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뒷마당 - [3] >
늑대 시체들이 낙찰된 총 가격은 십사만 닢이라 했다.
이 소득을 보고하러 온 조합원이 말했다.
“이전에도, 앞으로도 얻지 못할 가죽이니까 호사가들이 그리 세게 부른 것이죠. 특히 하얀 늑대 경우에는 모피가 하나도 상하지 않아서 엄청난 가격이었다고······”
조합원의 장황한 말에도 불구하고 롤랑은 무덤덤했다. 십사만 닢이라 한들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가격을 잘 쳐준 것인지 당최 알 수 없었으므로.
조합원이 물었다.
“예금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직접 받으시겠습니까? 전자를 권해드립니다. 이자가 붙는 예금이거든요. 액수가 액수이니 꽤 이익이 되리라 자부합니다.”
“이자라고?”
롤랑은 코웃음치고는 대답했다.
“직접 주시게.”
그 거만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조합원은 대단히 공손하게 알겠노라 대답했다.
조합원이 물러가자 제이슨이 성냈다.
“새끼야, 왜 직접 달라고 했어? 직접 보관하는 것도 수고로운데 이자까지 포기해?”
“이자를 준다니까.”
“뭔 개소리야?”
“고리대금은 거부해 마땅한 거야. 롤랑은 쓸데없이 고상한 기사니까.”
“은행이자가 뭔 고리대금이야, 응? 예금하는 게 무슨 사채냐?”
제이슨이 어이없어 했으나 롤랑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사람들은 그 둘을 구분 안 해. 중세니까. 일하지 않는데 금리만으로 부유해진다는 건 매우 사악하게 여겨진다고. 그때 비카파가 관문을 막고 들여보내주지 않으니까 원정대가 뭐라 욕했는지 기억나?”
마지막 질문에 대답한 것은 모지였다.
“돈놀이꾼이랬나?”
롤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은행가 취급이 그래. 그럼 은행 이용객들 취급도 어떤지 짐작할 수 있지? 제이슨, 나 이만 논쟁 중단하고 싶은데.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 들리니까 우리 대화가 들려선 곤란하고 나 지금 머리 아파······ 괜찮지?”
제이슨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제이슨이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어준 덕에 롤랑은 조용하게 앉아있을 수 있었다.
조금 시간이 흘러 조합원이 돈을 가지고 나타났다. 그러나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들고 온 큼지막한 궤짝은 혼자 운반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합원들이 궤짝을 열자 그 안은 은빛과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한 조합원이 이마에 난 땀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세보이겠습니다. 확인하고 서명해주십시오.”
조합원은 궤짝 안의 주화들을 쌓아올리며 몇 닢, 몇 닢 하고 세기 시작했는데 롤랑은 그 셈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애당초 저 주화 하나에 몇 닢인지도 알 수 없었고 그럴 정신머리도 아니었다.
롤랑은 생전 이토록 많은 보화를 본 적이 없었다.
모지는 아예 거기에 매료되다시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본 롤랑은 어떻게든 자신만은 표정관리를 하고자 애썼다.
롤랑은 담담한 투로 말했다.
“퍽 많군?”
“원래는 수수료, 영지세, 교구세 다 치르고 나면 꽤 줄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번은 백작께서 호의를 베푸시어 늑대들에게 걸린 현상금만으로 다 갈음해 주셨어요.”
롤랑은 주변에 오스론이 없음을 확인한 다음 재빨리 말했다.
“그런가. 복잡한 셈이 사라져 좋군. 백작에게 롤랑이 퍽 고마워하더라고 전해주게.”
그 말에 조합원은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백작께서도 호의를 베푼 보람을 느끼실 겁니다, 롤랑 경. 그런데 실례를 무릅쓰고 무엇 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묻게.”
“앞으로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세계수에 오를 것이다. 그것이 신들께서 우리를 다시금 지상에 보내신 이유인즉 달리 무엇을 하겠나?”
“그렇다면 말입니다, 롤랑 경······ 권해드리고픈 일이 있는데요.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롤랑이 고개를 끄덕였기에 조합원은 계속 말했다.
“우리 같은 보통 것들한테는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마는 롤랑 경께야 능히 도전해 볼 만한 모험일 텐데 말입니다. 거인과 관련된 일이거든요.”
“거인이라니?”
“거인 다리지기입죠. 지금껏 성전에 참가하고자 병사를 이끌고 오신 귀족 분들과 순례자들이 공략한 층은 오십 층까지입니다. 그런데 그 오십 층 너머로는 아직 한 발짝도 못 건너간 것이······ 오십 층 중간에 있는 큰 다리를 웬 거인들이 가로막고 있어요.”
얼핏 듣기에는 꽤 간단한 일인 것 같았다.
“놈들을 해치워 달라 이거로군. 하지만 거인 몇 놈 때려잡는 거야 군대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어찌 그 영광이 일개 기사한테까지 돌아가나?”
“왜냐하면 거인 몇 놈이 아니거든요. 거인 부대입니다, 거인 부대.”
“거인 부대?”
“예, 떼거지로 아주 단단히 무장한 놈들이죠. 다리를 막는 거인 몇 명······ 그 너머에는 끔찍하게 거대한 철궁(鐵弓)으로 무장한 거인 궁수대가 대기하고 있어요. 대포가 세다고 한들 놈들이 쏘는 철궁만은 못할 겁니다. 웬 기둥을 화살이랍시고 쏴대는데 거기 적중당하면 아름드리나무도 단번에 부러지죠.”
“아무리 그렇다고 군대가 못 당할 정도인가?”
“뭐 이쪽도 쪽수로 덤벼들면 어찌어찌 될 것 같긴 한데요. 그러기에는 다리 하나 건너려다 너무 많이 죽을 것 같기도 하고······ 부대 뒤에는 군대가 도사리는 법 아니겠습니까? 허투루 쑤시다 거인 군대가 밀려오면 무섭잖아요.”
여기까지 듣고 나니 롤랑은 아연해졌다. 그래서 대체 어쩌란 말인가?
설마 롤랑과 그 동료들이 군대를 대신하여 그 사악한 거인들을 다 죽여 달란 말인가? 정신 나갈 만치 불합리한 요구였다.
애당초 군대가 해낼 수 없는 일은 개인도 해낼 수 없는 법이다. 당연한 일 아닌가.
‘모지는 레벨 16이지만 레벨 1 용병이 쇠뇌 쏘면 억 하고 죽는다고······’
어찌 거절해야 겁쟁이처럼 들리지 않을까 고민하며 롤랑이 말했다.
“뭘 바라는지 모르겠군. 백작의 군대가 놈들을 해치우면 거인 군대가 자극 받으리라 걱정하지 않았나? 그렇담 내가 해치운들 거인 군대가 무덤덤할 터인가? 아니면 무슨 요술이라도 부리란 말인가?”
“그런 복잡한 것은 할 필요도 없죠. 경께서야 그저 기사답게 해주시면 됩니다. 기사답게요. 왜냐하면 그 거인 놈들도 기사를 자처하고 있거든요.”
이어진 설명은 이러했다.
그 거인들은 부대를 이루고 있으니까 당연히 지휘관이 있는데, 그 지휘관이란 다름 아닌 기사를 자처하는 거인들이다.
기사라 한들 뭔가 탑승한 것은 아니다. 그저 놈들이 갑옷으로 무장한 채 스스로 기사도를 숭상하노라 우기고 있기 때문에 기사라 부르는 것뿐이다.
그리고 기사답게도 놈들은 도전, 결투, 전리품 따위 기사 소설에 나오는 요소들을 좋아했다.
“그 기사 거인들은 다리를 가로막고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통행자여, 우리가 정당하게 점령한 이 다리를 건너길 원하는가? 그렇다면 이 우트가르트의 무슨무슨 경에게 도전하여 승리해 보아라!’”
“일 대 일 결투를 하자는 거로군.”
“그렇죠. 기사답게 명예롭게요. 근데 사실 그게 정당합니까? 거인 새끼가 인간하고 일 대 일로 맞붙자는 게? 당연히 상대가 안 됩니다.”
“그렇다면 도전자가 여태껏 없었나?”
“많았습니다. 상상 이상으로요. 이곳 비프로스트에 깔린 게 기사 소설 애독자들 아니겠습니까? 끔찍하게 많은 기사들이 자기가 무용을 발휘하면 자기보다 두 배쯤 큰 거인 따위 어찌어찌 이길 수 있으리라 믿고 놈들에게 도전했습니다. 당연히 모두 져버렸고요.
여기까지면 좋을 텐데 그게 끝이 아니죠. 그 기사 거인들은 패배한 기사를 그대로 끌고 가버립니다. 결투에서 승리한 기사는 패자의 말과 갑옷 그리고 신변 일체를 얻는 것이 기사된 권리라나요? 그리고 포로에 대한 몸값을 요구하는 거지요.”
아주 기사답게도, 라는 말을 조합원은 속으로 삼켰다. 왜냐하면 바로 눈앞에 있는 남자야말로 기사다운 기사의 표본이었으니까.
다 듣고 난 롤랑은 코웃음 쳤다.
“아주 웃기는 놈들이다마는 영 허황된 것만은 아니군. 강도 기사 또한 기사라는 말이렷다? 뭐 좋다. 내게 뭘 바라는지 알겠어. 난 그저 놈들에게 도전하면 되는 것이로군?”
“예, 한 명의 기사로서 말이지요.”
롤랑은 기쁘게도 웃었다.
억지로 꾸며내기만 한 웃음은 아니었다. 이 정도면 할 만한 것 같았던 것이다.
중무장한 거인과 싸워 이기라는 것은 물론 부담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어쨌건 아예 군대를 대신해 날뛰라는 것보다야 훨씬 상식적이지 않은가.
롤랑은 흘긋 모지와 제이슨을 보았고 그 시선을 눈치 챈 제이슨이 말했다.
“그거 재밌겠네? 부럽네, 아주.”
‘받아들이라 이거지.’
동료의 동의하에 롤랑이 말했다.
“좋다, 백작에게 돌아가 고하라. 롤랑이 간악한 강도 기사에게 도전하리라고. 그리고 마땅히 기사도 법칙에 의거하여 승리하리라고 고하라. 왜냐하면 티르 신께서 결투를 주관하시매 불의한 기사는 언젠가 패하고 만다는 것이 기사 시합의 오랜 이치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형상화된 ‘언젠가’로서 놈 앞에 당도하리라.”
황당할 만치 자신만만하고 기사다운 말투. 제이슨이 크게 뜬 눈으로 롤랑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자 노력하며 롤랑이 물었다.
“결투 기일은 언제가 좋겠는가? 내가 직접 깃발을 들고 나아가 놈에게 도전하면 될 것인가?”
조합원은 반색하며 물어왔다.
“정말로 맡아줄 것입니까, 롤랑 경?”
“물론이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결투 약속은 저희가 맡아서 잡아놓겠습니다. 그걸로 좋을는지요?”
롤랑은 고개를 끄덕였고 조합원은 한껏 경의를 표한 다음에야 저택을 나섰다.
문이 잘 닫힌 것을 확인한 뒤 롤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좆되는 줄 알았네.”
이쪽에 쭉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제이슨이 문득 물어왔다.
“야, 인마. 롤랑 너.”
“응?”
“원래 배우라든가 뭐 그런 거 하다 왔냐?”
“아니.”
“근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야? 그것도 순 애드리브로?”
“해야 하니까. 어떻게든 하려고 하면 너도 할 수 있어. 절박하니까 말이지.”
롤랑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제이슨은 그 말에 수긍할 수 없었다. 도저히 자신은 저렇게 못할 것 같았기에.
‘아파 죽겠단 놈이 그 장황한 대사 늘어놓던 와중에는 조금도 불편한 기색 내보이지 않았단 말이지······. 생각해 보면 이놈, 처음엔 광폭화 없이도 괴물들과 치고받고 잘 싸웠던가?’
그와 동시에 제이슨은 생각했다.
혹시 이 중에서 상황에 가장 적응하지 못한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닌가 하고.
곧이어 롤랑은 금과 은으로 가득 찬 궤짝을 번쩍 들어 저택 안에 옮겼다. 몸이 아프긴 하지만 힘이 제일 세니 본인이 해야 한다 생각했다.
그러고는 동료 두 명과 의논한 다음 궤짝에서 금은을 적당량 꺼냈다.
롤랑은 한 무더기의 금은을 제이슨에게 쥐어주었다.
“이건 네가 알론소 그 영감님한테 갖다 주고······”
또 다른 금은 무더기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건 그 양반들한테 내가 갖다 줄게.”
모지가 물었다.
“내가 할까? 넌 좀 쉬지?”
“아니, 내가 할게. 그네들은 롤랑 경이 몸소 건네주는 쪽을 더 기뻐할걸.”
그리 거절하고서 롤랑은 한 무더기 주화를 다른 함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그것을 저택의 구석에 위치한 방에 가져갔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에 있는 것은 다섯 명의 병자들이었다.
나병환자들.
“아? 롤랑 경······”
누워있던 병자들이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롤랑은 손을 들어 그 동작을 제지했다.
“쉬고 계시오. 전해줄 게 있어 왔소이다.”
“전해줄 거라니요?”
“늑대 시체들이 팔렸소. 이건 당신네 몫이오.”
롤랑이 함을 건네주었다. 열어보더니 다섯 명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한동안 숨을 못 쉬었다.
아말릭이 겨우 입을 열어 물었다.
“저희 몫이라고요? 이게요?”
“오 푼이오.”
아말릭은 더듬더듬 말했다.
“이걸······ 받을 수는······ 저주 받은 저흴 구해주시고······ 여기 방을 빌려주신 것만으로도 평생 받지 못할 은의를 입었는데요······ 더 이상······”
꽤 말주변 있는 아말릭이 이 지경이니 다른 병자들은 아예 입을 열지 못하는 마당이었다. 롤랑은 엄숙하게도 말했다.
“나 역시 그대들에게서 은의를 입었소. 반쯤 미쳐 날뛰던 와중에도 나는 그때 그대들이 날 덮치려 들던 괴물을 죽여 나를 구원했음을 기억하오. 그 대가요. 그대들은 받을 자격이 있소.”
아말릭은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뭐라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말로 나오지 않았는지 그냥 입을 닫아버렸다.
이내 아말릭은 무릎 꿇고 머리를 숙여 절했다.
롤랑은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자기 방에 돌아와보니 여전히 앤지가 졸고 있었다. 롤랑은 녀석을 번쩍 들어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자기도 그 옆에 누워 마저 끙끙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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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마당 - [3]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