괴물들, 다섯 마리.
놈들은 지면에서 튀어나온 즉시 허공에 뛰어 올랐다. 뿔을 앞세운 도약이었다.
표적은? 모지와 제이슨.
롤랑이 선두였으므로 동료들과 거리가 있었다. 롤랑은 미친 듯이 달려나가 겨우 한 마리의 도약을 찔러 멈췄다.
나머지는?
제이슨이 멈칫한 순간, 모지가 손에 쥔 지팡이를 휘둘러 한 놈의 입을 후려쳤다. 그리하여 한 놈은 막았다.
나머지 세 마리, 세 방향에서 덮쳐오던 놈들 앞을 흑기사가 가로막았다.
흑기사가 칼을 옆으로 쭉 뻗는 동시에 방패를 들어 올렸다. 금속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니 방패에 둘이 부딪쳐 낙하했다. 그리고 한 마리는 그 칼에 꿰여 죽었다.
이윽고 롤랑이 달려와 버둥거리던 두 마리를 밟고 찔렀다.
꿰엑, 하고 놈들이 죽었다. 그제야 진정하고 롤랑은 놈들의 시체를 보았다.
머리에 뿔이 달린 개만한 생물들. 얼핏 보기에는 쥐 같았지만 털이 수달처럼 번들번들했다.
이 괴물들의 정체를 롤랑은 쉬이 눈치 챘다.
“뿔쥐로군.”
레벨 1 수준의 괴물. 그 낮은 레벨에도 불구하고 게임에서는 중반에도 무시할 수 없었다. 갑자기 기습해오는데 그 공격력이 만만찮았다. 단단히 무장한 전사라면 모를까 헐겁게 입은 마법계열 캐릭터라면 그럭저럭 강한 괴물들보다도 두려워하던 상대였다.
게임에서도 그랬듯 여기서도 저 뿔에 찔리면 죽는다. 그리고 자칫하면 찔릴 수밖에 없다.
소생 주문이 있으니 만일의 상황에도 어찌 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것이 만능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알론소와 나병환자들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사태에 경악을 금치 못하던 와중이었다. 모두 얼어붙어 있던 와중 청소부들이 다가왔다.
“또 뭘 잡으셨······”
다가올 때만 해도 청소부들의 표정에는 기대가 서려있었다. 이 영웅적인 모험가들이 또 대단한 사냥을 했거니 싶었기에.
그러나 사냥감을 본 순간 청소부들의 얼굴이 무덤덤해졌다. 그것을 본 롤랑도 알아챘다.
‘별로 비싼 놈들은 아닌가 보군.’
과연 청소부들은 그저 시체를 처리해주겠다고만 말했다.
전리품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예상과는 달리 저 머리에 달린 뿔마저 별 가치가 없는 듯했다.
‘아마 경험치도······’
이래서 게임에서도 싫은 놈들이었다. 방심할 수 없게 만드는 주제에 해치운들 별 보상을 주지 않는 놈들.
롤랑은 굳은 표정으로 계속 걸었다. 후열의 일행과 거리를 좁힌 채.
그러다 거대한 기척을 느끼고는 한 손을 들어 일행을 멈춰 세웠다.
롤랑은 슬그머니 다가가 전방을 보았다. 그리고 기겁했다.
나무코끼리들이 보였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스무 마리.
‘역시 무리생활을 하는군.’
평소에는 흩어져 나뭇잎을 뜯어먹다 다시 하나로 뭉쳐 이동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여기저기 흩어진 놈들이 더 있을 테니 실제 저 무리의 규모는 지금 보이는 수준이 아니라 그 배일지도 모른다.
정말 그렇다면 승산이 없다. 저것은 숫제 거인 부대나 다름없는 것이다.
코끼리들의 눈에 띄지 않고자 롤랑은 놈들을 지나쳤다. 그리고 이십 분을 걸은 후에야 외따로 떨어진 나무코끼리 한 마리를 발견했다.
제이슨이 물어왔다.
“어쩔래?”
우려하던 코끼리 무리를 실제 확인했다. 그 거리가 멀지 않은즉 나무코끼리 사냥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웬만해서는 넘기는 것이 옳다.
그러나 롤랑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이내 생각에 잠겼다.
‘제이슨이 경험치 타령하노라 속으로 욕했었지. 그러나 그 의도 자체는 공감했어.’
적절히 괴물들을 쓰러뜨림으로써 레벨 낮은 현지인 동료들이 레벨 업.
낮은 레벨이라면 레벨 업도 빠를 테니 전력은 순식간에 부풀어 오를 것이다. 단순한 게임 논리에 불과하지만 일단 실현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토록 괴물과의 조우가 희박하다면, 레벨 업이 이토록 어렵다면 그 구상은 순식간에 깨진다. 현지인들이 실제 전력이 될 정도로 성장하는 것은 가망 없는 일이 될 것이요 그 순간 저들은 그저 영웅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관객으로 전락해버린다.
그리하여 짐이 된 저들에게 어찌 말해야 하나?
‘너희는 역시 쓸모없으니 헛된 기대를 주어 미안하고 이만 해산?’
영웅들은 누군가를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 그런데 하필이면 실망시키게 될 첫 대상이 맞이한 동료들이 될 것인가?
‘그건 안 돼. 절대.’
롤랑은 일순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그리고 말했다.
“처치하지.”
그리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모지가 뒤따르는 가운데 롤랑이 지면을 박찼다.
< 초원 - [3]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