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39화 (39/164)

< 저택 - [3] >

주교의 말이 이어졌다.

“이상한 일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상처가 나은 환자들은 빨리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여기까지야 이해는 안 되더라도 좋은 일입니다마는, 그 환자들이 여러 이해 못할 실수를 하기 시작하더군요. 이해 못할 실수란 대강 이런 것들입니다. 잔을 너무 세게 쥔 바람에 깨뜨린다든가, 깃펜을 쥐었더니 아작 낸다든가, 책을 펼쳤더니 그 책이 양쪽으로 찢어진다든가······”

그 실수들의 공통점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롤랑은 속으로 당혹하며 물었다.

“그들이 힘 조절을 못 하더란 말이군?”

“게다가 그 깨뜨린 잔은 악력으로 부수기엔 꽤나 단단한 재질이었습니다. 책은 그 어떤 장사도 단번에 찢지 못할 두께였고요.”

게다가 괴력까지 생겼다니.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롤랑은 쉽게 눈치 챘다. 이미 전례가 있었던 것이다.

‘레벨 업.’

유저들처럼. 그리고 알론소처럼.

그 극적인 변화를 겪은 자들의 특징은 이러했다.

대부분 지금껏 괴물들과 사투를 겪어온 자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번 성전에서 각자 괴물들의 숨통을 끊은 결과 그리 되었다는 것.

이 현상을 주교는 내심 우려하고 있었노라 고백했다. 죽은 괴물의 저주가 괴이한 방식으로 발현된 것은 아닐까 했다고.

롤랑은 성당을 나와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방금 듣기로 유저들의 특권인 줄 알았던 레벨 업은 사실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옛날부터 그랬던 것인가? 아니면 지금 와서 이렇게 된 것인가?

롤랑으로서는 전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고대 영웅들의 신체능력은 명백하게 현생 인류보다 우월하다. 어째서 그런 차이가 있나?

‘혹시 지금 발견된 현상이 고대에는 빈번했던 것이 아닌가?’

서적에서 읽었기를 카를 대제와 그 성기사들의 주된 업적은 인간의 세력권을 확장시킨 것이었다. 대제의 군대는 이 땅 미드가르드에서 괴물과 거인들을 소탕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세계수까지 들이닥쳤다.

그 이후로 미드가르드의 농부들은 괴물이 아니라 곰과 늑대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제 미드가르드에서 괴물은 먼 오지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다.

‘몬스터가 없으면 경험치도 벌 수 없는 거지. 퀘스트 경험치는 게임적 허용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니 넘기고······.’

이 가정이 옳다면 왜 이전 층에서는 이 레벨 업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나? 세계수 초반의 괴물들이 내뱉는 경험치, 그러니까 지난바 영혼이 적어서? 아니면 그동안 죽인 괴물의 수가 적어서?

어쩌면 이미 일어난 현상인데 두드러지지 않았을 뿐일지도 모른다······.

사실이야 어쨌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명백하다. 세계수에 올라 괴물을 죽이고 또 죽이다 보면 전사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 강해질 것이다. 물론 게임에서의 플레이어 캐릭터들조차 그랬듯 그 과정에서 대부분은 죽을 것이다.

그러나 자질과 기술, 그리고 운까지 따라준 소수는 영웅적으로 강해질 것이다. 롤랑처럼. 혹은 그 이상으로.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영웅들의 특수성이 줄었음에 한탄해야 하나? 아니면 영웅들 또한 이 세계에 자연스레 녹아들 수 있게 되었음에 기뻐해야 하나?

당장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저택에 돌아와 보니 제이슨이 알론소를 불러다 대련하고 있었다. 저 노인을 상대로는 쉽게 이길 수 있어 기쁜지 제이슨은 호쾌하게도 목검을 휘둘러댔다.

그 의기양양한 얼굴을 보기 싫었던 롤랑이 목검을 든 후에야 그 낯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둘이서 대련을 마친 후로는 사람을 시켜 조합에다 칼의 구입을 의뢰했다. 룬검이든 성유물이든 주문이 걸린 검이든.

좋은 칼이 구해지거나 만약 끝내 칼이 구해지지 않더라도 사흘쯤 지난다면 본격적으로 세계수를 탐방할 예정이었다.

‘평생 가기 싫은데.’

휴가가 끝나가는 기분. 롤랑은 한숨 쉬며 깃펜을 들었다. 그리고 종이에다 글을 적어내리기 시작했다.

헌금과 함께 소환전에 보낼 편지였다.

친애하는 벗에게.

비프로스트에는 무사히 도착했다.

같이 온 두 동료를 평가하건대, 당초 걱정했던 모지는 충분히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솔직히 너무 기대이상이라 예전 인상이 희박해질 지경이다.

제이슨은 여전히 천둥벌거숭이지만 견디기 힘들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요즘에는 그 정도가 덜해지고 있다. 어쩌면 조금 시간이 흐르면 너와도 이야기가 통할 만치 순해질지도 모르겠다.

그 둘과 함께 세계수에 올랐다.

실제 괴물과 싸우기도 했다. 예상했듯 당시와는 다른 감각이다. 비웃음 당할 수 없으니 자세한 내용은 적지 않겠으나 네게도 짐작은 가리라 생각한다.

아마 너희 차례도 곧 올 것이다. 서른 넘게 불러놓고 우리 셋만 부려먹을 것 같지는 않으니.

그날에 대비해라.

편지가 검열될 것을 가정하고 적었다.

한글을 쓸 수는 없었다. 암호를 쓴다는 것 자체가 수상한 일이요 만에 하나 해독될지도 모르니. 결국 현지인들의 레벨 업 따위 소식을 적어 넣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오딘께서 소원을 들어주리라 약속하셨다느니 어쩌느니 적어 넣을 수도 없었다. 헛된 희망을 줄 수 없는 노릇이므로.

결국 적어 넣은 것이라고는 소식 몇 자가 다였다.

이후 저녁을 먹을 때까지 바쁜 하루를 보냈다. 세 명은 대련하고, 토론하고, 방침을 정했다. 레벨 업의 보편화 소식 또한 전달을 마친 바였다.

이내 롤랑이 말했다.

“그러니까 알론소 영입은 재고하지? 거의 모두가 레벨 업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게 드러난 이상 알론소는 가치가 없어. 실력도 별로인 노인네를 굳이 키워줄 필요는 없는 셈 아닌가? 똑같이 레벨 업해도 젊고 뛰어난 검객이나 마법사 따위가 더 나을 거잖아.”

그 말에 제이슨이 즉시 반대했다.

“개소리!”

롤랑은 아연하게 물었다.

“너 왜 그리 그 영감 좋아해?”

“몇 번을 말해야 알겠냐? 괴물들 상대로 돌격할 정신머리 있는 것만으로 신전에 남은 새끼들보다 훨씬 낫다니까?”

롤랑은 한숨 쉬고 싶은 기분으로 모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친구에게는 이성이 남아있을 테니까.

그러나 모지 또한 롤랑이 바라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나도 알론소 영입은 취소하지 말아야 한다고 봐.”

“왜? 롤랑 명성이면 실력 뛰어난 동료 몇이든 구할 수 있을 텐데?”

“뛰어난 사람한테는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줘야지. 목숨 걸고 싸우는 건데 수익 분배에서도 섭섭지 않게 해줘야 할 테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식으로 좋은 인재 부려다 보수 제대로 쳐줄 처지가 못돼. 알지? RPG적으로 우리는 지금 모두 초기 장비만 겨우 걸치고 있는 셈이야. 그 탓에 아무나 쇠뇌 들고 쏘면 난 죽는다······.

마법계열은 템빨 덜 받는다 해도 역시 아무거나 걸칠 수는 없는 거지. 그런데 장비 중요한 전사계열인 너마저 지금 강철갑옷 강철장검 수준이라니? 역시 이대론 안 돼. 애당초 RPG의 몬스터 밸런스는 레벨에 걸맞은 장비를 입었음을 상정하고 짜놓는 거지? 앞으로 상대할 적들은 그 발리사다 같은 무구 없이는 상대하기 벅찰지도······.”

롤랑이 침묵하는 가운데 모지는 계속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레이드 보스를 조진다고 좋은 장비가 드랍 되지는 않아. 게임과 달리 상금만 좀 탈 수 있을 뿐이지. 그러니까 그 상금이라도 활용해서 장비를 맞춰야 하는 건데 이미 헌금까지 주기적으로 바치기로 한 마당에 따로 돈 나갈 구석을 만들 순 없어.”

왠지 헌금 이야기를 듣고서 싫어하더라니. 종교적이 아니라 금전적 문제로 꺼렸던 모양이다.

롤랑은 한숨 쉬며 말했다.

“그래서 알론소를 끼우자? 별로 금전적으로 보상해줄 필요 없을 테니까?”

“그래. 제이슨과 그 노인이 대화하는 걸 들어봤는데 그 노인은 네 열광적인 팬이더라. 꿈 많은 기사답게 말이지. 그러니까 그 양반은 보수 목적이 아닌 그저 영웅과 같이 싸우게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럽게 싸울 거야.”

“그래도 굳이 알론소를? 그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도 롤랑과 함께라면 무보수로 같이 싸울 것 같은데?”

모지는 담담하게 말했다.

“사흘 후에 세계수에 들어가기로 했잖아? 인원모집 하려면 꽤 시끄러워질 텐데. 당장 조용히 데려갈 수 있는 사람을 마다할 필요는 없지?”

합리적인 설명이었지만 롤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제대로 된 봉급을 주기가 싫고 당장 일을 시켜야 하므로 어정쩡한 사람을 채용한다니.

‘열정페이 주는 악덕사장도 아니고······.’

롤랑은 뭐라 따지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확실히 저번 거인과의 싸움에서 증명되었듯 좋은 무구는 중요하다.

마법적인 무기와 비마법적인 일반무기 사이에는 화기와 냉병기 수준의 격차가 있다.

그런데 지금 일행은 당장 번 돈으로도 변변한 마구 한 벌 살 수 있을지조차 알지 못하는 마당 아닌가. 제대로 보상을 해주니 마니 하는 것은 그 문제가 해결된 이후로 미뤄야 할 것이다.

롤랑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도덕은 부차적인 문제다. 당장에는 살아남기 급급하니까.’

이후로도 토론은 꽤나 씁쓸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토론의 결론마저 내려진 후, 롤랑은 저택의 구석진 방에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기도 중인 나병환자들이 보였다.

영웅의 출현에 나병환자들은 서둘러 자리를 잡았다. 롤랑은 그것을 말리지 않은 채 이내 무릎 꿇고 앉은 병자들 앞에서 입을 열었다.

“여러분, 이곳에는 어떤 이유로 오셨소?”

대표로 대답한 것은 아말릭이었다.

“발할라를 향해 왔습니다.”

“세계수에서 죽으려고?”

“예.”

“세계수에서 죽기만 하면 발할라가 반겨주나?”

아말릭은 쓰게 대답했다.

“모릅니다. 아마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발두르께서는 전사들이 필요해 신탁을 내리신 것일 테니까요.”

“그리 생각하면서 어찌 괴물들의 품에 달려들었소?”

“만에 하나 그 신탁이 문장 그대로의 내용이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발할라의 문턱에 발을 디딜 수도······.”

“그러다 심사에 걸려 쫓겨날 수도?”

“있겠지요, 물론.”

병자들의 얼굴에 새삼 어둠이 깔렸다. 그리고 롤랑의 가슴에도.

대한민국 건국 초기, 한센병자들은 단체로 끌려가 수용되었다. 한센병의 전염성이 극히 낮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에도 한센병 진료원이 생길라 치면 근방 주민들은 열렬히 반대시위에 나섰다.

현대에도 그들의 삶은 더없이 퍽퍽했다. 하물며 중세인 이곳에서야.

그리고 이제 롤랑은 그 가엾은 자들을 끌어들이려 왔다.

롤랑이 말했다.

“하지만 전사라면 그 문턱을 넘을 수 있겠지.”

“아마도······”

“그 문턱, 넘고 싶소? 아직도?”

병자들이 롤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말릭이 물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전사가 되는 거요. 발할라가 내쫓지 않을 만한 전사가. 그래서 대답은? 괴물늑대들에게서 죽을 고비를 넘긴 당신들이라면 괴물들의 공포를 알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발할라에 가고 싶소?”

아말릭이 대답했다.

“가능하다면······.”

“가능할 거요. 영광을 보인다면야. 신들께서 지켜보시니.”

잠시 침묵이 깔렸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아말릭이 물었다.

“저희라도······ 문둥이의 몸뚱이라도 발할라에 닿겠습니까? 정말?”

“약속할 수는 없소. 장담할 수 있는 건 둘뿐이오.”

“어떤?”

아말릭의 물음에 롤랑이 대답했다.

“영광스러운 싸움.”

모두가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가운데 롤랑은 말을 이었다.

“어쩌면 영광스러운 죽음.”

“영광······”

“줄 수 있는 건 정말 그게 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한다면······ 영웅들의 싸움에 동참할 텐가?”

정말 그 두 가지만을 주어도 충분할 것이기에 롤랑은 저들을 선택했다.

물론 돌아올 대답은 정해져있었다.

*******

< 저택 - [3]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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