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36화 (36/164)

< 큰 다리 - [4] >

이후의 일은 놀라울 만치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거인들은 동료의 죽음에 복수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동료의 시체를 가지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복수하겠노라는 말조차 남기지 않고 그저 조용히.

거인들이 남기고 간 포로들은 기사들이 구조했다. 롤랑은 그 감격스러운 장면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지저분하게 굴지 않는 것을 넘어 지나치게 깔끔한 철수······.’

예상외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물론 희열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순수하게 그 기분을 즐길 수는 없다고 롤랑은 생각했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인들이 사라지고 난 야영지는 썩 문명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리 야만적이지도 않았다.

오늘 보았듯 거인들은 생각보다 지능적이었다. 또한 군인정신까지 쓸데없이 충만했으며 무장상태마저 훌륭하기 그지없었다.

앞으로 세계수를 계속 올라야 할 순례자들로서는 소름끼치는 일이다. 앞으로는 저런 거인 부대 전체와 맞서 싸워야 할 테니까. 업데이트에 예고된 강적 목록에는 세계수를 배회하는 거인 부대가 당당하게 적혀있었으므로.

그 사실을 자각한 롤랑의 표정은 이내 굳었다.

그것을 전사로서의 담담함으로 해석한 월렴은 감격에 젖어 롤랑 앞에 달려왔다.

“아, 롤랑 경, 이 감동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롤랑은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리고 발리사다를 돌려주며 감사를 표했다.

“월렴 경? 이 칼, 잘 썼소. 덕분에 쉬이 이겼어.”

월렴은 마구 별 거 아니었다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겸손을 떨었다. 그러나 실제 매우 감사했던 롤랑은 씩 웃어보였고 월렴은 거의 자지러졌다.

그리고 기사들은 월렴과 거의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롤랑의 주변은 이제 환호와 칭송으로 떠들썩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열정적인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롤랑은 탐색에 나섰다. 오십 층을 마저 개척하기 위한 탐색이었다.

그 수색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오십 층은 훤히 트인 초원 지형이었으니까.

무리는 그저 초록색 배경에 무언가 툭 불거져 나왔다 싶으면 그곳으로 향하면 되었다. 그리하여 불과 두 시간 만에 무리는 두 가지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

우선은 위층으로 통하는 통로.

그것은 계단의 형태를 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은 새삼 놀랍지 않았다. 몇몇 층은 노골적으로 인공적이었으니까.

게다가 이 건조물은 강 너머에서도 얼핏 보였기에 모두들 계단의 존재를 알고 있던 마당이었다.

결국 무리를 놀라게 한 것은 다른 하나였다.

그 발견에 앞서 누군가가 외쳤다.

“다른 공기요! 다른 공기!”

실제 냄새를 맡아보니 그러했다. 세계수 속에서 늘 느껴지는 냄새가 덜한 가운데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무리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했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한 순간, 모두 할 말을 잊고 그저 눈만 껌벅거렸다.

모두가 시선을 향한 그곳에 거대한 구멍이 있었다.

세계수 외벽에 난 구멍, 그러니까 바깥으로 통하는 통로였다.

“지름길······ 이로군.”

구멍 바깥은 어디로 통할까? 오십 층 높이니 역시 허공일까?

그 사실을 맨 먼저 확인하는 영광은 롤랑이 얻었다. 기사들의 환호를 한몸에 받으며 롤랑은 구멍에 발을 디뎠다.

외벽에 난 구멍이라지만 대뜸 바깥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세계수의 껍질은 대단히 두꺼웠고 거기 난 구멍은 거의 터널에 가까웠다.

롤랑은 조금 걸은 끝에야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구멍 바깥에 있는 것은 가지였다.

세계수의 가지.

단 한 줄기 가지였지만 충분히 굵었기에 밟고 건너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 큰 외나무다리를 롤랑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달려 나갔다. 목 매달린 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오딘이여!”

이 외나무다리에서 떨어졌다가는 시뻘건 곤죽이 되리라는 걱정은 지금 할 수 없었다. 그저 한 가지 생각만을 반복할 뿐.

오딘은 어디에 있는가?

롤랑은 가지에 무언가 달라붙어 있지 않나, 끈이라도 얽혀있지 않나 부릅뜬 눈으로 살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끝내 그 큰 다리를 다 건너고 말았다.

물론 그 어느 곳에도 신 따위는 매달려 있지 않았다.

롤랑은 힘없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위에도 세계수 가지 몇 개가 드문드문 보였으나 목 매달린 사람 비슷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잔뜩 실망한 채로 롤랑은 자신이 위치한 지형을 살폈다.

절벽 위였다. 절벽 끝에는 세계수의 가지가 외나무다리처럼 걸쳐 있었다.

“어?”

기사들도 뒤이어 구멍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는 흠칫했다. 높이가 높이였던 것이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외나무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무도 추락하지 않은 절벽 위에 백 명이 자리 잡았다. 그 중 하나로서 비카파가 중얼거렸다.

“보초를 그리 세웠는데 무단 침입자가 어찌 그리 많나 했더니, 역시 뒷구멍이 있었군 그래.”

그 순간 오스론이 쏘아붙였다.

“너, 은행가. 왜 웃지 않느냐? 이제 더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름길까지 발견했다. 이 희소식에도 불구하고 네놈은 별로 기쁘지 않은 기색이로군?”

비카파는 물끄러미 오스론을 바라보다가 이내 말했다.

“물론 기쁘오.”

“그럼 웃지 그래? 왜? 못 웃겠나? 네놈이 몇 년 동안 해내지 못했던 과업이 불과 하루 만에 끝난 게 당황스러워? 시기심이 마구 솟아나 돈 생각밖에 없는 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가?”

거기 끼어든 것은 롤랑이었다.

“그만, 추기경.”

“아,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그만하시오. 기쁜 날 아니오?”

오스론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비카파는 힘없는 눈으로 롤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고맙소, 롤랑 경? 오늘 일도 그렇고. 여러모로 고맙소.”

전혀 고마워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롤랑으로서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백작, 롤랑이 아니라니까요.”

몸에 걸친 검은 수단으로 보아 사제일 법한 남자였다. 그 성직자가 롤랑에게 시선을 향하더니 말했다.

“제가 바로 비프로스트 주교입니다. 오늘 활약은 정말이지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그 덩치 산만한 괴물들을 우습게 때려죽이더군요? 너무 놀라워서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진심을 담아 경탄과 찬사를 보냅니다, 신비기사.”

롤랑이 대답했다.

“신비기사가 아니지. 롤랑이라 불러주오, 주교.”

주교는 웃었다.

“멋진 가명입니다. 잘 어울려요. 하지만 이제 그 가명, 그만 쓰시길 권합니다. 오늘처럼 계속 활약하여 롤랑 경의 위명을 드높이고 싶습니까? 그만두십시오. 롤랑 경은 이미 너무 고명하시어 더 이상의 명성이 필요하지 않을 테니.

아니면 위명 자자한 롤랑 경의 이름을 빌려 위대해지고 싶습니까? 그래도 그만두십시오. 당신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활약은 정말이지 전설적이었어요. 롤랑에게 밀리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 전설적인 위업을 남에게 돌립니까? 기사인 자, 그 영혼은 신의 것이요 삶은 군주의 것이어도 명예만은 오롯이 자기 것이어야 할진데?”

지금 저 주교는 자신의 정체를 사람들 앞에 까발리려 하고 있었다. 롤랑은 박동하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고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물론 오늘 내가 한 일은 롤랑에게 밀리지 않았을 거요. 물론 더 낫지도 않고. 딱 롤랑 수준이었지. 그야 롤랑이 한 일이니까.”

주교는 여전히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당신은 롤랑이 아니에요.”

그 단언에 기사들이 야유했다. 돈놀이꾼과 결탁한 타락 성직자가 지랄한다느니 어쩌느니. 아무래도 이 주교는 그다지 인기 있는 인물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주교는 그 모든 욕설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저 웃었다.

야유가 멎은 후에야 롤랑이 물었다.

“어째서?”

“당신의 무용이나 말씀거지나 정말 근사했지요. 정말이지 무훈 시에서 뛰쳐나온 것처럼 멋지시더군요.”

“정확히는 광란의 아마디스에서?

“예. 그 무훈 시요. 명작이죠? 저도 거듭 읽었어요. 지금 읽어도 심장을 울리겠지요. 그런데 실제 롤랑 경은 무훈 시와는 좀, 아니 많이 달랐을 것이거든요. 좋은 의미로 말입니다. 저기 보시죠.”

주교는 위를 가리켜 끝없이 펼쳐진 세계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세계수의 끝이 보입니까? 아뇨, 전혀 안 보입니다. 세계수는 끔찍하게 높습니다. 그런데 카를 대제께서는 저 끝까지 군대를 이끄셨어요. 그리고 그 위대한 원정을 뒷받침한 것은 과거 이 땅의 변경백이었던 롤랑 경이었습니다. 믿어지십니까? 군대가 저 끝까지 오를 동안의 행군물자 보급이 가능했다는 게?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지만 롤랑 경은 해냈지요.

끝내 세계수 원정이 실패하여 철군할 때 롤랑 경은 후미를 도맡아 후퇴하는 군대를 보호했습니다. 그 와중에 습격해온 거인 군대에 맞서 싸운 끝에 롤랑 경은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물론 비극입니다마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희극입니다. 조그마한 피해만으로 저 높다란 세계수에서의 철수를 성공시킨 것이니까요.”

“날 계속 칭송하려는 의도를 모르겠군.”

롤랑의 말을 무시하고 주교는 계속 말했다.

“정말이지 롤랑 경은 위대한 군주였습니다. 그 놀라운 수완을 무훈 시에서는 미처 담아내지 못했어요. 무훈 시 등장인물은 현실의 인물들에 비하면 좀······”

“멍청해 보인다는 거로군. 그리고 나 또한?”

“뭐······ 그렇죠. 당신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굉장히 멋지지만 저는 거기서 실제 롤랑이 지녔을 법한 행정적이고 군사적인 천재성을 느낄 수 없군요.”

“당신 맘대로 날 천재였다 우기지 마시오. 그 모든 것은 머리가 아닌 심장, 그리고 황제 폐하를 향한 충성심이 이루어낸 위업이었소. 그리고 설령 천재였다 한들 발할라에서 내내 싸움만 하다보면 행동거지가 단순해져도 무리가 아닐 텐데?”

주교는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뭐 발할라에서의 나날이면 사람이 좀 덜 총명해질 수 있으리란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전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군요. 충성심이요? 롤랑 경은 비프로스트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드넓은 영토를 거느린 대영주였죠. 영주와 왕의 관계는 상명하복의 수직관계가 아니라 나름 동등한 수평관계인 법입니다.

그런데도 롤랑 경에게 카를 대제가 그리 맹목적인 충성의 대상이었겠습니까? 아닐 텐데요! 제가 역사를 공부했기로 대제께서는 그 위업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호감을 주는 분은 아니셨는지······ 영주들과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아 숫한 반란을 겪고 진압하거나 화해하기를 거듭한 인물인데요.”

그 말에 롤랑이 어찌 반박해야 하나 고민하는 차,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방금 주교의 발언은 너무나도 개인적인 감상이었다. 그리고 으레 개인적인 생각은 속에 담아두고 있으면 모르되 일단 꺼낸 순간에는 사람들의 반응이 예상과 다른 법이다.

지금도 그러했다. 이 순간, 억누르고 억누르던 기사들의 화가 극에 달하고 말았다.

어느 기사가 분노에 차 고함질렀다.

“저 개새끼가 이제 롤랑 경뿐만 아니라 카를 대제까지 모욕한다!”

기사들이 일그러진 얼굴로 칼을 뽑았다. 그리고 그 끝을 일제히 주교를 향해 겨누었다.

주교는 애써 태연한 척 억지웃음을 지어보였으나 그것은 기사들의 화만 돋울 뿐이었다.

주교에게 기사들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제야 주교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잠깐······”

주교가 뭐라 말하려고 했으나 물론 기사들은 무시했다.

그러나 다음 울린 말은 무시하지 못했다.

롤랑이 포효했다.

“그—만—!”

기사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롤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롤랑이 외쳤다.

“성직자에게 무기를 겨누다니 사악한 일이오! 부끄러운 줄 아시오 다들!”

“하지만 저놈이······”

“내 주군을 모욕했다고? 나도 순간 욱하긴 했으나 일부는 사실이었소. 대제께서는 그다지 폭넓게 호감을 사는 분은 아니었소.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내 충심이 줄지는 않을 테니 아무 상관없는 일이오! 다들 칼을 거두고 당장 기도하여 이 일을 신께 사과드리도록 하시오!”

기사들은 머뭇거렸다. 그러자 롤랑이 고함질렀다.

“어서!”

그제야 기사들은 그 말을 따랐다. 사방에 신에 대한 사죄기도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한편 주교는 땀을 뻘뻘 흘리며 박동하는 가슴을 부여 잡고 있었다. 문득 주교와 롤랑의 시선이 마주쳤다.

롤랑이 물었다.

“괜찮으시오?”

주교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허겁지겁 비카파의 뒤에 섰다.

그 모습을 롤랑은 아무런 희열 없이 바라보았다.

롤랑이 듣기에 주교의 지적은 타당했고 날카로웠다. 그러나 청중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여기 있는 청중이란 작자들은 그 누구보다 무훈 시를 사랑하는 기사들이요, 가뜩이나 평판 나쁜 저 주교를 싫어했기 때문에.

아마 세계수에서 나와 비프로스트에 돌아간들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프로스트는 모험가들로 들끓는 땅이며 그들 모두 차가운 현실보다는 애매모호한 환상을 사랑하니까.

비프로스트의 주민들은 저 주교와 그 주장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저 주교는 위협적이지 않았다. 죽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살려야 했다. 그것이 옳기 때문에.

저녁이 되자 식사를 한 뒤 무리는 귀환을 시작했다. 롤랑도 말을 세워둔 곳까지 걸어 나갔다.

걷는 와중에도 여전히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채였다. 아직도 들뜬 나머지 자신을 칭송하느라 바쁜 추종자들 가운데에서 롤랑은 생각했다.

역시 주교의 비판은 옳았다. 캐릭터를 좀 바꿔봐야 하나?

그리고 이내 결론내렸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지. 현실성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강렬함······ 얼마나 영웅다워 보이느냐다.’

영웅의 위업을 덮어써 권위를 얻자는 전략은 이미 반쯤 성공했다. 아까 벌어진 사건만 봐도 그렇다. 비카파는 영주임에도 불구하고 롤랑의 추종자들이 자기 땅의 주교를 죽이려 하는 것을 적극 막아서지 못했다. 그 권위에 도전하기 두려웠기에.

성공한 전략이라면 지속할 가치가 있다. 그러니 앞으로도 이런 식이어야 한다.

영웅으로서, 그리고 롤랑으로서.

*******

< 큰 다리 - [4]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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