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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의 트롤랑-34화 (34/164)

< 큰 다리 - [2] >

그리하여 수많은 구경꾼들을 입회인 삼아 결투가 시작되었다.

롤랑은 익숙한 검례를 취하며 입을 달싹였다.

‘오딘께 내 영혼을.’

축복의 룬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롤랑은 한층 예리해진 감각으로 거인의 동세를 살폈다. 거인답게 무작정 돌격해온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무섭겠지만, 상대 거인은 그러지 않았다.

기사 거인은 상대의 저 뒤에 깔린 수두룩한 입회인들을 인상 깊게 본 바였다. 설마 자기네 아군의 패배를 기대하고 저토록 많이 구경 오지는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저 인간은 거인과 승부가 되리라 기대될 만한 전사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황당무계한 가능성이 아니다.

오래 전, 카를 대제와 그의 성기사들은 세계수를 원정하여 요툰헤임을 공격하고자 했다. 그 원정은 요툰헤임 코앞에서 좌절되었다. 종말의 거인 수르트가 이끄는 거인 결사대와의 오랜 소모전을 견디지 못했기에.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세계수는 인간 군대 앞에 거의 정복되었다. 세계수의 뭇 괴물 그리고 거인들은 그날로써 이 조그만 원숭이들의 저력을 뼈저리게 확인한 바였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넘어 그들이 다시 세계수에 침입해오고 있는 것이다.

먼저 움직인 것은 기사 거인이었다.

“우트가르—트—!”

거인이 든 거대한 철퇴가 덮쳐왔다.

큼지막한 궤적이 빠르게 허공을 채웠다. 공기 갈라지는 소리.

롤랑은 알고 있었다. 절대 저 공격을 정면에서 막아내서는 안 된다. 설령 힘이 비슷하더라도 무게 차이가 확연하니 이쪽이 일방적으로 충격을 받게 된다.

거리를 벌려서도 안 된다. 사거리가 긴 저쪽이 너무나도 유리해진다.

따라서 롤랑은 대각선으로 발을 뻗었다. 그리하여 공격의 안쪽으로 파고드는 동시에 휘둘러지던 거인의 손목을 베었다.

흐읍.

거인의 손목 보호대를 강타한 칼이 지잉 하고 울렸다. 거인의 공격이 정지하고 그 몸이 일순 멈칫했으나 롤랑은 이를 악물었다.

역시 베이지 않는다.

롤랑은 그대로 발을 내딛어 거인의 목을 노리는 척 돌격했다. 거인이 철퇴를 들어 막으려 하는 차, 롤랑은 또 다시 거인의 손목을 베고 나서 물러났다.

연속해서 두 번.

거인의 손목 보호대가 우그러졌다. 그러나 좋지 않았다. 거인이 긴장하여 철퇴 잡은 손을 바꾸어버렸다. 그러고는 다른 손에 쥔 철퇴를 갈겨왔다.

또 다시 공기가 거세게 갈라졌다.

그러나 롤랑은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설프게 피했다가는 거인이 약간 그 궤적을 바꾸는 것만으로 타격당할 것이다. 거인의 거대한 팔이 그리는 궤적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결국 롤랑은 놈의 공격에 맞서 또 다시 그 손목을 세게 후려갈겼다. 그러나 거인이 제대로 작정하고 휘둘렀는지 그 기세가 줄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롤랑은 공격을 피할 겸 놈의 가슴팍까지 달려들었다.

그리고 살짝 드러난 거인의 겨드랑이에 칼을 올려쳤다.

확실히 닿았다. 피가 검신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변변한 급소 타격은 못 되었다. 높이 차이가 확연한 나머지 칼끝만 겨우 닿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인은 움찔하여 뒷걸음질 쳤다.

투구 사이로 드러난 거인의 눈이 롤랑을 노려보았다.

거인이 왼쪽으로 공격해왔다. 롤랑은 철퇴의 손잡이 부분을 겨냥해 검을 빗겨 쳐 그 공격을 흘렸다.

그러나 그리 공격이 막힌 후에도 거인이 계속해서 공격해왔기에 롤랑은 이내 내달렸다.

거인의 옆구리를 향해서.

거인이 몸을 회전하며 덮쳐왔다. 롤랑은 그 손목을 후려갈긴 다음 허리를 숙여 피했다. 계속 달린 끝에 롤랑은 거인의 뒤까지 내닿았다.

거인의 무릎 뒤, 그러니까 오금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을 겨냥하여 롤랑은 전신의 힘을 담아 칼을 휘둘렀다. 세게, 아주 세게.

다리 힘이 풀린 거인이 일순 주저앉을 정도로.

거인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덕분에 양자의 높이가 줄어들었다. 기회였다.

롤랑은 거인의 뒤에서 또 다시 강하게 올려쳤다.

겨드랑이. 전통적으로 약점인 그 부분을 향해서.

“아그······”

이번 타격은 꽤나 먹혔다. 거인의 어깨가 눈에 띄게 수축되었다.

그러나 롤랑의 간은 더욱 졸아들었다.

연속된 타격으로 롤랑이 든 칼은 날이 거의 다 나가버렸다. 검신 일부에는 미세한 금마저 생겼다.

거인이 벌떡 일어나 롤랑을 향해 몸을 뒤틀었다. 그리고 마주 본 상태에서 포효했다.

“빌—어먹을 큰난쟁—이—!”

롤랑 또한 마주 고함질렀다.

“닥—쳐—라—!”

놈의 포효에 위축되는 것을 막고자 본능적으로 내지른 전투 함성이었다. 그러나 되려 위축된 것은 거인이었다.

거인이 멈칫한 순간을 롤랑은 놓치지 않았다.

롤랑이 또 다시 내달려 거인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거인이 애써 붕, 붕 하고 철퇴를 내저어 롤랑의 돌격을 차단했다. 그리고 롤랑에게는 그 궤적이 보였다. 따라서 제 몸에 맞을 리 없다는 것도 눈치 챘다.

롤랑은 그 발악을 아예 무시했다. 두 번 세차게 발을 내딛어 거인의 옆에 치 닫았다. 그리고 또 다시 오금을 노리려는 차, 거인이 사방팔방으로 철퇴를 휘두르며 일종의 회오리처럼 전 방향을 방어했다.

그제야 롤랑은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회전을 멈춘 거인이 숨을 헐떡인 순간 또 다시 돌격하여 놈의 오금을 후려갈겼다.

불꽃이 튀었다.

거인은 또 다시 다리 힘이 풀렸다. 롤랑은 거인이 완전히 주저앉기 전 그 오금을 칼끝으로 찍고 또 찍어버렸다.

결국 거인이 무릎을 꿇은 순간, 놈의 오금에서 관절 이음새가 투두둑 하고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롤랑의 칼 최상단 부분도 부서졌다.

이번 공격으로 롤랑의 칼은 이 할 정도 짧아졌다. 칼에서 철가루가 흘러내리는 것을 지켜보며 롤랑은 속으로 침을 삼켰다.

‘실제로는 더 많은 손상이······’

굉장한 명검일 터였다. 오스 왕이 봉작해주며 선물한 검이었으니까. 그러나 역시 가공할 괴력으로 강철을 마구 후려갈기는데 멀쩡할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롤랑은 검에서 애써 시선을 돌리며 평탄한 어조로 물었다.

“항복하겠나?”

거인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롤랑은 놈이 항복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거인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거인은 한쪽 무릎이 아작 난 상태에서도 투혼을 발휘했다. 거인은 망가진 한쪽 다리 대신 철퇴를 들지 않은 손을 다리 삼았다.

멀쩡한 다리와 빈손의 합작으로 거인은 앉은 자리에서 회전했다.

“죽—어—!”

그리고 롤랑을 향해 철퇴를 내리찍었다.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공기 갈라지는 소리가 뒤늦게 들려올 만큼.

길이가 길이였기에 철퇴는 롤랑이 반응한 순간 거의 그 머리통을 내리찍을 듯 덮쳐와 있었다.

이 순간 롤랑은 거의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칼을 빗겨 들어 철퇴의 자루 부분에 미끄러질 각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곧장 달려들었다.

철퇴 자루와 검신이 마찰하며 시뻘건 철가루를 흩뿌렸다. 그렇게 붉은 가루를 뒤집어 쓰며 나아간 롤랑이 또 다시 거인의 겨드랑이를 올려쳤다.

그제야 거인이 비명 질렀다. 그러나 롤랑은 기쁘지 않았다.

‘망할.’

이제 칼은 날이 완전히 사라졌으며 거미줄 같은 금이 잔뜩 생겨나있었다. 또한 그 강대한 일격을 막아낸 탓에 롤랑은 손목이 얼얼하고 팔이 저릿했다.

거인의 주저앉은 키는 롤랑의 키보다 살짝 높았다. 둘의 시선은 이제 똑바로 마주쳤다.

거인의 표정을 본 롤랑은 굳었다. 투구 사이로 드러난 거인의 눈에서 투지가 일렁이고 있었다.

롤랑은 직감했다.

‘더 끌어선 안 돼.’

놈은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거인은 땅에 댄 손으로 돌을 하나 집어다 롤랑을 향해 내던졌다. 기사 대결에서의 행위라기에는 매우 비겁한 짓거리였으나 롤랑은 거기서 일말의 음흉함도 느낄 수 없었다.

안면을 향해 날아오는 돌이 내포하는 것은 불굴, 어떻게든 계속해서 싸우고야 말겠다는 투쟁정신뿐이었다.

롤랑은 야구방망이처럼 칼을 휘둘렀다.

날아오던 돌은 곧바로 되돌아가 거인의 입가를 맞추었다. 거인의 이가 하나 부러지고 피가 흘러내렸지만 역시나 놈은 기죽은 기색이 아니었다.

보나마나 이번에도 칼의 수명이 더 짧아졌을 것이다. 롤랑은 그 사실을 굳이 확인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판사판이다.

롤랑은 뒤로 살짝 물러난 다음, 쏘아지듯 돌격해나갔다.

빠르게 결판을 내고자.

자신을 향해 똑바로 오는 롤랑에게 거인은 세차게 철퇴를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우선은 대각선으로 덮쳐오는 공격. 롤랑은 그 손목을 쳐서 튕겼다.

그러나 공격은 꺾이지 않았다. 철퇴는 튕겨나간 즉시 다시금 덮쳐왔다.

‘젠장.’

롤랑은 거인이 철퇴를 드느라 드러난 겨드랑이를 세게 올려쳤다. 제발 이 일격이 놈의 어깨 신경을 충분히 자극하길 바라며.

만약 거인이 그대로 휘두르는 데 성공하면 끝장이었다······.

도박은 성공했다. 후려친 철퇴가 롤랑의 어깨에 닿기 전, 거인이 울부짖으며 팔을 떨었다.

공격은 도중에 멈췄다.

거인은 고통에 겨워 다른 팔을 들어올렸다. 그 팔에 붙은 손으로 엉망이 된 겨드랑이를 감쌌다. 이제 롤랑이 계속 공격하기는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그로써 드러난 반대쪽 겨드랑이. 롤랑은 그 급소에 이미 칼끝이 나가버린 칼을 우격다짐으로 박아 넣은 다음 지레를 구부리듯 아래로 힘을 주었다.

놈의 근육다발이 찢겨나가는 감촉, 생생하게도 칼자루를 통해 전해져왔다.

거인이 천둥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이제 거인은 한쪽 다리를 대신하여 상반신을 지탱하던 팔이 마비되었다. 거인의 몸이 흔들리는 가운데 롤랑은 이미 칼이라기에는 고물에 가까워진 물건을 뽑아내었다.

롤랑은 칼의 잔해를 붙잡고 거인의 안면을 치고 또 쳤다. 심지어 눈에도 몇 번이고 타격을 가했다.

이미 칼은 자루만 겨우 남은 쇳조각이 된 지 오래였기에 그 눈을 찌를 수는 없었다. 때문에 거인의 눈이 터져버린 것은 그저 순수한 타격의 여파였지 날붙이에 당한 결과가 아니었다.

거인이 철퇴를 들지 않은 팔로 얼굴을 감싸려 했다. 그러나 팔은 들리다 말고 축 늘어졌다. 어깨근육이 헤집어져도 너무 헤집어져 있었다.

철퇴를 든 팔도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애당초 그쪽이 가장 많이 타격당한 부분이었다. 어깨뿐만 아니라 손목도 너덜거렸다.

롤랑은 담담한 얼굴로 거인이 부들거리는 것을 지켜보며, 속으로 기도했다.

‘항복해라, 항복해······’

아까 타격을 한 번 흘려 막았으나마 어쨌건 정면에서 막아야 했다. 강맹한 일격이었고 몸에 전해진 충격도 어마어마했다.

광전사 특유의 재생력 덕에 지금은 그 타격의 여파가 회복되기는 했다. 하지만 분명 집에 돌아가면 또 하룻밤 꼬박 앓아야 할 것이다. 재생을 위하여 몸의 영양분이 죄다 소모되었을 것이므로.

빨리 돌아가서 침대 신세를 지고 싶다. 그러니까 제발 항복해라. 항복해······.

롤랑은 그 속마음을 한껏 포장하여 꺼냈다.

“잘 싸웠으니 이제 항복하라. 투쟁정신은 아름다운 것이나 더 이상은 발악에 불과할 뿐이요 추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기사를 자처하는 거인이여. 충고하건대 대결에 임한 기사는 승리하는 법뿐만 아니라 패하는 법도 알아야 한다. 그대는 아름답게 싸웠으니 아름답게 패하라. 기사로서 말이다.”

롤랑의 긴 대사를 거인은 한 마디로 함축해버렸다.

“개—소리—!”

이어서 거인은 고함질렀다.

“난 기사 따위가 아니야! 전—사—다—!”

< 큰 다리 - [2]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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