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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의 트롤랑-32화 (32/164)

< 뒷마당 - [4] >

롤랑은 열이 내리고 나서도 저택 밖에 나설 수 없었다. 식탁에서 몸이 좀 나아진 것 같다고 말하기 무섭게 오스론이 그날로 손님들을 데려온 것이다.

웬 중년 기사가 롤랑 앞에서 예를 취했다.

“아, 정말 이 감격을 어찌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미천한 저를 소개드릴 것 같으면······”

귀족들. 메디아 귀족뿐만 아니라 외국 귀족들까지 죄다 몰려온 연회였다.

아직 하인도 다 고용하지 않은 마당에 오스론이 어찌 이 음식들을 마련한 것인지 롤랑은 알 수 없었다. 물론 거기 신경 쓸 상황은 아니었다.

저번 왕궁에서의 연회와 달리 마음의 준비도 안 된 터였다. 롤랑은 그저 조마조마하게 귀빈들을 마주했다.

상대가 산전수전 다 겪은 듯 노련해보이는 귀족이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볼살이 다 빠지지도 않은 애송이와 대화할 때도 롤랑은 긴장했다.

중년 귀족과 말을 섞고 나니 웬 젊은 기사가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저번에 세계수에서는 정말 기사답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그때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경. 부끄러운 말씀이지만 겁이 나 어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 젊은 기사의 이름을 롤랑은 겨우 떠올려냈다. 그리고 대답했다.

“괜찮소, 월렴.”

“아, 이름까지 기억해주시는군요. 부끄럽게도······”

정말 더욱 수치스러워졌는지 월렴은 고개를 푹 숙였다. 롤랑은 애써 말했다.

“죄스러워 할 것 없소. 용기는 강요되는 것이 아닌 법이야.”

“그러나······”

“되었소, 월렴.”

당시 일은 롤랑으로서도 미안한 일이었다. 삼사 미터짜리 늑대들에게 돌격하자고 외쳤다니.

괜히 그 따위로 외친 탓에 상식적으로 행동한 이 청년은 졸지에 겁쟁이가 되어버렸다.

‘다음부터는 외칠 대사를 좀 더 선별해야지 원······.’

롤랑이 속으로 앓는 차 월렴은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말했다.

“정말이지 기사의 말예로서 못 보일 꼴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기사 중의 기사 앞에서······ 이 수치를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혹시 다음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궁니르에 걸고 말입니다.”

저렇게까지 말하니 롤랑으로서는 그저 숨이 턱턱 막힐 뿐이었다.

이후로도 롤랑에게 다가온 귀족들은 죄다 비슷한 사과를 했다. 다음에는 결코 도망치지 않을 것이라느니 기사된 맹세를 저버리지 않겠다느니 어쩌느니.

결국 연회가 파했을 때 롤랑은 심적으로 잔뜩 지쳐버렸다. 임시로 고용된 하인들이 뒷정리를 하는 가운데 롤랑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오스론에게 다가가 따졌다.

“이보시오, 추기경. 다음에도 이럴 건가?”

싱글벙글 웃고 있던 오스론은 롤랑의 표정을 보고서는 그제야 죄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 롤랑 경. 별로 즐기지 못하신 것 같군요?”

“즐기지 않은 걸 넘어 고해성사를 끝낸 사제가 된 기분이라오. 다들 나에게 죄를 고백하지 못해 안달이더군. 물론 전혀 즐겁지 않았소. 알아들었소? 전혀 즐겁지 않았단 말이오!”

“물론입니다, 경.”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이해했소, 추기경?”

“예. 롤랑 경. 다음부터는 일을 벌이기 앞서 필히 언질을 드리지요. 승전을 축하하고 싶을 뿐이었는데 의도와는 정반대로 되어 죄송스럽기 그지없군요. 다음부터는 이러지 않으리라 맹세합니다.”

롤랑은 더 이상 따져들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오스론이 그 다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음, 그런데 연회음식이 꽤 남았건만 버리기는 아깝군요. 그 가련한 자들을 데려와 배 좀 채우게 해도 될는지?”

그 가련한 자들이란 이 저택에 머물고 있는 나병환자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에는 롤랑도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하인들이 물러난 가운데 나병환자들이 회장에 기웃거리며 나타났다. 그러고는 오스론의 말에 따라 조심스럽게 음식을 입에 가져가기 시작했다.

오스론은 미소 지으며 병자들에게 말했다.

“양껏 잡수게. 애당초 그 영광스러운 성전의 계기가 자네들이었지 않은가? 승전을 축하하는 이 연회에 자네들도 낄 자격이 있었던 셈이야. 안타깝게도 그것은 자네들에게도 부담스러울 것인즉 권유하지는 않았네만.”

예상외로 오스론은 저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심지어 저택의 방 한구석 내주는 것마저 거부하지 않았을 정도 아닌가.

단지 롤랑에게 잘 보이고자 그러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 어떤 신성하거나 고급한 주문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나병, 그 신의 저주를 오스론은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실제 오스론은 자신에게 나병이 옮으리라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프레이 신과 메데이아 공의 자손 메디아 왕족으로서, 오스론은 자기가 반신(半神)임을 자부했다. 그리고 설마 반신에게 신의 저주가 옮을 리 없다 여겼던 것이다.

문득 아말릭이 매우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 예하. 실례를 무릅쓰고 여쭐 말이 있사옵니다마는.”

“말해보게. 뭔가?”

“며칠 후 롤랑 경께서 간악한 다리지기 거인과 대결하시리라 들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저희도 끼어도 될지······”

“음, 자네들도 보고 싶은가?”

다른 나병환자들은 음식을 먹어치우다 말고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오스론은 흐뭇하게 지켜본 끝에 말했다.

“물론 그렇겠지. 누가 그 광경에 동참하고 싶지 않을 것인가? 좋네, 롤랑 경께서 허가하신다면 내 자네들을 위한 좋은 관람석을 마련해두겠어. 괜찮으시겠습니까, 롤랑 경?”

물론 대답은 정해져있었다. 병자들이 애절한 시선을 보내오는 가운데 롤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봐준다면야 당연 영광일 것이오.”

병자들이 환하게 웃었다. 아말릭 말고는 거의 천치 같을 만치 해맑은 웃음이었다.

결국 연회 뒷정리가 한참 후에야 끝났을 때, 롤랑은 정신적으로 지쳤으나 다가올 모험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롤랑은 뒷마당에 제이슨을 앉혀다 차를 마시며 입을 열었다.

“나 곧 거인과 싸울 거잖아. 그거 대비하게 스파링 상대 좀 불러줄 수 있어?”

“스파링 상대?”

“서리거인 말이야.”

제이슨은 즉답했다.

“안 돼, 마. 소환이 무슨 만능인 줄 아냐?”

저렇게 바로 거절할지 몰랐던 롤랑은 당황했다.

“왜 안 되는데?”

“소환물은 내 노예가 아니니까. 소환은 저쪽에도 뭔가 메리트가 있어서 성립되는 거야. 소환사의 싸움에 끼어 영혼을 수집한다든가, 더 많은 투쟁을 한다든가 뭐 그런······ 소환사가 그냥 센 노예들 네 마리 불러다 싸우는 직종이었음 소환사들끼리만 뭉쳐 싸우는 게 최강일 거 아냐? 그랬으면 내가 여기 세계수 원정에 다른 직업들이 필요하다 말했겠냐? 그렇지 않으니까 굳이 딴 놈들을 데려왔던 거지.”

의외의 말이었다. 롤랑이 물었다.

“소환사들만 모여 싸우는 게 최고가 아니라고?”

“그래선 못 싸우지. 좀 고급한 소환물은 같은 장소에서 동시 소환 안 되고······ 싸움이 너무 보잘것없다 싶으면 소환물이 화낼 수도 있고······ 실제로 신전에서 아무 생각없이 거인 불렀다가 놈한테 살해협박 당한 병신도 있었지.”

롤랑은 황당해져서는 물었다.

“처음 듣는 말인데? 그리고 너 신전에서 혼자 지냈잖아. 그걸 어떻게 알아냈어?”

“내가 내내 왕따였는 줄 아냐? 출전하기로 한 뒤에는 좀 섞여지냈다, 마······”

“그럼 같이 지내놓고 그리 한심하네, 식충이네 욕해왔다고?”

제이슨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짧은 침묵 동안, 롤랑은 잠시 신전에 남은 동료들을 생각했다. 우울증 걸린 몇몇은 지금쯤 어찌 되었을까? 증상이 악화되지는 않았을까?

물론 당장 손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롤랑은 지금 이 상황에 관심을 돌렸다.

“그래도 소환해줄 수 없을까?”

“새꺄, 스파링 상대는 안 된다니까? 그 거인 새끼한테 끼울 복싱 글러브라도 준비해놨냐?”

“스파링 말고 진심으로 붙는 건? 그것도 안 돼? 투쟁을 위해 소환되는 놈들도 있다며. 그게 그 거인 아냐? 그러니까 생사결을 전제로 부르는 건 괜찮은 거 아닌가?”

제이슨이 눈을 부라렸다.

“뒈질 수도 있다?”

“대신 나중에 뒈질 확률이 줄잖아.”

제이슨이 이맛살을 좁히며 물어왔다.

“새끼야, 애당초 왜 스파링이 필요한데?”

“거인 상대로 익숙해지고 싶어서. 상대하는 법도 좀 알아야겠고.”

“익숙해질 필요가 뭐 있어? 광폭화 하면 알아서 잘 싸우는 걸.”

“그 기사 거인들이랑 싸울 땐 광폭화 못 써. 기사 거인들 뒤에 궁수 부대가 대기하고 있다잖아? 광폭화 쓰면 적들을 다 끝장낼 때까지 날뛰어야 하니까 결국 거인 부대 전체와 싸우게 될 텐데 그럴 순 없고······ 맨정신으로 싸워야 한다고.”

문득 제이슨의 표정이 굳었다.

“맨정신으로?”

“어.”

“가능하겠어?”

“나 근력 8로 올랐으니까 축복 쓰면 근력 9. 거인들 평균 근력이 9니까 광폭화 안 써도 능력치로는 엇비슷할걸? 뭐 체격이나 몸무게 따위 요소가 덧붙여지면 거인쪽이 월등하긴 하겠지만 나한테는 검술도 있고······”

“능력상으로 말고. 네가 그럴 수 있겠냐고. 거인이면 높이로도 그 괴물늑대들만큼 큰 거지? 좆나 압도적일 거다?”

문득 제이슨의 표정을 보고 롤랑은 당황했다. 그 얼굴에서 근심이 읽혔기 때문에.

저놈에게도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니. 내심 놀라며 롤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야지. 앞으로 얼마나 많이 싸워야 할지 모르는데 매번 정신 나간 채로 싸울 순 없으니까. 그래서 불러줄 거야 말 거야?”

“부를게. 부르기 전에 모지부터 데려오고······”

그리하여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이슨은 주문을 외웠다.

주문이 완성되어 감에 따라 허공에 서리가 맺혔고 이내 푸른 차원문이 열렸다. 우트가르트의 서릿바람과 함께 나타난 거인이 고함질렀다.

“적 어—디냐—!”

롤랑이 칼을 뽑으며 말했다.

“나다, 거인.”

“너? 빡대가리—?”

“그래, 나 빡대가리 롤랑이 네 상대가 될 것이다. 부족한가?”

“아—니. 충분—하다. 하지만 너는 이쪽편인데 죽이면 안 될—건데?”

“걱정할 것 없다. 손대중할 것 없어, 거인이여. 나도 그러지 아니할 테니. 어떤가? 이 롤랑의 도전을 받아줄 것인가, 우트가르트의 전사?”

“좋—다!”

서리거인이 등에 맨 거대한 양손도끼를 움켜쥐었다. 그 거대한 날이 서리를 머금고 스산하게 빛났다.

“우트가르트의 명—예를 걸고! 적을 죽—인—다!”

롤랑이 칼을 겨누는 가운데 거인이 다리에 힘을 주었다. 기둥 같은 다리에 힘줄이 그물처럼 돋아났다.

“덤벼—라—!”

거인이 전투함성을 내지른 동시에 대결이 시작되었다. 양쪽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거인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며 지면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코끼리가 달려와도 저토록 위압적이지는 않으리라.

양쪽의 무기가 부딪친 순간 천둥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연속해서 공수를 주고받는 가운데 양 군대가 백병전을 펼치는 듯 천지가 진동했다.

대결이 끝난 후, 앤지의 근심 어린 간호를 받으며 롤랑은 하루꼬박 앓아누웠다.

승부의 결과가 롤랑의 압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

< 뒷마당 - [4]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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