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택 - [1] >
세계수의 새로운 층 너머로 순례자들이 발을 디뎠다.
우선은 군대를 이끄는 귀족들. 제후, 왕, 총독.
그들 이 세상의 지배자들은 기사와 병졸들을 이끌고 미지의 괴물들과 전쟁을 개시했다. 이전 층에서도 그랬듯 그들이야말로 세계수 정벌의 주력이 될 것이다.
군대의 가공할 힘이 휩쓸고 지나간 곳은 소규모 모험가들이 뒤를 이었다.
그들은 각 층마다 지도를 그리고, 소문처럼 세계수 여기저기에 널린 것은 아니어도 어쨌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보물들을 모으다가, 가끔 마주친 괴물과 싸우거나 도망치기도 하는 몽상가들이다.
백작의 후원을 받는 조합원으로서 그들은 그 나름대로 정복에 조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민중 순례자들이 있다. 어찌어찌 운 좋게 비프로스트에 들어온 노동자와 농투성이들.
그들의 목숨을 건 투쟁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모적이다. 지난 십 년 간 세계수에서 그들의 역할은 미세하기 그지없었다. 특별한 변화가 없다면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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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 처치에 따른 보상은 즉시 지급되었다. 놈들에게도 현상금이 걸려있었고 그 액수는 꽤나 거금이었다.
원한다면 거인들에게서 반환된 갑옷들을 원 주인에게 돌려주며 사례금을 요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롤랑은 사례금을 마다했다. 관대하게도 롤랑은 조합에다 원 주인들에게 무구들을 무상으로 돌려줄 것을 부탁했다.
결국 갑옷을 내주고 얻은 것은 칭송뿐이었으나 롤랑은 전혀 아쉽지 않았다. 이미 얻은 금이 너무나도 막대했기에.
사실 롤랑은 건네받은 금화를 보고서 그것이 돈이라기보다는 보물이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보물이라면 고이 간직해두어야 한다고만 생각했기에 제이슨이 이 돈을 당장 써버리자고 말했을 때 롤랑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제이슨이 말했다.
“이거 다 퍼부으면 롤랑 쓸 칼 하나 살 수 있을까?”
롤랑이 물었다.
“나 쓸 칼?”
“그래, 룬검 좋은 걸로 하나 사자고. 게임에서도 전투 계열은 템빨 중요했잖아. 거인 둘 때려잡을 때 보니까 실제로는 템 효율이 게임보다 더하던데?”
“그건 상황이 너무 딱 맞아떨어져서 그래. 발리사다는 금속 방어구를 무시하고 타격할 수 있는 룬검인데 하필이면 그 거인이 방어구를 덕지덕지 입었잖아? 심지어 늑대인간 변신까지 했지. 보통 거인들은 살가죽 자체가 두꺼워서 그 칼 효율이 그 정도로 좋지는 않을걸?”
“어쨌건 중요한 건 마찬가지잖아. 마법갑옷도 필요하겠지만 그런 건 칼보다 비쌀 거 같고. 급한 대로 칼이라도 좀 좋은 걸 써야지.”
“오스론이 명검 구해주겠다는 건?”
제이슨은 어이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 새끼 믿냐? 애당초 그 새끼가 너 쓸 만한 칼 구해주려면 이 별장이라도 팔아야 할 텐데 그러진 않을걸.”
그 말에 납득하면서도 롤랑은 당황스러웠다.
일단 롤랑의 무기부터 구하자고 제안하다니. 그 말을 모지가 아니라 저놈이?
질투심마저 느껴질 만치 자신이 주목받길 원하던 제이슨이 동료를 우선시하고 있었다. 효율 차원에서 내뱉은 발언인가, 아니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인가?
그리 얼떨떨해하면서도 롤랑은 입을 열었다.
“뭐 성검 한 자루 있으면 좋긴 할 텐데, 그 말고도 뭐······ 더 유용하게 돈 쓸 방법은 없을까?”
“달리 뭐?”
“나도 모르지. 그런데 앞으로도 이런 수입이 생길 것 같진 않으니까 좀 더 생각 좀 해보자.”
어쨌건 급한 일은 아니었다. 당장 세계수에 들어갈 필요는 없으니까.
사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지금 세계수의 오십 층 너머에서는 여러 귀족들이 이끄는 군대가 전쟁을 벌이는 마당이었다.
롤랑이 그들의 전쟁에 낄 수는 없었다. 그럴 경우 지휘관으로 추대될 것이요 설령 그 제안을 거절하고 일개 기사로서 싸우려 하더라도 위기상황이 닥치면 그들은 이 전설의 변경백이 상황을 타개할 지휘능력을 발휘해주길 바랄지 모른다.
물론 롤랑에게 병졸들을 지휘할 능력 따위는 없었다. 그러니 능력부족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장에는 군대와 거리를 둬야했다.
그런즉 앞으로도 이럴 터였다. 영웅들은 군대가 개척하고 나서야 세계수 탐색에 나설 예정이었다.
다른 소규모 모험가들처럼 굴기로 한 것이다. 어제 토론에서 그리 결정되었다.
이 의견을 들은 즉시 제이슨은 반대했었다.
‘경험치 벌이는 어쩌려고? 현실이건 뭐건 이거 거의 RPG거든? 웬 노망난 영감탱이도 레벨 업 하는 마당에 우리는 꿀 빨고 있잔 거야 뭐야?’
롤랑이 설득에 나섰다.
‘군대가 놓친 괴물이든 상대하기 곤란해 남겨둔 괴물이든 충분히 남아있을걸?’
‘남겨진 것만 주워 먹자고? 차라리 군대랑 같이 싸우는 게 더 많이 죽일 수 있고 더 안전하지 않겠냐? 효율 면에서도 그냥 같이 싸우는 게 낫지? 지휘 못하는 거? 그냥 애초에 그런 능력 없었다는 설정을 내세우자. 그럼 위기상황 닥치면 넌 그냥 돌겨어어어억! 하고 소리만 지르면 되는 거야.’
이 말에 반박한 것은 모지였다.
‘그래도 군대는 좀······’
‘왜? 너 소심해서 군인들 대하기 어려울까봐? 좆같은 소리 하지 마! 내가 보기에 너 전혀 안 소심해, 새끼야!’
‘성격 문제가 아니고······. 집단 전투에 휘말리면 실력 발휘할 기회도 없이 비명횡사할지도 몰라. 전쟁에서의 눈 먼 화살은 영웅을 죽이는 법이잖아? 차라리 개인전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소규모 전투가 안전할 거 같은데.’
이후로도 둘은 제이슨의 설득에 나섰는데, 결국 둘의 주장은 받아들여졌다.
제이슨은 혼자서 욕설을 중얼중얼 거리면서도 이내 이렇게 말했다.
‘둘이 그러고 싶다면 일단 알겠는데. 아무튼 경험치 벌이 중요하단 건 잊지 말자고. 알겠지?’
‘그래, 알아. RPG니까.’
그리 말하면서도 내심 놀랐던 것을 롤랑은 기억했다. 생각보다 제이슨이 쉽게 설득된 것이었다.
신전에서 제이슨이 보안법에 반발할 때와는 분명히 달랐다. 당시 제이슨은 결국 다수결이고 뭐고 혼자서 위층으로 올라가버렸더랬다.
이번에도 둘에게 밀려 제 의견이 억눌려진 셈인데, 어째서인지 그다지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그러했던 어제 일을 기억하며 롤랑은 생각했다.
제이슨이 생각보다 그리 정신병자는 아닌 것 같다고.
그 생각은 아마 정답인 것 같았다. 점심을 먹은 후, 롤랑이 평소대로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자니 제이슨이 다가왔다.
제이슨은 롤랑의 단련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야, 롤랑.”
“뭐?”
제이슨은 조금 머뭇거린 끝에 말했다.
“나랑 대련 좀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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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아의 각 직업들은 세세한 설정은 다르더라도 한 가지 설정만은 공유했다.
모든 직업군은 기본적으로 전사인 동시에 마법사였다.
괴물이 들끓는 고대. 전투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면 칼이든 주문이든 가리지 않아야 했다. 그리하여 각 기관에서 가장 훌륭한 인재에게 가능한 모든 교육을 베푼 끝에 탄생시킨 것이 플레이어 캐릭터였다.
그러니까 레벨 1부터 플레이어 캐릭터는 이미 병기를 수준급으로 다룰 줄 알았고 기본적인 마법소양을 발휘할 수 있는 바였다.
그런즉 웬만한 RPG에서라면 소환물들에게 전투를 맡기고 자신은 후방에 위치하는 소환사마저 메디아에서는 직접 무기를 들고 싸웠다. 그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다.
제이슨이 무기를 들고 나서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목검을 쥔 제이슨을 보며 롤랑은 생각했다.
‘왜 이제 와서?’
어쨌건 붙어달라니 요청대로 따라주었다.
롤랑도 목검 한 자루 들고 제이슨과 마주섰다.
대련의 구경꾼으로는 셋이나 붙었다. 롤랑의 종자로서 관찰에 나선 앤지. 그리고 모지와 어째서인지 놀러온 알론소.
롤랑 입장에서 알론소는 돌아가 주었으면 했다.
‘저 늙은이가 보는 와중에 뭔가 영웅답지 않은 말실수라도 하면 큰일이지? 혹시 제이슨이 꼴사납게 지기라도 하면 저 늙은이가 이상한 소문을 퍼뜨려서 제이슨 자존심을 건드릴지도 모르고······’
그래서 롤랑이 뭔가 말하려는데 제이슨이 선수를 쳤다.
“아, 영감님. 구경할 거요?”
알론소는 늘 그렇듯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했다.
“예, 식견을 넓힐 수 있으면 참으로 영광일까 하여.”
“그럼 저기 부엌에 가서 의자 들고 와서 앉아요. 하인들 없으니까 직접 챙겨 와야 할 텐데 뭐 그 정도는 괜찮지?”
“물론입죠. 가뜩이나 힘도 좋아졌는걸요······”
이내 알론소는 의자를 가지러 저택 안에 들어갔다. 이제 쫓아낼 수도 없게 되었다.
롤랑은 속으로 탄식했다.
‘우리 세 명끼리 있을 때가 가장 편한데 제이슨 저놈은 왜 저래? 나 현지인들 앞에서 연기하는 거 피곤해 죽겠는데 진짜······.’
불쾌해진 탓인지 손에 든 목검에 힘이 들어갔다.
대련이 시작된 후에도 그러했다. 롤랑이 내리 깐 목소리로 말했다.
“자 그럼, 와라.”
제이슨이 칼을 휘둘러 공격해왔다.
롤랑은 손목을 비틀어 간단히 막은 다음, 손의 비틀림을 풀어 운동력을 실어다가 제이슨의 다리를 후려쳤다.
그다지 세게 치지는 않았지만 제이슨은 신음했다. 그리고 이내 이를 악물더니 소리 지르며 달려들었다.
“이 씹할!”
그제야 롤랑은 당황했으나 이미 제이슨은 온힘을 실어 돌격해온 후였다.
이후로 둘은 치열하게 맞붙었다. 오히려 제이슨이 공세였고 롤랑은 막느라 바쁠 정도였다.
의외의 일은 아니었다. 게임적으로 말하자면 제이슨은 장검 숙련에 특기점수를 부어 3레벨까지 올렸으며 근력도 꽤나 높은 6이었다. 이 정도면 영웅적인 전사를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아예 승부가 되지 않을 정도는 아니다.
그 와중에 위축된 롤랑이 힘을 가득 뺀 채 상대하자니 오히려 제이슨이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 챘는지 눈치 채지 못했는지, 제이슨은 갈수록 사납게 공격을 이어나갔다.
롤랑의 방어 위에 제이슨의 강렬한 일격이 작렬했다. 뒤이어 롤랑의 몸이 휘청거렸다.
롤랑이 멈칫한 사이에 제이슨이 발까지 걸어온 것이다.
지면에 몸이 닿기 직전 롤랑은 생각했다.
‘위험해.’
롤랑은 쓰러지기 직전 손바닥을 뻗어 지면을 쳤다. 그 반탄력으로 롤랑의 몸은 일 미터 하고도 사십 센티미터나 위로 솟구쳤다.
허공에 뜬 채로 롤랑은 공중제비를 돌며 검을 휘둘렀다. 이 기괴한 공격에 제이슨은 겨우 검을 들어 막았다.
두 명의 칼이 부딪친 순간, 제이슨의 몸이 흔들렸다.
두 발이 지면에 닿자마자 롤랑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힘을 거의 빼지 않고, 이기는 것 자체에 목적을 두고서.
기민하게 칼을 휘두르며 롤랑은 생각했다.
‘앤지한테는 어찌 얼버무려도 저 영감, 알론소한테 내가 지는 꼴 보여선 안 돼. 상대가 누구든 롤랑은 지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돼······.’
순식간에 공수가 역전되었다. 제이슨은 내내 막기 벅차 방어에 몰두하다가 결국 롤랑이 그 손목을 후려치자 목검을 놓쳤다.
패배, 이를 악문 제이슨을 담담히 바라보며 롤랑이 말했다.
“좋은 한 판.”
제이슨도 겨우 대답했다.
“그래, 수고.”
대결이 끝나기 무섭게 알론소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두 분!”
롤랑은 겸양을 표했다.
“경께서도 그 정도면 대단하신 게요.”
‘구경 마쳤으면 이제 꺼져라, 노인네.’
롤랑의 바람과는 달리 알론소는 차까지 대접받은 후에야 돌아갔다. 그리고 알론소에게 차를 타준 것은 앤지도 아닌 제이슨 본인이었다.
롤랑은 너무 굴욕적으로 이겼음에 사과해야한다는 생각조차 잠시 잊었다. 대놓고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저 영감한테 뭘 그리 잘해줘? 자꾸 달라붙게.”
제이슨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야 앞으로 동료가 될지도 모르니까.”
“뭐?”
“우리한테도 동료가 더 있어야 할 거 아냐. 그런데 저 영감은 레벨 업까지 가능하니 나무랄 데 없지?”
< 저택 -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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