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42화 (42/164)

< 초원 - [2] >

그 육중한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이제 그 죽음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롤랑은 아직 긴장을 풀지 못하는 와중이었다.

갑자기 울부짖는 소리가 나더니 푸른빛이 강하게 내리쬐었다.

롤랑은 황급히 옆을 바라보았다.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푸른 괴물이 보였다.

흠칫하여 검을 들어 올리려던 찰나, 롤랑은 겨우 그 야수가 제이슨이 불러낸 소환물임을 알아챘다. 다행히 창피 당하지 않은 채 검을 내렸다.

푸른 야수는 괴물 시체의 코앞에서야 질주를 멈췄다.

제이슨은 뒤늦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어······ 벌써 끝이야?”

롤랑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련하는 시체에서 시선을 애써 떼어낸 다음 점잖게 말했다.

“늦었군, 제이슨.”

“아, 음. 미안.”

“미안할 일이 아니지. 본래부터 이러기로 했던 거니.”

이곳 세계수에서 제이슨은 모든 소환물을 대동하지 않았다. 그러기로 약조한 바였다.

서리거인은 그 발소리로 세계수 안의 괴물들을 불러낼 것이요, 발키리는 설정부터가 영혼을 수집하기 위해 강림하는 것이니 불렀다가는 경험치를 가져가리라 예상되었다. 그 둘은 웬만해서는 부르지 않는 편이 나을 듯했다.

결국 상시 불러놓고 다니는 것은 흑기사 하나뿐. 그마저도 알론소와 나병환자들을 기습에서 보호하고자 그 옆에 붙여놓았다.

결국 평시에는 만전이 아니었다.

다른 두 유저도 마찬가지였다. 롤랑이 평시에 광폭화를 쓰지 못하듯, 모지는 주력 주문인 가속을 쓰지 않을 것이다. 몸이 빨라지는 탓에 체력 소모 또한 극심해지는 주문이므로. 장기 탐색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처럼 제약된 상태에서도 그럭저럭 강한, 군대도 피하는 괴물을 쓰러뜨렸다. 그것도 꽤나 쉽게.

그 사실이 롤랑에게 자신감을 주는 동시에 난처하게 만들었다.

‘꽤나 힘겹게 이기리라 예상했는데. 그 고생을 보여 제이슨에게 강적이 보이면 일단 싸움을 피하는 게 좋다, 하는 교훈을 줄 생각이었고.’

염동력을 쓴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견딜 만했다. 이대로라면 계속 싸워도 괜찮을 만큼.

이제 자신의 주장이 옳았다며 제이슨이 의기양양할 차례인가?

롤랑은 흘긋 제이슨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녀석이 자못 떨떠름한 기색임을 눈치 챘다. 어째서?

‘말 꺼낸 것은 자신인데 정작 한 일이 없었으니까?’

하기야 민망할 만도 하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좀 자제하려나?

롤랑이 내심 기뻐하는 가운데 저 멀리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방향으로 시선을 향하니 일단의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롤랑은 일행에게 신호했다.

“모두 경계.”

잠시 후, 그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림새부터가 허름한 자들이었다. 풀에 살이 베이지 않을 정도로만 옷을 입고 무장이라고는 창 한 자루씩만 든 사람들.

앞서 봤던 청소부들이었다.

‘저 자식들이 여긴 왜? 우리 중 누구 죽었음 털어먹으러 왔나? 아니면 우리가 소수이니 약탈하려고?’

롤랑은 그리 의심하여 긴장한 와중에도 거만하게 물었다.

“뭔가, 그대들은?”

청소부 중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예상과는 달리 약탈자다운 어조는 아니었다.

“저······ 나무코끼리가······”

“우리가 죽였다, 왜?”

청소부는 우물쭈물하더니 이내 말했다.

“시체 처리 말입니다······ 시체 값의 삼 할로 해드립니다.”

롤랑은 불쾌함을 드러내며 쏘아붙였다.

“우리 일행 중 아무도 죽지 않았다마는.”

“그게 아니라, 코끼리 시체 말입니다. 방치해두면 그 고기는 괴물들의 뱃속에 들어가 놈들을 살찌울 거 아닙니까? 그러지 못하도록 조합에서는 시체를 확실히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든가 시체에다 독을 뿌린다든가, 그도 아니면 시체 전부를 가지고 돌아간다든가 하는 식으로 확실히 뒤처리 할 것을 규정했는데요······”

말하면서도 자신 없는 기색이었다. 보아하니 실제 잘 지켜지는 규정이 아닌 듯했다.

하기야 이 오지에서 시체를 일일이 처리하기는 얼마나 번거로운 일일 것이며 군대를 이끈 귀족을 상대로 규정 위반을 따지기는 또 얼마나 힘겨운 일일 것인가.

롤랑이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래야 하는 건가?”

“예. 그러나 그 천한 일은 꽤 수고스럽지 않으시겠습니까? 저희가 대신 맡아 처리하겠습니다. 시체는 처리할 겁니다. 그리고 상아는 수거해갈 건데 그 가격의 절반은 저희 몫으로······”

절반이나?

문득 그리 느꼈지만 잘 생각해보니 롤랑이 보기에도 꽤 타당한 일이었다. 이곳 세계수에서 무언가를 옮기기는 대단히 힘들 테니까.

롤랑이 물었다.

“상아 가격의 절반이라 하면 그것은 어찌?”

“저희가 가져가고······ 조합에 넘기겠습니다. 그 낙찰가로 계산해서······”

문득 아말릭이 끼어들었다.

“당신들의 뭘 믿고 전리품을 맡기나?”

“여기 조합증이······”

청소부가 내민 물건을 보니 쇠로 된 일종의 신분증이었다. 위조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롤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하오.”

아말릭이 말했다.

“시체 처리야 저희를 시켜도 될 텐데······”

“불가능하오. 저 만한 시체를 무슨 수로 처리하겠소? 그저 불을 붙였다간 덜 구워진 고기가 될 뿐일 텐데. 그리고 짐 운반을 그대들에게 맡기진 않을 거요.”

“그러셔도 됩니다, 경. 부담 없이 명만 하십시오.”

아말릭은 겸손하게 말했으나 롤랑은 그가 당혹할 만치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아니, 그러지 않을 거요. 잊은 건가? 그대들은 싸우러 왔소. 잡일 하러 온 게 아니라.”

이내 아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롤랑은 말해놓고서도 내심 떨떠름했다. 저 안면 가리개 때문에 당최 표정을 알아볼 수 없었다.

‘불쾌한 건가, 아닌 건가?’

이후로 청소부들에게서 전리품 증서를 건네받았다.

사실 알아볼 수도 없는 종이 쪼가리를 받았다 해서 신뢰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롤랑은 종이를 간직하고서 상아에서는 신경을 거뒀다. 당장 중요한 것은 소득이 아니었으므로.

일행은 청소부들과 괴물의 시체를 뒤로한 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몇몇 청소부가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혹시 무언가 음험한 수작을 부리고자 저러는 것일지 모른다. 쫓아내는 것도 한 방법이리라.

그러나 롤랑은 그들이 뒤따르도록 내버려두기로 했다. 시체 청소란 말에 꺼리던 마음은 이미 사라진 뒤였기에.

생각해 보면 측은한 치들인 것이다. 이 먼 비프로스트까지 와서 하는 일이 시체 운반이라니.

지금 처리해야 할 시체는 또 얼마나 무거운가. 그 자리에서 태우는지 어쩌는지 잘 모르겠지만 분명 힘들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시체를 노리고 괴물들이 습격해올지도 모르니.

‘광산 노역도 저보다는 편할 테지.’

씁쓸한 마음에 롤랑은 발걸음을 빨리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괴물이 보였다. 이번에도 나무코끼리였고 역시 한 마리였다.

롤랑이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어쩔 건가?”

예상대로 제이슨은 주눅 든 채였다.

“음, 뭐 네가 피곤하면 피해가도······”

롤랑은 조금 생각해보고는 이내 말했다.

“피곤하진 않아. 그럼 잡지.”

제이슨은 살짝 애매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잡는다고? 그럼 이번에 시선 끄는 건 푸른 야수를 시킬까?”

롤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저 괴물은 꽤 지능이 높을 거다. 코끼리니까. 그렇담 척 보기에도 자신보다 재빨라 보일 뿐만 아니라 수상할 만치 번쩍거리는 사족보행 괴물을 무턱대고 쫓을 것 같지 않군. 괜히 그런 노골적인 미끼를 내세웠다가는 도리어 이쪽에 시선을 보낼 것 같다.”

정말 그리 생각해서 한 말이라기보다는 제이슨의 기세를 꺾고자 순식간에 지어낸 말이었다. 그러나 꽤 그럴 듯하다 여겼는지 제이슨은 무어라 반박하지 않았다.

제이슨은 그저 물었다.

“그럼 난?”

“대기해라. 만에 하나 습격해올 것에 대비해서. 그럼, 모지? 이번에는 작전을 바꾸지. 나 돌입 먼저, 사안은 그 뒤에. 알아들었나?”

모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롤랑이 앞장섰고 모지가 그 뒤를 따랐다.

투명화는 하지 않았다. 투명한 상태에서도 사안을 쓸 수 있으나 그 효과는 반감된다. 그야 눈도 투명해지니까.

두 영웅이 나무코끼리에게 다가갔다.

괴물이 무언가 대응하기도 전에 롤랑이 먼저 달려들었다.

“오딘께 내 영혼을!”

순식간에 롤랑은 괴물의 지척까지 도달했다. 괴물이 이쪽에 시선을 주기가 무섭게 롤랑은 그 목을 슥 그었다.

그리하여 괴물이 눈을 부릅뜬 순간에야 모지가 사안을 썼다. 그 사이한 눈빛에 노출된 괴물은 부릅뜬 채로 몸이 굳었다.

이내 롤랑이 파고들어 그 배를 마구 베어냈다. 이번에는 일자로 길게 긋는 것이 아니라 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깊이 베었다.

이내 사안으로 인한 마비가 풀렸다. 괴물의 몸에서 상처가 벌어졌다. 그 배에서 피뿐만 아니라 좀 더 물컹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괴물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그저 고통에 겨워 무릎을 꺾었다. 출산보다 더한 고통이 뒤따랐다.

그 갈라진 배에서 시뻘겋고 물컹한 무언가가 빠져나왔다.

얼핏 보기에 거대한 핏방울로 보이는 그것은 한 덩이로 얽힌 창자였다.

거대한 창자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끔찍한 치명상에도 불구하고 괴물은 바로 죽지 않았다. 그저 난생 처음 보는, 무엇인지는 몰라도 자기 배에서 나왔으니 분명 귀중할 장기를 괴물은 흔들리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괴물이 비틀거렸다. 그러나 자기 창자를 깔아뭉개기 싫었는지 놈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 와중에도 뱃속 내용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미 창자와 피 웅덩이는 그저 하나의 빨간 무언가로 보이는지라 따로 분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제야 괴물의 나머지 다리에도 힘이 풀렸다.

괴물이 엎어졌다. 그리고 온몸에서 피를 쏟아내며 연신 꿈틀거렸다.

그러던 끝에 괴물은 안간 힘을 써 코를 들어 위를 향했다. 롤랑은 흠칫했다.

‘울려고? 동료들에게 신호를 보내고자?’

그러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롤랑이 뭐라 외치려던 순간, 이미 모지도 이 상황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모지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순간 주변에 정적이 깔렸다.

고요 주문. 이내 괴물의 마지막 시도는 아무런 소리도 내놓지 못했다.

결국 괴물 쓰러진 순간에는 흙먼지만 좀 날릴 뿐이었다. 풀썩 하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렇게 괴물은 조용하게 죽었다.

그 광경을 롤랑은 무신경하게 바라보았다.

또 다시 거대한 괴물을 쓰러뜨렸다. 역시 심장이 벌렁거리지만 이번에는 좀 무덤덤할 수 있었다. 계속 이러다 보면 언젠가는 익숙해질까.

롤랑은 이내 중얼거렸다.

“역시 이쪽이 낫군.”

모지가 물어왔다.

“잘되긴 했는데, 주문을 나중에 건다니. 그리 위험을 자초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이유가 있어?”

“무신경한 모습이니 접근하여 한 번 베기는 쉬우리라 생각했지. 그 다음에 주문을 걸면 일방적으로 공격할 시간이 길어지는 셈 아닌가.”

모지는 슬쩍 웃으며 말했다.

“판단 좋았네.”

“네 주문도. 아무튼 다음에도 이런 식으로?”

“그러자. 뭐, 또 잡을 거라면······”

“발견되면 또 잡지. 생각보다 처리하기 쉽고······”

롤랑은 나머지 일행이 저 멀리 있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조용히 말을 이었다.

“군대가 처리하지 못한 괴물을 영웅 일행들이 죄다 처리했노라, 이런 건 소문이 날 거잖아? 명성 유지하려면 가끔은 화려한 짓 좀 해줘야 하는데 당장 부담 없이 그럴 수 있어서 좋네. 마침 소문내줄 구경꾼들도 있지. 청소부들 말이야.”

“쉽게 잡을 수 있다 쳐도 갑자기 적극적이네. 앞으로도 이럴 거야?”

“척 보기에도 위험해 보이는 괴물들 다 죽여대면서 지나갈 거냐고? 물론 아니지. 지금이야 저 코끼리가 생각보다 상대하기 쉬울 뿐이고, 앞으로도 척 보기에 위험한 괴물들 일일이 다 싸울 순 없어. 그러지 않으려고 미리 날뛰는 거야. 제이슨 기죽이려고.”

“응?”

“정면에서 반박하면 오히려 반항심리 돋울 뿐이니까. 제이슨 말대로 괴물은 죽이면서 제이슨이 활약은 못 하게 하는 거지. 이런 식으로 그 의견에 따르는 척하면서 뜻대로 되지 않게 하는 게 낫다 싶네.”

모지는 슬쩍 웃었다.

“그렇겠네.”

“그럼 협조할 거지?”

모지가 고개를 끄덕인 순간 알론소가 달려왔다. 그리고 마구 외쳤다.

“대단합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롤랑 경!”

롤랑은 속으로 짜증을 내면서도 점잖게 지적했다.

“조용히, 세계수에서는 큰소리를 내선 안 되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모지의 역할도 컸소.”

그 말에 알론소는 또 다시 외쳤다. 롤랑이 여기서 큰소리를 내지 말라 했던 것은 잊은 채.

“아, 모지 공도 대단하십니다! 저야 식견이 모자라 몰랐습니다마는 뭔가 주문을 거신 거겠죠? 어떤 거였나요? 지금은 잊힌 고대 주문이었습니까?”

모지가 당황하는 가운데 롤랑이 그 늙은 기사를 조용히 시켜야 했다.

뒤늦게 온 청소부들이 이 시체 또한 접수했다. 일행은 또 다시 길을 나섰고 그러다 마주친 불운한 나무코끼리 한 마리를 또 참살했다.

그리고 또 걷자니 또 다시 코끼리 괴물이 보였다. 다만 이번에는 여러 마리였다.

성체 둘, 그리고 덜 큰 한 마리와 조그만 새끼 한 마리.

롤랑이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넘기지. 코끼리가 본디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임을 감안할 때 한 마리라도 통제할 수 없게 되어서는 곤란하다. 저 긴 코로 큰 소리를 내어 멀리 떨어진 코끼리 무리를 불러낼 가능성이 있거든. 그러니 앞으로도 두 마리 이상은 넘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괜찮나, 제이슨?”

제이슨이 고개를 끄덕였고 롤랑은 웃었다.

< 초원 - [2]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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