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택 - [4] >
나병환자들의 합류는 말을 꺼내기 전부터 당연시한 것이었다. 당연히도 병자들은 승낙했다.
알론소도 마찬가지였다. 같이 다니겠느냐 권유하기 무섭게 알론소는 통곡하듯 외쳐댔다.
“영광입니다! 참으로 일생의 영광입니다!”
그리하여 당장의 동료가 정해졌다.
노망 난 기사와 나병환자 다섯.
엄선한 인원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당장 조용히 데려가기에는 좋은 편성이었다. 지금으로서는 그 사실만으로도 동료가 될 조건으로는 충분했다.
사흘 후에는 기필코 세계수에 들어가기로 약조한 바였으므로. 사지에 들어가기로 결정한 이상 그 결심이 흐려져서는 곤란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세계수 진입을 미뤄서는 곤란하며 진입을 미룰 만한 일을 만들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만반의 준비를 갖추겠답시고, 최고의 동료를 엄선하겠답시고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되었다.
롤랑은 생각했다.
‘채용을 결정한 이상 해줄 수 있는 것을 해주어야지. 우선은 영웅들의 동료에 걸맞은 신분부터.’
잠시 후, 연회실 한 가운데 성전에 나설 동료들이 모였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롤랑이 검을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순례자 아말릭, 동지들을 대표하여 앞으로 나서라.”
아말릭과 그 동료 병자들은 앞으로 나와 무릎 꿇었다. 롤랑은 아말릭의 어깨에 칼을 가져가서는 말했다.
“천상의 신들께 경의를 표하며 그대를 영원토록 기사에 봉한다. 앞으로 그대의 영혼은 신들의 것이다. 맹세하는가?”
아말릭이 대답했다.
“궁니르에 걸고 맹세합니다.”
“진실한 충심으로 전우들을 지킬 것이며, 그 어떤 전투에서도 명예를 잊지 않으리라 맹세하는가?”
“궁니르에 걸고 맹세합니다.”
서임식의 입회인으로는 알론소와 제이슨이 자리 잡았다.
기사인 알론소는 물론 제이슨 또한 서임식을 이끌 자격이 있었다. 자주 잊는 사실이지만 소환사 또한 사제였으니까. 앞선 의식에서 제이슨이 이미 축복을 해준 바였다.
롤랑이 말했다.
“눈을 감아라, 기사.”
나병환자들은 시키는 대로 했다.
병자들의 어깨를 롤랑은 검으로 세 번 두드렸다. 그 다음 몸소 일으켜 세워주었다.
이제 병자들은 법적으로도 기사였다.
간략한 의식이 끝나자 롤랑이 말했다.
“원래는 더 거창하게 해야겠지만 다가올 전투가 급박한 나머지 간략하게 치렀소. 그 점에 대해 사과하오.”
병자들은 즉시 아니라고, 그저 영광이라고 부르짖었다.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알론소는 감격스러운지 뿌예진 눈가를 손으로 훑었다.
나병환자들의 문드러진 얼굴에는 감히 시선을 보내지 못했지마는. 그나마 뭐라 욕설을 지껄이지 않는 것이 다행일 뿐이었다.
이후 일정을 진행했다. 보통 기사 서임 이후로는 연회가 뒤따르기 마련이지만 이번에는 그마저 간략히 해야 했다.
코앞에 목숨을 건 모험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영웅들조차 그날을 두려워하는 마당에 미력하기 그지없는 자들이 들떠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간단히 벌꿀술 한 잔씩만 하고서 곧바로 훈련에 들어갔다.
훈련 교관은 알론소가 맡았다. 지주 기사로서 알론소는 자기 소작인들에게 간단한 훈련을 시켜본 경험이 있었다.
“자세 잡아라! 고귀한 창문 자세!”
알론소가 외치고 병자들이 복창했다.
“창문 자세!”
그러고서 창을 높이 들고, 뒤따른 명령에 따라 창을 찔렀다가 당겼다. 그런 간단한 동작을 죽어라 반복했다.
그 모습을 롤랑은 담담하게 지켜보았다.
일주일의 절반도 안 되는 사이에 훈련해봤자 큰 도움은 될 수 없을 것이다. 당장에는 그저 숨이 간당간당한 괴물의 목에 창을 찔러 넣을 수 있을 정도만 되기를 바랐다.
저녁식사 후, 문득 앤지가 물어왔다.
“기사님, 왜 문둥이를 데려가세요?”
롤랑은 즉시 정정했다.
“문둥이는 멸칭이다. 쓰지 마. 이제 그들도 기사다. 경의를 담아 불러라.”
롤랑이 꽤 근엄하게 분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앤지는 입을 삐죽였다.
“하지만 신의 저주를 받은 자들인데······”
바로 말대꾸라니. 의외로 신전에서 오냐오냐 키워졌던 것일까?
롤랑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누가? 나병환자가? 신의 저주니 뭐니 해도 죄다 지상의 인간들이 하는 말이다. 신들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러니 귀담아 들을 것 없다. 다시 말하건대, 경의를 담아 저들을 대해라. 그러기 싫더라도 최소한 멸시하지 마라. 알겠냐, 앤지?”
앤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역시 완전히 납득한 것 같지는 않았다. 불만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역시 고분고분하지 않은데.’
롤랑은 속으로 생각했다. 확 소리 지르기라도 해야 할까?
그러나 교양인을 자처하는 현대인으로서 롤랑은 애들 교육을 그따위로 해봤자 도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달리 좋은 방법을 아는 것은 아니었지마는.
롤랑은 속으로 신음했다. 종자 교육 하나 이리도 어렵다니.
뭐든지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것이 세상일이라는 것쯤 익히 알고 있지만, 제발 사흘 후마저 이런 식이지는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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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 뜻대로만 풀리지 않는 법이다. 이 사실을 칼 경은 잘 알고 있었다.
일가를 이룬 귀족으로서 칼 경은 온갖 지겨운 분쟁에 휘말려왔다. 그리고 이 나이가 되니 그 모든 것이 지겨워져 모험을 바랐다.
그리하여 진행 중이던 모든 재산소송을 이쪽에 불리하게 정리한 후 이곳 비프로스트에 왔다. 더 늦기 전에 무언가 낭만적인 일을 해보고자.
물론 세계수와 그곳의 괴물들이 위험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은 데려오지 않고 가문을 지키도록 했다.
그것만은 잘했다고 생각한다. 세계수에 들어온 지금 와서는 더욱 그리 느꼈다.
칼 경이 피가 섞인 침을 삼켰다.
‘발두르여.’
빠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뼈와 살이 모조리 짜부라지는 소리.
그렇게 젊은 기사 하나가 죽었다.
납작하게. 거대한 괴물의 발에 짓밟혀.
괴물이 거대한 발을 들어 올렸다. 그 밟힌 자리에는 사람이었던 무언가가 지저분하게 남아있었다.
사람의 잔해에서 오도독, 오도독 하는 소리가 계속 났다. 금속갑옷과 온몸의 뼈가 부러져 계속해서 균열이 가는 소리였다.
물론 칼 경은 자세히 듣고 싶지 않았고 새삼 흥미가 가지도 않았다.
저 소리를 이미 너무 많이 들었다. 정확히는 벌써 여덟 번째 들었다. 그러니까 여덟 명의 기사가 저리 죽어버린 것이다.
죽은 여덟 모두 젊은 기사들이었다. 칼 경이 직접 교육하고 서임해준 소년 기사들.
‘발두르여.’
괴물이 거대한 발을 옮겼다. 그와 동시에 지진과도 같은 충격이 몸으로 전해졌다.
칼 경이 움찔하는 차 괴물이 또 다시 발을 내리찍었다.
우선은 쾅 하는 소리. 그리고 또 다시 빠드득, 오도독.
살아남은 젊은 기사는 이제 두 명뿐이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비슷한 운명을 맞을 터였다.
적어도 한 명은 이미 반쯤 죽은 목숨이었다. 그 소년 역시 다른 기사들처럼 온몸의 뼈가 부러져 땅바닥에 널브러진 채였으니까.
또 다른 젊은 기사인 월렴은 제법 멀쩡하게 서있었다. 놈은 아직 당하지 않았기에 괴물을 향해 검까지 겨누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소용인가?
아무 소용없었다. 월렴의 온몸이 공포로 떨렸다. 그 손에 들린 발리사다 또한 진동하고 있었다.
칼 경은 그 룬검을 허무하게 바라보았다.
‘롤랑이 들 때는 그리도 신비해보였는데.’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저 송곳 한 자루에 지나지 않았다.
정말이지 저 괴물에 비교하면 그 비교도 과분하다······.
괴물이 또 다른 젊은 기사를 짓밟고자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 와중 이미 짓밟혀 곤죽이 된 시체들이 또 다시 짓밟혀 핏물을 튀겼다.
쿵, 쾅, 뿌지직, 우드득.
널브러진 소년 기사가 비명 질렀다.
“오지 마! 아아아아, 아아아아악!”
괴물은 느릿해 보이는 동작으로 순식간에 기사에게 다가갔다. 그 발을 살짝 들어 올렸다가 내리찍었다.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뿌드득 하는 소리가 나지막이 그 뒤를 따랐다.
괴물이 발을 들어 올리자 그 자리에는 시체 모독적인 끔찍한 것이 남아있었다.
괴물이 다음 목표물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칼 경과 괴물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응시를 견디지 못하고 칼 경은 눈을 감아버렸다.
저 괴물, 어마어마한 덩치에 기괴할 만치 긴 코를 가진 괴물.
이름은 알고 있었다. 나무코끼리.
나무늑대가 그러했듯 저 괴물 역시 이름의 근원이 된 짐승보다 훨씬 큰 괴물이었다. 실제 저 괴물이 움직이면 몇 층짜리 건물이 이동하는 셈이었다.
새삼 생각해봐도 미친 일이었다. 저 괴물을 사냥할 수 있다 믿었다니.
오늘 모두 세계수를 개척하노라 들떠있었다. 그리고 실제 세계수에 발을 디뎌 탐색에 나섰다.
여러 군대가 휩쓸고 지나간 나머지 변변한 사냥감은 보이지 않았던 가운데. 멀리서 저 괴물을 발견한 젊은 기사가 말했다.
‘상아가 그리도 값지다던데요? 클수록 비싸다던데. 저놈 상아는 팔면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싸겠네요.’
또 다른 젊은 기사가 말했다.
‘코끼리면 약점 많은 짐승이죠?’
칼 경이 물었다.
‘약점이 있기는 한 생물인가?’
‘커봤자 생물이라서 발쪽을 찌르면 무력화돼요. 저 기다란 코를 찔러도 좋다던데요. 코를 다친 순간 코끼리는 엄청난 고통을 느낀다던가? 책에서 읽은 적 있어요. 저렇게 육중한데도 괜히 전쟁에서 퇴출된 게 아니라는 모양이데요.’
그 개소리를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그러나 칼 경은 이렇게 말해버렸다.
‘그럼 잡을 수 있을까?’
‘못할 게 뭐예요? 창도 있고 도끼도 있잖아요. 수도 되고. 게다가 저놈, 나무코끼리라고 했나? 최하층에도 보이던 놈인데 돈놀이꾼의 군대가 죄다 처리 했다지요. 그 바람에 놈들 상아가 요즘 와서는 진짜 금값을 능가한다던데요.’
‘그래서 잡자고?’
‘예!’
칼 경은 저런 괴물을 죽인다니 터무니없다고 느꼈다. 그러나 주변의 젊은 기사들은 그것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믿는 눈치였다.
게다가 칼 경이 데려온 병졸들 또한 의욕이 넘쳐있었다. 전투에 임하는 보통 병사들답지 않게, 모두들 저 괴물을 죽이고 싶어 안달했다.
‘허락만 내려주십시오! 즉시 달려 나가겠습니다!’
모두들 모험을 바랐고 전리품을 바랐다. 비프로스트에 온 몽상가들답게도.
그리하여 칼 경이 명령했다.
‘모두 바란다면, 좋다! 자, 첫 사냥이다! 영광스럽게 싸우자!’
물러서지 말라는 명령은 내릴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다들 목숨이 아까웠으면 이곳 세계수에 오르지 않았을 테니까.
결국 젊은 기사들과 백 명에 가까운 병사들은 용맹하게 달려들었다. 다 같이 함성을 내지르며.
‘발할라를 위하여!’
이내 병사들은 코끼리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놈을 포위했다. 그리고 아까 들은 약점을 공략하고자 각자 무기를 휘두른 순간, 한가로이 풀을 뜯던 코끼리가 그제야 모두에게 관심을 주었다.
이내 코끼리가 슬쩍 코를 휘두른 순간 열 명이 휩쓸려나갔다. 과장 없이 정말 그랬다.
당황한 병사들이 코끼리의 코를 향해 도끼를 내리찍었다. 그곳이 예민한 부위인즉 찌르기만 하면 코끼리는 고통을 견디지 못해 이성을 잃으리라는 말을 믿고.
그러나 그 말의 진위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도끼로, 창으로 공격해도 그 코의 가죽조차 뚫지 못했다. 다른 약점이라 들어 공격한 발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의미 없는 행위를 확실히 공격이라 판단했는지 코끼리는 분노해버렸다. 그리하여 코끼리는 마구 코를 휘두르고, 돌격하여 수십 명을 그대로 깔아뭉개고, 짓밟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분명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노라 호언장담했던 병사들은 죄다 달아나버렸다. 분명 발할라를 원해 자원해온 병사가 있었을 텐데 그들조차 공포를 이기지 못했다.
젊은 기사들이 달아나지 못한 것은 소년들이 더욱 용감해서가 아니라 갑옷 무게 때문에 뒤쳐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코끼리가 대충 휘두른 코에 나가떨어져 땅을 굴렀고, 그럼에도 숨이 붙어있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코끼리에게 하나하나 밟혀죽었다.
이제 칼 경의 차례였다.
‘발두르여.’
칼 경이 눈감은 순간, 웬 기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
월렴의 목소리였다. 비명과 달리 월렴은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돌격해오고 있었다.
이쪽으로. 아마도 위기에 처한 칼 경을 구하기 위해서.
칼 경은 그 사실이 조금도 고맙지 않았다.
‘달아나, 멍청아. 달아나라고.’
그리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공포에 짓눌려 온몸이 마비된 채였다. 다리도, 입과 그 안의 혀도.
최후를 기다리는 가운데 무언가 베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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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택 - [4]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