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택 - [2] >
롤랑은 잠시 자기 귀를 의심했다. 동료? 알론소가?
“그 양반이 전력이 돼? 너 저번에 그 영감 썩 잘 싸우진 못했다고 했잖······”
“뭐 그랬긴 해. 소환물들 사이에 꼽사리 껴서 창질만 죽어라 하는데, 힘이 약해갖고 그 양반이 기껏 늑대 대가리를 후려쳐도 별 타격을 못 줬지.”
“그런데 왜?”
“그래도 가끔은 도움이 됐어. 아주 가끔. 한두 번은 늑대 눈깔 찌르거나 하는 식으로 잠시 공세를 움츠러들게 하는 경우가 있었어. 그러니까 없는 것보단 나았지. 게다가 그 영감, 노망나서 그런지 몰라도 정신 나간 수준으로 용맹하지? 이대로 몇 레벨 올라 근력만 더 향상되면 좀 약한 소환물만큼은 도움이 될지 몰라.”
“그래도······”
롤랑은 여전히 꺼려하는 기색이었다. 그러자 제이슨은 대뜸 고함질렀다.
“어쨌건 신전에 있는 새끼들보단 백 배 나아!”
그 말에 롤랑의 표정은 단번에 굳었다. 무어라 반박하려는 듯 그 입술이 몇 번 달싹였다.
그러나 이내 롤랑은 생각에 잠겼다.
신전은 영웅을 서른셋 넘게 소환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겨우 세 명만 이곳에 보냈다.
인원을 그리도 놀려두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앞으로 다른 유저들 또한 싸워야 할 것이 분명하다.
‘알론소보다 유저들이 더 전력이 되리라는 주장은 굳이 할 필요가 없어. 오히려 알론소 같은 현지인들이 싸워준다면 유저들이 싸워야 할 부담이 줄어들지도······’
문득 롤랑이 말했다.
“동료가 필요할 거다. 하지만 신전에 있는 유저들을 여기 데려오는 건 싫다 이거지?”
제이슨이 고함질렀다.
“그렇지, 그 병신들이랑 같이 일 못해!”
“그래, 그렇다면 나도 알론소 영입 찬성. 모지 너는?”
모지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고 그로써 결정되었다. 이제부터 그 노망 난 늙은 기사와 영웅들은 함께 싸우게 될 것이다.
잠시 후 롤랑이 말했다.
“그렇다면 말이지. 우리 수입의 사용처가 하나 생각났거든. 제이슨 너 말이야, 다른 유저들이 여기 오는 게 싫은 모양이지? 사실 나도 그러니까······ 이제부터 우리 수입의 일 할은 신전에다 기부하자.”
모지가 눈을 껌벅였다.
“왜?”
“영웅들이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신전은 재정적으로 부담이 될 거야. 알고 보니 가난한 곳이더라고. 그 빈곤한 처지에 우리가 번 돈의 일부를 보내면 꽤 도움이 될 테니······ 이대로라면 신전에서 식비를 줄이고자 유저들을 방출하려고 애쓸지 모르는데, 헌금이면 그걸 막을 수 있어. 그러니까 유저들이 이 싸움터에 보내지는 시기를 좀 늦출 수 있는 거야. 제이슨이 바라는 대로 말이지.”
“난 그냥 그 새끼들 거기서 다 뒈졌으면 좋겠······”
제이슨의 말을 끊고 롤랑이 계속 말했다.
“게다가 말이야. 신전에서 유저들이 비정상적인 짓을 할 경우 사제들이 어디엔가 보고해버릴 우려가 있잖아? 상부에든 왕궁에든, 최악의 경우 영웅들을 보내준 신들에게든 뭔가 문제제기를 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가 신전에 지속적으로 금전적 도움을 준다면 놈들이 고자질하는 걸 조금은 막을 수 있을 거야. 물주의 허물은 감싸줄 테니까. 제이슨 듣기 좋게 말하자면 그네들이 이상한 짓해서 우리한테 불똥 튀는 걸 막을 수 있는 거지······ 어때?”
우선 모지는 썩 내키는 기색이 아니었다.
“자발적으로 십일조라······ 음······”
모지의 떨떠름한 표정을 보고 롤랑이 말했다.
“종교단체에 돈 내는 건 껄끄러워? 하지만 지금 중세라는 걸 기억해. 이 시대에 신앙심 과시는 그 자체로 체면이요 가치야. 게다가 여기는 진짜 신들이 존재해······”
이후로도 토론이 이어졌다. 그리고 끝내 제이슨이 말했다.
“좋아, 찬성. 수입 일 할로 그 새끼들을 신전에다 봉인할 수 있다? 나쁘지 않네!”
봉인이라니.
롤랑은 속으로 욱했지만 애써 입을 다물었다. 실랑이를 벌였다가 제이슨의 심정이 뒤틀리면 곤란했으니까.
어쨌건 모지도 찬성했다. 그 사실이 롤랑은 몹시 마음에 들었다.
이제 신전에 돈을 보낼 수 있다. 그로써 영웅들에 대한 대접도 나아질 터요, 유저들이 이런 싸움터에 팔려올 시기도 늦춰질 것이다.
롤랑은 생각했다.
‘사실 이런 싸움터에 팔려온다면 일찍 팔려오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지. 어차피 언젠가 싸워야 할 것이 확실하다면, RPG적으로 생각해 경험치를 일찍부터 버는 편이 나을 테니까. 하지만 어쨌건 그로써 유저들이 희생되는 수가 준다면 그걸로 좋아.’
롤랑이 생각하기에 나쁘지 않았다. 정말 나쁘지 않았다······.
문득 제이슨이 물어왔다.
“그런데 송금은 어찌 하냐?”
롤랑은 간단히 대답했다.
“은행에 가면 되지.”
“병신, ATM에다 금화 넣고 계좌번호라도 입력하게?”
“중세 은행에서도 송금 정도는 가능하거든? 십자군 때 종교기사단도 돈 맡기면 먼 곳에 보내주는 서비스 했어.”
제이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음, 썅. 알았어. 너한테 역사 갖고 깝친 내가 병신이지. 그럼 돈 보내 달라 요구하는 건 누가 하냐? 롤랑 넌 고상한 기사님이라 은행 출입 못 하겠고 앤지 시키면 되냐? 걔 꼬맹인데 그런 어려운 심부름 할 수 있어?”
“너나 모지가 하면······”
롤랑이 말하는 도중 모지가 끼어들었다.
“롤랑 네가 하는 게 낫지?”
롤랑은 난색을 표했다.
“나? 제이슨이 말했지만 고리타분한 옛 기사가 은행 드나드는 건 좀······”
“은행 말고. 여기 비프로스트 성당에 가서 주교한테 부탁하면 되잖아. 헌금할 테니 소환 신전에다 송금해달라고.”
“왜 굳이?”
“그러면서 주교랑 연줄을 만드는 거지. 궁극적으로는 비카파 백작과도.”
모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롤랑도 알아챘다.
“우린 오스론 따까리가 아닙니다, 너희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여기 송금도 맡길 테니 잘 해주세요, 하라는 거지? 그래서 얼굴 마담인 내가 나서란 거고?”
“응.”
롤랑은 조금 생각해본 끝에 어둡게 대답했다.
“좀 힘든데? 오스론이랑 여기 백작 사이에서 줄타기 시작하라는 거잖아. 나보고 정치질 하라니, 뭔 수로 그런 묘기를······ 힘들어.”
대답을 마친 순간 롤랑은 당황했다. 두 동료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기에.
모지가 말했다.
“넌 할 수 있어.”
“못한다니까······”
모지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진지한 표정과 어투로.
“할 수 있어.”
그리고 제이슨이 덧붙였다.
“이 새낀 할 수 있지. 응. 내 거시기 걸고 장담할 수 있어.”
저놈까지 저 소리라니? 롤랑은 한탄했다.
“정치질 흉내 못 낸다니까? 나 지금 연기도 겨우겨우 하는 마당이거든?”
그러나 모지가 말했다.
“그 연기하는 것처럼만 해.”
“연기하는 것처럼?”
“그래, 그럼 다 해결돼.”
*******
예상외의 손님에 주교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노골적으로 곤혹스러워 하며 물었다.
“그러니까 헌금을 소환전에 보내달란 말씀이십니까?”
롤랑이 대답했다.
“그렇소. 헌금 중 일부는 주교께서 이 교구를 보살피는 데 쓰시고 나머지는 거기 보내주오.”
“감사한 말씀입니다마는······ 헌금이라면 왜 예하께 부탁드리지 않고 제게?”
왜 자기 편인 오스론에게 부탁하지 않느냐는 의문이었다.
롤랑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그 사람, 빚이 많더군. 여기저기 돈 나갈 데도 많은 모양이고. 그 수중에 송금을 부탁한다니, 어리석은 짓이오. 사자에게 고기 맡기는 꼴일 테니.”
“예하께서야 그 빚이 실로 부당하다 주장하실 텐데요.”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난 그저 헌금이 안전하게만 보내지면 족하오. 앞으로도 말이외다.”
“계속 헌금하시리란 말씀입니까?”
“왜 아니 그러겠소? 마땅히 그래야지. 그 신전의 사제들이 우리를 불러내주었으니 그 보답을 해야 할 거 아닌가.”
이 기사는 다시금 자신을 소환된 고대 영웅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주교는 이맛살을 찌푸렸으나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저번에 그것을 지적하려다 호된 꼴을 당한 마당이었으므로.
이내 주교가 말했다.
“그래서 얼마를?”
“이만일천 닢. 일천 닢은 이 성당에 기부하겠소.”
상상 이상의 액수에 주교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롤랑이 내민 함을 열어보더니 이내 말했다.
“어지간하면 제가 돈을 부치겠습니다마는 그러기엔 맡기신 액수가 너무 거금이군요. 차라리 관련 사업을 맡고 계신 백작께 부탁드리는 게 낫겠는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롤랑은 쉽게도 대답했다.
“그래 주신다면야 감사하리다. 그럼 부탁드려도 되겠소?”
주교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예, 책임지고 백작께 전해드리지요.”
“귀찮은 일인데 맡아주신다니 참으로 감사하오.”
롤랑은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주교가 당황하는 가운데 롤랑은 작별을 고했다.
“그럼 이만. 백작께도 안부 전해주시오. 나 롤랑이 감사와 함께 심심한 예를 표하는 바요.”
롤랑은 뒤돌아섰다. 이내 문 밖으로 나서려는 차, 주교가 멈춰 세웠다.
“잠깐, 경?”
롤랑은 흘긋 뒤를 돌아보며 정정에 나섰다.
“롤랑이오.”
“그래요, 롤······ 랑, 경. 예. 무례한 말씀입니다마는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뭐요?”
“저기 석상 보이십니까?”
롤랑이 흘긋 보니 거대한 신상(神像)이 보였다. 저 무게라면 여기 옮겨오는 데 일꾼들이 고생 좀 했으리라.
“보이는구려.”
롤랑의 말에 주교가 요청했다.
“한 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롤랑은 주교가 뭘 요구하려는지 알았다. 지금 롤랑은 가벼운 옷차림이었고 마법이 걸려있을 법한 팔찌나 허리띠 따위도 차지 않은 채였다.
그러니까 주교는 지금 이 초인 기사가 과연 맨몸으로도 괴력을 낼 수 있는가 보려는 것이다.
롤랑은 순순히 시험에 응했다. 성큼성큼 걸어가 신상을 양 팔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 위로 들었다. 요구받은 대로, 번쩍.
그대로 신상을 다섯 번 들었다 내리길 반복했다. 그 동작을 마친 후에도 롤랑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땀마저 한 방울 흘리지 않았군.’
주교는 이내 우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됐습니다. 됐어요. 감사합니다, 경.”
“더 요구할 거 있소?”
주교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질문 하나 드려도?”
“되오. 뭐요?”
“그 힘의 비결이 뭡니까? 주문? 축복?”
“후자에 가깝겠군.”
“축복이란 말씀입니까?”
“그렇소. 처음부터 이 정도의 신체는 아니었소. 그러나 신명을 받들어 괴물들과의 싸움을 거듭해 놈들의 영혼을 주신께 바치었소. 주신께서는 내 공물을 기꺼이 받으셨으매 내게 선물을 주시었지. 그로써 내 영육에 활력을 불어넣어주셨으니 나는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졌소. 그 덕에 나름 허망한 명성이나마 얻었으니 이 또한 신께 감사드릴 일이외다.”
주교는 어느 말에 주목했다.
“괴물과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진다······”
문득 롤랑은 불안해졌다. 역시 괜히 말했나?
추측의 영역인 것을 괜히 사실인 양 떠벌린 것일까? 그리고 그 중에 오류가 있었나?
뭔가 말실수한 게 있다면 어찌 정정할 수 있을까 롤랑이 고민하는 가운데 주교가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벌어지는 일이 설명될 수도 있겠군요.”
“지금 벌어지는 일?”
“세계수 위에서는 성전이 한창이잖습니까?”
너는 지금 뭐하고 있느냐는 비난이 아니길 바라며 롤랑이 대답했다.
“그렇다 들었소.”
“성전 도중 괴물들과 용감히 싸워 부상을 입은 전사들이 이 성당에 후송되어 왔지요. 환자들이 오면 늘 그렇듯 사제들은 신들께서 주신 주문을 부려 그들의 몸을 편하게 하고자 했습니다마는······ 너무 효과가 좋더군요. 괴이할 정도로 말입니다.”
“이상할 게 뭐요? 신들께서 내리신 주문이 고강한 거야 당연한 이치거늘.”
“그래도 정도가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몇 주 혹은 몇 달 요양해야 겨우 호전될까 말까한 중상자들의 상처가 눈에 보이는 속도로 아물더란 말입니다.”
그 말이 롤랑의 귀에 파고들었다.
‘회복 주문이 효과가 너무 대단하다고? 힐러와 그 회복주문이 있는 게임에서처럼?’
< 저택 - [2]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