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뒷마당 - [2] >
불타오르는 것 같은 두통과 함께 롤랑은 잠에서 깼다. 그리고 꿈에서 나눈 대화를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애써 떠올렸다.
‘어느 룬을 원하지?’
‘더 굳센 힘을······’
또 다시 레벨 업 했다. 물론 좋은 일이지만 당장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이 아니었다.
오딘이 한 말, 그 맹세를 롤랑은 떠올렸다.
‘내 어떤 소원이든 들어준다고······.’
오딘은 궁니르에 맹세했다.
롤랑이 책에서 읽었기로, 그 룬창에 내건 맹세는 쉬이 어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맹세한 자가 신이라면 더욱.
오딘은 약속을 지킬 것이다.
‘황금사과를 왕에게 갖다 주기만 하면 계약 완료가 되어 영웅들이 자유가 된다는 건······ 사실 믿을 수가 없어. 일단 그 약속이나마 지켜지면 좋을 테니 뭐, 만약 구할 수 있으면 구해주려 한다마는······ 방금 더 강력하고 믿을 수 있는 약속을 얻었다.’
그 약속이 지켜지는 그날, 이 세계에 불려온 서른 명은 진실로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들, 납치되어 온 동포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롤랑은 알지 못했다. 이 세계에서 영화를 누리고 싶어 할지, 아니면 원래 세계에 돌아가고 싶어 할지.
어느 쪽이건 모두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롤랑이 그리 바랄 것이므로.
기쁜 소식을 얻었으니 기쁘게 하루를 시작하려 했다. 롤랑은 기지개를 활짝 펴고는 상반신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그러기 벅찼다.
온 몸에 열이 가득했다. 또한 온통 어지러운 가운데 롤랑은 계속 누워있었다. 간간이 신음까지 하고 있자니 누군가가 차가운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었다.
롤랑은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곳에 조그만 꼬마가 앉아있었다.
롤랑은 힘겨운 와중에도 웃어보였다.
“뭐냐, 앤지.”
앤지가 눈을 크게 떴다.
“기사님? 일어나셨어요?”
롤랑은 신음하며 말했다.
“그래, 간호는 됐으니까 가서 두 놈이나 좀 데려와 줘라.”
“예!”
앤지는 요란스럽게 소리 지르며 뛰쳐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동료, 모지와 제이슨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롤랑의 얼굴을 보더니 제이슨이 혀를 찼다.
“너는 왜 싸움만 끝나면 앓아눕나?”
롤랑은 저놈을 한 대 때리고 싶었지만 애써 참으며 입을 열었다.
“넌 또 뭐가 불만이라 시빈데······”
“아니, 따지는 게 아니라 이상하다 이거지. 플레이어 캐릭터들 기본 능력치인 4는 분명 훈련을 마친 전사 수준 아냐? 건강 4? 이거 잔병치레 없는 성인남성 수준일 텐데 너는 비실비실하기가 무슨······”
“괴물한테 깔리고 들이받히고 몸이 으스러져서 억지로 치유시키고 그랬는데 어지간히 무사할 리 있냐? 생각 좀 하고 말해라, 좀······”
무심결에 쏘아붙여 놓고서도 롤랑은 후회했다. 제이슨의 성격상 이제 배로 갚으려 들 것이 분명했으므로.
한 바탕 소란스러워질 것을 걱정하려니 어쩐지 반응이 조용했다.
롤랑은 슬쩍 제이슨의 안면을 살폈다. 그러고는 이내 떨떠름해졌다.
화나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웬걸, 제이슨 주제에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제이슨이 말했다.
“하기야 고생했지······ 뭐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인가.”
롤랑은 속으로 안도하며 대답했다.
“아무튼 욕봤다. 괜히 나서 가지고 죽을 뻔했네. 미안해.”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모지였다.
“왜 사과해? 필요한 일이었어. 결과도 좋았고.”
“결과가 좋아?”
“밖에 나가보니까 귀족들이 우리 대하는 게 확 달라졌더라고. 거의 아첨하는 듯이 굴던데? 여태껏 영 떨떠름하게 굴던 치들마저 말이지. 그리고 이번에 목돈도 들어올 거 같아.”
“목돈? 아, 늑대들한테 현상금 걸렸다고 했던가?”
“그것도 있지만 그때 백작이랑 군대가 와서 늑대 시체들 수거해 갔잖아. 그 늑대들 시체가 팔렸거든. 상당한 가격에 팔렸다네. 수수료며 세금이야 떼 가겠지만 그래도 기대해도 좋을 정도라던데.”
“그거 다행이네.”
롤랑은 아픈 와중에도 씩 웃었다. 그러나 모지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결과만 좋다고 끝이 아냐. 과정이 문제지. 다 죽을 뻔했잖아?”
“그렇지. 한 명 죽었어도 이상할 거 없었어.”
“탓하려는 건 아냐. 최하층에서 그런 물량이 덮쳐올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이번은 어찌 잘 되었더라도 매번 이런 식이라면 우리 모두 금세 죽을 거야.”
무슨 말인지 롤랑은 쉬이 이해했다. 게임이면 아무리 위험한들 세이브 데이터 저장, 불러오기만 열심히 하면 어찌어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럴 수는 없다.
“앞으로도 그냥 닥치고 돌격, 하는 식은 안 된다 이거지?”
“그래. 우리가 정한 기본 방침 자체는 옳다고 생각해. 뒷감당 어려울 거 같더라도 영웅답게 나서자는 건 말이야······ 하지만 앞으로는 그런 영웅적인 모험에 앞서 사전준비를 해두어야겠지. 물론 만반의 준비를 갖추더라도 위험하겠지만.”
갑자기 방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상황에 맞지 않는 농담이라도 던져줄 것 같았던 제이슨마저 입 다물고 있는 마당이었다.
롤랑은 애써 입을 열었다.
“뭐 그래도 앞으론 좀 낫겠지. 이번에 다들 레벨 업 했잖아? 나 힘 올랐다? 너흰 뭐······”
말하다 말고 롤랑은 당황했다. 둘이 눈을 크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의심쩍다는 표정으로 제이슨이 물어왔다.
“레벨 업 했다고?”
“아냐?”
모지가 설명했다.
“롤랑, 대충 계산해 봐도 레벨 업 할 만한 경험치 획득량이 못 돼. 가뜩이나 나무늑대는 레벨 8이고 우리 레벨은 16이니까 경험치를 절반밖에 못 받는다고.”
롤랑은 반문했다.
“경험치 절반이라니? 이건 게임이 아니니까 그런 룰이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잖아? 애당초 내가 이해하기로 우리 레벨 업 원리는 쓰러뜨린 적들의 영혼을 보내면 그걸 신들이 룬 형태로 빚어 주는 거야. 그렇다면 우리와 적들의 레벨 차이야 어떻건 습득 경험치는 같을걸?”
그리 주장해놓고서도 롤랑은 불안해졌다.
‘만약 레벨 업 한 것이 착각이라면? 꿈 자체가 그저 개꿈이었나? 그럼 오딘이 한 약속도······’
그러나 모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아무튼 우린 레벨 업 안 했어. 제이슨, 그렇지?”
제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우리 말고 딴 놈이 레벨 업 한 거 같긴 하지만······”
“딴 놈이라니?”
“알론소.”
“뭐?”
“알론소가 레벨 업 한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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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알론소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싸움 내내 보호 받은 덕이었다. 결코 실력 덕분이 아니었다. 그 사실은 알론소 본인도 이해했다.
애초에 알론소는 기사라기보다 지주에 가까운 노인이었다. 메디아 기사들은 대개 그렇다. 평화로운 나라의 목가적인 기사들.
알론소는 여태껏 늙을 동안 전쟁은커녕 결투 또한 겪어본 적이 없었다. 변방 적들의 정세보다는 소작 준 농부네 닭이 몇 마리인지에 관심 가지며 살아온 것이다.
그러니까 익힌 창술이라 해봤자 썩 나쁘지 않지만 대단하지도 않은 수준이요, 몸 또한 그 나이치고는 괜찮아도 전사라 주장하기에는 여러모로 미흡했다.
사냥을 잘한다는 것도 사실 허풍이었다. 애당초 알론소에게 사냥터 따위는 없었다. 그저 소작지를 망치러 온 토끼와 사슴을 몇 마리 잡아봤을 따름이다.
여기까지 신상명세를 늘어놓더니 제이슨이 말했다.
“그 늙은이가 점심에 술 좀 같이 마셔주십사 해서 그러마 했지. 같이 들어가서 술 홀짝이자니 너무 맵더라고. 실컷 콜록거리고 술에는 손도 못 대고 있으려니까 옆에서 웬 병신이 비웃더라?
그러자 알론소가 외친 거지. ‘이 분이 누군 줄 알고 그따위 언동이냐! 덤벼라!’ 뭐 그리하여 벌어진 실랑이에서 알론소가 이겼어. 너무 쉽게. 문제는 이긴 방법이었는데 말이지······ 그 영감이 병신놈 멱살을 잡고 팔에 힘을 주니까 멱살 잡힌 병신이 위로 붕 떠오르더라고?”
확실히 비정상적인 일이었지만 롤랑은 확인차 물었다.
“원래 힘이 장사였던 거 아냐?”
“아니, 본인이 그리 해놓고서 알론소 그 영감도 깜짝 놀라더라. 뭐 결국 실랑이는 순식간에 끝나긴 했는데 나중에 듣자니 역시 알론소 그 양반이 원래 그리 힘 좋은 게 아니었다더라고. 이후로 더 추궁하니 꿈에서 발두르 신을 뵀다든가 어쨌다든가······”
너무 예상하지 못한 정보라 롤랑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게 뭐야 대체?”
“모르지. 그냥 기억은 해두라고.”
둘은 곧 방을 나섰다. 혼자 남겨진 롤랑은 앓는 와중에도 생각했다.
알론소는 정말 레벨 업을 한 것인가? 현지인 주제에, 게임 캐릭터처럼?
그리고 저 두 동료가 레벨 업을 하지 않았다면? 이쪽이 레벨 업 했다는 것도 착각인가?
그렇다면 대체 그 꿈은 뭐였나? 그것이 그저 개꿈이었다면······.
침대에 누운 채 롤랑은 연신 신음했다. 더없이 서러웠다. 마음을 굳게 먹으려 하기는 했으나 역시 받았다가 빼앗긴 이 기분은 더없이 최악이었다.
빼앗긴 것이 희망이었기에 더욱.
한참을 괴로워하다가 문득 든 생각에 내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른 룬 문자들을 보고 롤랑은 환희했다.
못 보던 룬, 그리고 꿈에서 보았던 그 룬이 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신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오딘, 만세.
기분 탓인지 고통이 조금 가신 듯했다. 롤랑은 애써 몸을 일으켰다. 옆에서 수건을 쥔 채 졸고 있는 앤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 잘 모셔놓았던 종이를 꺼내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그 종이, 캐릭터 시트에 깃펜을 대었다.
롤랑 LV 17
- 광전사 LV 15, 성기사 LV 2
근력 8
민첩 8
정신 4
지혜 4
건강 4
신성 8
* 특기 : 장검 숙련 LV 4, 방패 숙련 LV 3, 중갑 숙련 LV 3, 반격 숙련 LV 3, 전투함성 LV 3
+ 염동력 LV 1
* 주문 : 원소 룬, 축복, 회복, 소생, 정화
* 가호 : 초재생, 바람의 화신, 부활하는 자(추정, 성기사 가호)
글씨는 지저분했고 문장 배열은 난삽했으나 롤랑은 한참 동안 자신이 수정한 시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못내 아쉬운 듯이 계속 읽고 또 읽다가, 발자국 소리가 들린 순간 시트를 서랍 안에 넣고자 했다. 그러나 서랍이 멀리 있으니 몸소 넣으려면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텐데 그러기는 귀찮은 일이었다.
‘이런 감각인가······’
머릿속에 룬을 그리자 시트는 허공을 날아가 서랍 안에 착지했다.
서랍마저 저절로 닫힌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제이슨이 들어와 외쳤다.
“늑대 새끼들 팔린 돈 들어왔다, 씹할!”
롤랑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
< 뒷마당 - [2]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