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뒷마당 - [1] >
“진짜 롤랑인가?”
비카파의 한탄에 자문하러 온 주교는 웃으며 대답했다.
“절대 아닙니다.”
“아니, 그 괴물늑대가 죄 죽었다니까. 이게 말이 되오? 주교님, 나무늑대 본 적 있지요? 작은 놈이 삼 미터요 큰놈이 사 미터쯤 되는 괴물들이란 말입니다. 크기가 크기다보니 가죽도 두꺼워서 화살도 잘 먹히지 않소. 물론 날붙이도 말이오.
놈들이 일렬로 서서 자기네를 죽이도록 내버려두더라도 한 놈 처형하는 데에만 엄청나게 고생할 거요. 그런데 웬 기사가 칼 챙챙 하니까 다 죽었어. 지난 십오 년 간 죽은 늑대의 수십 배가 죽었다고. 도무지 말도 안 돼······”
“몇 년 간 몇 마리 못 죽인 거야 뭐, 놈들이 군대만 보면 줄행랑쳐서 그런 거잖습니까? 막상 싸워보니 별 거 아니었을 수도······”
“그 덩치면 설령 양처럼 순하다 한들 별 거 아닐 수가 없소, 주교님. 애당초 내 살아생전 그 새끼들보다 흉악한 새끼들은 본 적이 없어. 군대를 보면 줄행랑친다지만 그 수가 적어 만만하다 싶으면 냅다 덮치는 놈들이라오. 그런 괴물들이 순식간에 다 죽었어. 이게 가능한 일인가?”
“가능하니까 일어났겠지요 뭐. 아무튼 롤랑이란 근거가 그겁니까? 너무 대단해서?”
“인간 같지 않으니······ 게다가 그 옆에는 발키리까지 서있었고······”
“서있었다고요? 그렇다면 날지 못하는 발키리 아니겠습니까?”
“그게 뭐요?”
“영혼의 격이 낮은 천사들이죠. 영혼을 모아 격을 높이고자 소환에 응해 싸워주기도 합니다. 불러내는 게 상당히 어렵긴 하지만 어쨌건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에요. 교회 큰 행사쯤 되면 가끔 볼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람을 초월할 방법이 없지는 않지요. 백작께서도 성유물(聖遺物) 자주 보셨지요?”
“착용자의 근력을 올려준다든가 명석하게 해준다든가, 뭐 그런 축복 걸린 것들? 용병일 할 때 보긴 했소마는······ 그럼 그 롤랑이 그놈의 성유물 덕에 그리 강했다고? 말이 되나?”
“말이 안 될 게 뭐 있습니까. 가뜩이나 고강한 전사가 신체적 능력까지 인간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면 상식 이상의 활약을 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내 알기로 옛 영웅들도 그런 식이었다던데요. 그리고 메디아라면 신들에게서 받은 성유물 한둘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겠지요.”
비카파는 허탈하게 웃었다.
“성유물인들 정도가 있는 거요, 주교님. 좀 껴입었다 해서 괴물 백 마리를 해치울 만치 성유물이 대단하다면 누가 비싼 돈 들여 용병 따윌 쓰겠소? 허무맹랑한 말씀이오.”
“제 주장이 아무리 허무맹랑한들 옛 영웅이 부활했다는 것보다는 현실적일 텐데요.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건 절대 불가능하다고.”
그리고 주교는 저번에 했던 설명을 반복했다.
애시르 신족이 절대 지상에 유출하지 않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황금사과요 다른 하나는 발할라의 전사 에인헤랴르다.
그리고 어느 쪽을 더욱 지상에 내주지 말아야 하느냐면 당연 후자다. 황금사과를 유출하지 않는 것은 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함이지만 에인헤랴르의 경우 천상의 안보 문제이므로.
“애당초 발두르께서 왜 세계수에 오르라 신탁을 내리셨겠습니까? 지금 아스가르드는 괴물 그리고 거인들과 전쟁 중이니 인간들이 돕길 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전시에 발할라에서도 가장 위대한 전사를 보내준다니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기사가 어찌 그리 고강한지는 몰라도 어쨌건 롤랑은 아닙니다.”
비카파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롤랑 아니라 칩시다. 그래서 뭐가 나아지겠소? 어제 그 광경은 나만 본 게 아니고 뒤늦게 온 귀족에다 자칭 모험가들도 다 같이 봤소. 다들 입이 떡 벌어져서 눈을 의심하더군. 소문은 벌써부터 짝 퍼졌소. 이제 다들 그 기사를 롤랑이라 믿을 거요.”
“사람들이 그 기사를 롤랑이라 믿으면 안 될 게 있습니까?”
“몰라서 묻소? 오스론 그 개자식이 데려왔으니 뭔가 날 족치려는 데 써먹으려는 거 아니겠나? 그런데 사람들이 다 그를 롤랑이라 믿는다면······ 천해빠진 은행가 따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전설의 기사를 앉히고 싶어 할 테지!”
비카파는 한숨 쉬고 말을 이었다.
“내 어제, 그 기사 주변에 괴물늑대들의 시체가 깔린 걸 본 순간······ 지친 걸 노리고 습격하지 않았던 게 너무나도 후회되오. 당시에는 너무 놀라 그런 생각도 못했지만······”
순간 주교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그때 그 망측한 생각을 떠올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십시오, 백작님. 잊으셨습니까? 신들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비카파는 신음했다.
“신들이······”
신들이 지켜보고 있다. 흔한 관용구지만 이곳 비프로스트에서 그 말은 격언이 아니라 담담한 사실의 토로다.
로키가 풀려났다. 그리고 천상 아스가르드는 괴물 그리고 거인들과 전쟁 중이다.
지금 천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훌륭한 전사가 필요하다. 그러니 쓸 만한 지상의 전사를 데려가기 위해 신들은 눈에 불을 켜고 이곳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그자가 롤랑이든 아니든 간에. 세계수에서 싸우고자 온 훌륭한 전사를 해친다면 신들께서 허허 웃으시겠습니까?”
“그럼 어찌 해야······”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오스론? 그 자가 뭘 어쩔 건데요? 놈은 그냥 병신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그때 백작께서 그 얼간이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날, 비프로스트에 있던 쟁쟁한 귀족들이 그 봉기를 정당하다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실제 정당했고요.”
십이 년 전 일이었다. 비프로스트 원정이 성공한 지 삼 년 지났을 때. 교황청에서는 성지 수복을 축하하며 주교를 이 땅에 파견했다. 비프로스트를 관리할 교구장으로서.
이 인사에 당시 비프로스트 공작이던 오스론은 격분했다.
‘나는 추기경이니 당연히 내가 이 땅의 교구장이다! 이 땅에서 헌금을 걷을 권리는 당연히 내 것인데 왜 다른 주교를 보내고 자빠졌나?’
하고 주장하며 오스론은 파견된 주교를 협박했다. 당장 꺼지지 않으면 거세해버리겠다고.
그럼에도 주교가 떠나기 싫어했기에 오스론은 협박을 실행에 옮기려 들었다. 주교는 뒤늦게 도망치려 했다. 그리고 오스론의 요구에 따라 비카파의 용병들이 주교를 붙잡았다.
비카파로서는 다행스럽게도.
당시 비카파는 투자한 돈이 회수되지 않아 파산하리라는 걱정에 전전긍긍하던 차였다.
파산하지 않을 방법은 오스론을 내쫓고 그 자리에 대신 앉는 것뿐이었지만 바로 그럴 수는 없었다. 원정 계약대로라면 그럴 수 있기는 했다. 원정 계약에서 내건 담보가 바로 이 땅이었다. 그리고 채권자가 채무자의 담보를 가져가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에는 이 땅에 성전을 벌이러 온 외국 귀족들의 눈이 두려웠다. 한낱 은행가가 추기경에게서 땅을 빼앗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그 와중에 거세당할 위기에 처한 주교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둘은 손을 잡았다. 그리하여 주교는 비카파를 대신하여 다른 귀족들을 설득했다. 비카파의 채권은 정당하며 계약대로 변제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채무자의 담보를 차지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라고.
그리고 비프로스트에 와있던 귀족들 또한 이 거만한 공작을 대단히 싫어하던 차였기에 주교의 주장을 인정했다.
그로써 비카파는 공작 성을 포위했고, 백작이 되었다.
이후로 주교는 십일조를, 비카파는 세금을 거둘 수 있어 행복했다. 정말이지 둘은 더없이 좋은 관계였다.
그러니 주교가 하는 말은 정말로 이 백작을 위한 것이었다.
“당신은 이 땅의 정당한 군주입니다. 정말로 롤랑이 부활하더라도 당신을 이 땅에서 내쫓을 수 없죠. 승천한 카를 대제가 돌아와 당신을 변신한 거인이라 선언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그럴 수 없어요.”
“그 롤랑이, 가짜든 아니든 롤랑으로서, 인기를 얻은 끝에 사람들을 이끌고 봉기하면? 오스론이 당한 것처럼 나도 당하지 않겠소?”
“롤랑이 봉기해 당신을 끌어내려요? 그건 찬탈입니다. 당신이 했던 건 권리행사고요. 당신은 신들께 주기적으로 공물을 바치고 있습니다. 찬탈 따위 신들께서 용서치 않아요. 정당하게 얻은 권좌, 정당하게 행사하십시오. 오스론에게 명분을 주지 마십시오. 봉기가 두렵다면 그러지 않도록 인망을 얻으십시오. 그놈의 롤랑은 내버려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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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역시 나를 내버리지 않는구나. 어제 네가 바친 전쟁은 감동스럽게 받아보았다. 내 낡아빠진 심장에 온기가 도로 차오르더랬지.’
오딘의 말씀에 롤랑은 경건하게 무릎을 꿇었다.
“주를 위해서라면 무엇을 못하오리까.”
오딘은 혀를 쭉 내민 채 웃었다.
‘믿는다. 말은 바람에 지나지 않으나 네 맹세만은 언제나 진실했으니. 지금도 너는 내 소원대로 세계수에 발을 디뎌주었다. 앞으로도 그래줄 터이냐? 이 늙고 몰락한 주인을 위해 저 끔찍한 나무를 계속 올라줄 것이냐?’
“마땅히 그리하겠나이다.”
‘말만으로도 이 어찌나 든든한지. 내게는 진실로 너뿐이로구나, 롤랑.’
롤랑은 감동에 벅차 물었다.
“계속 세계수를 올라, 어찌 하면 좋으리까? 이 미천한 종에게 분부를 내려주소서.”
‘나를 매단 가지를 찾아라. 나는 세계수 가지 어딘가에 매달려 있다. 어디에 있던 가지였는지는 잊었다. 그러니 네가 노력해 주어야 한다. 어떻게든 이 몰골을 찾아내어 구원해다오. 이 주름진 목을 옥죄는 밧줄이 너무나도 갑갑하구나.’
너무나도 안타까운 나머지 롤랑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갑자기 세계수에 바람이 불었다. 오딘을 매단 가지가 흔들리며 오딘 또한 힘없이 흔들렸다. 롤랑은 더욱 슬피 울었다.
오딘이 말했다.
‘그만, 울음을 그치도록 해라. 네 주인은 동정이 아니라 경외를 받길 원한다. 지금 이 꼴로는 어림도 없는 소리겠으나······’
오딘의 분부에 롤랑은 제 입에 손을 집어넣어 울음소리를 틀어막았다. 그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오딘이 계속 말했다.
‘이 신세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려면 내 나름대로 해줄 수 있는 것을 해주어야겠지. 네가 보낸 영혼들은 고맙게 받았노라. 그 영혼의 일부는 내가 차지했으나 나머지는 너를 위해 정련하여 룬을 빚어냈다. 어느 룬을 원하지?’
롤랑은 피투성이 주먹을 꺼내서는 애써 말했다.
“저는 바라는 게 없······”
‘부디 말하라. 네 주인을 위해서.’
롤랑은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떼었다.
“더 굳센 힘을······”
‘아, 흔한 룬을 원하는군. 기꺼이 주리라. 받아라. 네 주인의 선물이다.’
롤랑이 등을 내보였고 오딘은 거기에 룬을 새겨주었다. 그러는 사이 느낀 고통을 롤랑은 기꺼이 참아내었다.
마침내 룬이 새겨지자 오딘은 자신의 작품을 만족스레 바라보더니 이내 말했다.
‘네 충성에도 불구하고 이따위 것밖에 내주지 못하는 이 못난 주인을 용서하라. 그러나 지금뿐이리라. 내가 권좌를 되찾는 그날, 내 어찌 그 영광을 가장 훌륭한 대전사와 나누지 않고 독차지하겠느냐?’
“제 어찌······ 저는 그저······”
‘물론 너는 보상을 위해 봉사함이 아닐 터이나 그 선의를 이용한다면 의로운 주인이 아니겠지. 나는 마땅히 보답하리라. 내 궁니르에 맹세하노니, 네가 나를 찾아 이 속박을 풀어내는 그날, 네 어떤 바람이든 들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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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마당 - [1]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