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원 - [1] >
안내 받은 곳으로 가보니 승강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오십 층, 세계수 가지에 통하는 승강기였다.
승강기 앞에 선 조합원이 요구했다.
“두당 석 닢입니다.”
요금을 내고 그 안에 들어섰다.
롤랑은 승강기 내부를 둘러보고는 꽤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가죽 의자까지 고정되어 있는 것이 나름 단장된 채였다.
그래봤자 동력원은 황소와 인부들이었지마는.
승강기는 여럿이었고 일행은 둘로 나뉘어 탔다. 간단히 나눌 수 있었다. 나병환자들, 그리고 나머지.
나병환자들이 탄 승강기가 먼저 공중에 떠올랐다. 멀미를 유발할 만치 덜렁거리는 승강기 안에서 롤랑은 속으로 신음했다.
‘애써 의도하지 않아도 사고가 터질 법하겠다마는, 이거 사고를 가장하고 누구 죽이기에는 딱 좋은 거 아닌가? 가뜩이나 비카파가 날 보는 눈이 심상찮은데······’
롤랑은 불안하게 속삭였다.
“모지, 공중부양 쓸 수 있지?”
모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 명의 영웅과 늙은 기사를 태운 승강기도 곧 허공에 떴다. 실제 걸린 시간보다 수십 배 긴 시간을 체감하고서야 승강기는 목적지에 닿았다.
절벽에 발을 디딘 순간 롤랑은 오딘께 진심으로 감사드렸다. 정말 죽었다가 살아난 기분이었기에.
어쨌건 생각보다 안전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외나무다리 역할을 하던 세계수 가지 또한 보강되어 있었다. 추가로 설치된 난간이며 판자가 보였다.
그래도 여전히 건너기 두려웠으나 어떻게든 모두 건넜다.
그리하여 일행은 다시금 세계수에 들어섰다.
빠르게 오십 층을 가로질러 계단을 올랐다. 걷는 도중 제이슨이 중얼거렸다.
“세계수 안의 인공물? DRPG 중에 정확히 이런 내용 있었는데······”
갑자기 현대 문명을 말하다니.
롤랑이 식겁했으나 현지인 동료들은 의아해하지 않았다. 모두들 그저 세계수에 들어왔음에 감격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바쁠 뿐.
애써 발 디딘 오십일 층은 한산한 가운데 으스스했다. 초원 지형이었다. 전쟁이 벌어졌다더니 시체는 없었으나 곳곳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알론소가 고함질렀다.
“이번에야말로 하피로군요!”
롤랑은 그쪽에 시선을 향했다. 과연 하피가 보였다.
저번에 봤던 늙어빠진 하피와 달리 젊고 아리따운 하피였다. 갸름한 얼굴에 긴 머리칼, 그리고 야릇한 유방.
그러나 거기 매혹될 수는 없었다. 하피들은 입가를 피로 적신 채 뼈다귀를 오독오독 씹고 있었다. 그녀들 또한 육식동물임이 확실했다.
정말로 판타지다운 생물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롤랑은 심히 불쾌해졌다.
다른 사람들도 그리 느낄 법하건만, 얼핏 듣기로 저 반인반수 괴물을 죽이는 것은 금지였다. 그럭저럭 무해한 하피들이 시체를 먹어치워 그 영양을 다른 위험한 괴물들에게 넘기지 않는 것은 유익한 일이기 때문이다.
롤랑은 언짢은 표정으로 뒤돌아서며 생각했다.
‘세계수의 시체처리는 저년들만의 임무가 아니지.’
일단의 무리가 수레를 끌고 오는 중이었다. 수레 안에는 천으로 뒤덮인 시체들이 짐짝처럼 실려 있었다.
사전조사를 해두었기에 롤랑도 저 무리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청소부들.
죽은 사람, 혹은 괴물의 시체를 수거해 와서는 재가 되도록 태워버리는 것이 저들의 임무였다. 그 와중 괴물의 시체에서 얻은 전리품의 일부를 챙길 것이요 사람 시체에 붙어있던 칼이나 장신구 따위는 저들의 몫이 되는 것이다.
시체털이범 같지만 범죄자들은 아니었다. 비프로스트 백작도 저들의 활동을 적극 권장했다.
세계수 안에 생겨난 시체는 곧 고기요 고기는 곧 괴물의 살이 되리라는 백작의 견해에 따르면, 저들 또한 하피만큼이나 유익한 자들이었다.
그 불쾌한 청소부들을 뒤로하고 일행은 앞으로 나아갔다.
아직 지도가 그려지지 않은 층이었으나 헤맬 필요는 없었다. 오십일 층 또한 오십 층과 비슷한 초원 지형이었으므로. 핏자국을 따라 걷기만 해도 길이 보였다.
대강 걷자니 나무들이 여럿 보였다. 그리고 그 나무들의 잎사귀를 빨아마시듯 하고 있는 거대한 괴물도.
척 보고서 저 괴물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롤랑이 중얼거렸다.
“나무코끼리?”
나무늑대를 보고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저 괴물은 그야말로 공룡이었다. 중력이 저 덩치를 허용하나 싶은 몸뚱이. 스치기만 해도 온몸이 아작 날 것이다.
롤랑은 당연히 저 괴물을 무시하고 지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앞선 군대가 다른 괴물들은 다 청소한 마당에 저토록 눈에 띄는 괴물은 남겨두었다. 그 사실은 저 거대한 짐승이 처리하기 극히 곤란한 괴물이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그러나 알론소와 나병환자들은 저 괴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나병환자들은 지금 안면가리개가 달린 투구를 쓰고 있어 그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잔뜩 기대에 찬 웃음을 머금고 있는 알론소를 보니 병자들의 가려진 표정도 짐작할 만했다.
‘잡고 싶다 이거지, 젠장.’
그들을 실망시키고자 롤랑이 말했다.
“저놈은 잡지 않을 거요.”
알론소가 눈을 크게 뜨며 물어왔다.
“어째서입니까? 저놈 상아가 그리······”
“벌이가 목적이 아니잖소? 목적을 혼동하면 안 되오, 경. 저런 거대한 괴물과 일전을 벌이는 것은 피곤할 뿐이고 괜한 위험을 자초할 필요도 없소. 돌아오는 길에 기력이 남아있다면 그때 잡을지 말지 생각해 볼만······”
그 말을 끊는 무례한 자가 있었다. 거의 언제나 그랬듯 제이슨이 끼어들었다.
“아니, 잡아야지!”
찌푸린 얼굴로 롤랑이 물었다.
“초입부터 체력을 낭비하자는 말인가?”
“애초에 저런 놈 잡으려고 체력이 필요한 거지! 왜 내버려둬? 잡아!”
롤랑은 속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좀 얌전해졌나 싶더니, 결국 제 성질 버리지 못했나?
‘이 저능아가 진짜. 경험치, 경험치 하더라니 이젠 아주······.’
심정과는 달리 롤랑은 점잖게 말했다.
“갈 길이 멀다. 우린 사냥꾼이 아니라 원정대임을 기억해라, 제이슨.”
“원정대 임무에 사냥도 포함돼 있는 거잖아!”
말이 통하지 않았다. 롤랑은 굳은 얼굴로 모지를 바라보았지만 모지는 그저 난처한 표정만 지어보였다. 평소에는 꽤나 말 잘하더니 분쟁에 끼어들 엄두는 나지 않는 것일까?
물론 현지인 동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섯 명은 그저 두 영웅이 실랑이 벌이는 것을 불안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좋지 않았다. 롤랑은 이를 악물며 생각했다.
‘벌써부터 분란을 벌여선 안 돼. 그것도 첫 출진인데 현지인들 앞에서.’
결국 먼저 굽힌 것은 롤랑이었다.
“저 한 마리 잡아보자 이건가?”
“그래, 얼른!”
“알겠다. 하지만 한 마리 잡아보고 소모가 크다 싶으면 다음부터는 넘긴다. 알았나?”
제이슨은 신나게 고개를 끄덕였고 롤랑은 신음하며 칼을 뽑았다.
현재 가진 칼은 두 자루였다. 한 자루는 오스론이 구해준 칼이었는데 꽤 좋은 칼일 테지만 대단한 주문이 걸린 무기는 아니었다. 일단은 이것이 주 무기였다.
다른 한 자루, 보조 무기는 척 보기에도 요사한 모양새였다.
예리한 흑요석 여럿을 연결해둔 장검.
천 닢이나 내고 샀다. 그러나 무턱대고 써서는 곧바로 부러질 터였다. 가뜩이나 경도가 약한 흑요석을 얼기설기 연결한 물건이니까. 그 약해빠진 검신에는 염동력을 둘러 휘둘러야 했다.
그 경우 흑요석 특유의 예리함에 염동력이 더해져 대단히 잘 드는 칼이 된다고 들었다. 칼에 마법적인 처리를 해두어 염동력이 특별히 잘 스며든다고도.
애초에 그런 용도로 만든 무기라 이름조차 염동검(念動劍)인 것이다.
이 정도 예리함이면 저 코끼리의 두꺼운 가죽에도 통할 터였다. 그러나 마음 놓고 쓸 수 있는 무기가 아니었다. 염동력 발현은 정신적으로 지치는 일이니까. 그래서 천 닢이나 하는 주제에 주 무기가 아니라 보조 무기로 채용되었다.
“자, 간다······.”
롤랑은 염동검을 뽑아서는 거기에 힘을 불어넣었다. 시커먼 검신 사이로 아지랑이 같은 무언가가 일렁였다.
이윽고 롤랑과 모지가 앞으로 나섰다.
롤랑이 모지를 돌아보며 신호했다.
‘준비해.’
모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롤랑이 먼저 달려가 포효했다.
“나를 봐라—!”
풀을 뜯던 코끼리가 움찔했다.
코끼리 괴물이 롤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바로 달려들지는 않고 그 자리에 멀뚱히 서있었다.
둘이서 눈싸움하던 와중, 그 사이에 모지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이제는 모지와 코끼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내 모지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 눈이 보라색으로 빛났다. 사안(邪眼).
눈싸움하던 코끼리의 동공에 그 요사한 빛이 스며든 순간 놈의 몸이 마비되었다.
괴물이 굳었다 느낀 즉시 롤랑은 달려 나갔다.
순식간에 괴물에게 다다랐다. 괴물의 거대한 몸뚱이가 롤랑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직 괴물은 마비된 채였다. 하지만 놈이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젠장.’
롤랑은 코끼리의 목 아래를 통과하듯 빠르게 달려 나갔다. 그러는 동시에 염동검으로 놈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언가 잘리는 감각은 확실히 있었다. 그러나 염동력의 마찰로 말미암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물론 어떻게든 참아내야 했다. 생사의 문제니까.
롤랑은 마비가 풀릴세라 속히 괴물에게서 벗어났다. 과연 코끼리의 마비가 금세 풀렸다.
그와 동시에 굳어있던 괴물의 근육이 이완되었다. 그리하여 칼이 스치고 지나가며 만들어낸 상처가 벌어졌다.
괴물의 목에서 붉은 피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괴물이 일순 몸을 비틀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다. 이내 괴물은 원수를 찾아 시선을 헤맸다.
모지는 재빠르게 투명화 주문을 외웠다. 롤랑은 그 주문이 완성되도록 지켜야 했다.
롤랑이 도로 달려와 코끼리의 앞에 섰다. 그리고 시선을 끌고자 고함질렀다.
“덤벼라—!”
이번에도 코끼리 괴물은 몸을 부르르 떨며 움찔했다.
포효의 성과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코끼리는 원수를 눈앞의 시뻘건 놈으로 판정했다. 애초에 칼질한 것도 놈이었으므로.
이내 괴물은 머리를 부르르 떨더니, 원수를 향해 지진을 울리며 달려들었다.
괴물에게서 도망치고자 롤랑이 달렸다. 죽어라 질주하는 가운데 뒤에서 자연재해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지면이 울림에 따라 롤랑의 심장도 미친 듯이 울려댔다. 저 괴물을 사냥한다니. 예상했듯 과연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계속 도망칠 수는 없었다. 롤랑은 달리다 말고 뒤돌아섰다.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괴물의 정면이 보였다.
끔찍하게도 롤랑과 괴물의 거리는 크게 벌어져 있지 않았다. 코끼리 괴물은 금방이라도 여기 닿아 롤랑을 받아버릴 듯했다.
이내 롤랑이 괴물에게 돌진했다.
계속 달려나가 괴물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 거대한 발이 땅을 두들길 때마다 돌이 튀었으므로.
그러나 롤랑은 머리를 앞세우고 곧장 달렸다. 그저 자기가 입은 갑옷이 튼튼하기만을 빌며.
괴물은 자신의 배 아래에서 기척을 느꼈다. 이내 짓밟으려는 듯 발을 마구 내리찍었다.
과연 사방에서 돌이 튀겼다. 피탄 면적을 줄여야 했다.
롤랑은 허리를 깊이 숙이고, 고개도 숙여 머리를 앞세운 채 질주했다. 그리하여 코끼리의 몸 아래를 통과하는 가운데 염동검의 칼날을 위로 향했다.
그로써 괴물의 목에서 배까지 칼금을 그어주었다.
염동력 칼날이 괴물의 두꺼운 가죽을 길게 쑤셨다. 끔찍하게 고역스러운 일이었지만 롤랑은 기어이 해냈다.
이내 롤랑은 괴물의 꽁무니 너머로 빠져나왔다.
달아나고자 그대로 계속 달렸다. 한동안은 등 뒤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뒤따랐으나 금세 멈췄다. 롤랑은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무릎 꿇은 코끼리 괴물이 보였다.
목에서, 배에서 피가 마구 흘려내렸다. 괴물은 고통에 겨워 코를 위로 향한 채 울부짖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롤랑은 괴물의 숨이 멎을 때까지 끈기 있게 그 주변을 맴돌았다.
계속해서 시선을 끌어야 했다. 혹시라도 괴물이 다시 일어서 동료에게 달려들었다가는 큰일이었으므로.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괴물은 죽었다.
< 초원 - [1]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