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27화 (27/164)

< 일 층 - [3] >

늑대들은 저 붉은 놈이 무지하게 빠르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빠른 사냥감을 사냥할 때면 늘 그러하듯 주변을 빈틈없이 둘러싼 채 포위망을 형성했다.

그리고 추격.

광전사로서는 운신 폭이 좁아도 너무 좁았다. 덮쳐오는 것을 피할 공간조차 없었다. 빠르다 하여 늑대들의 주둥이를 벗어날 수는 없을 터였다.

늑대들이 사방에서 덮쳐왔다.

절체절명의 상황에 광전사는 지면을 굴렀다. 그리하여 한 놈의 배 밑에 달라붙은 다음 그 배를 찔렀다.

갈라진 배에서 내용물이 쏟아져 내렸다. 떨어지는 창자를 피해 광전사는 또 다시 굴렀다.

배에서 피를 쏟으며 늑대가 쓰러지는 가운데 다른 늑대가 앞발을 휘둘러왔다. 광전사는 양손으로 검을 휘둘러 맞상대했다.

손해 본 것은 당연히도 앞발. 발가락 사이가 완전히 찢어져 늑대는 꺼억 거렸다.

광전사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는 순간, 뒤에서 늑대가 덮쳐왔다. 놈은 광전사를 깔아뭉개고 그 위에 올라탔다.

광전사의 목덜미는 갑옷에 가려져있었다. 하지만 무슨 문제인가? 물어뜯기 좋은 머리통이 드러나 있는데.

늑대는 그 거대한 주둥이를 벌려 광전사의 머리를 깨물었다. 양 팔을 벌려 막아내며 광전사가 중얼거렸다.

“불이여어.”

발화 주문. 입속에 생겨난 화상은 본능적으로 견딜 수 없었다. 늑대는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바로 입을 벌려야 했다.

늑대가 버둥거렸다. 광전사는 누운 그대로 놈의 목구멍에다 칼을 쑤셔 넣었다가 빼냈다.

놈의 식도에 구멍이 뚫려 바람 소리가 났다.

숨 쉬기 버거워진 늑대가 쌕쌕 거리며 몸부림친 덕분에 광전사는 풀려날 수 있었다.

광전사가 일어서기 무섭게 다른 늑대들이 습격해 왔다.

주둥이를 벌리고 덮쳐오는 놈은 그저 그 콧잔등을 갈라버리면 되었다. 그러나 아예 돌진해 오는 놈들 상대로 그랬다가는 받힐 터였다.

광전사는 빠르게 칼질 한 뒤 다리에 힘을 주었다. 지면을 박차고 위로 높이 도약했다.

가공할 각력이었다. 광전사는 이 미터 넘게 치솟았다. 그러나 그 엄청난 높이는 괴물늑대들의 체장만 못했다.

늑대 몇몇이 두 발로 서서 앞발로 할퀴었다. 공중에 뜬 채 광전사는 칼을 휘둘러 맞상대했다.

난데없이 벌어진 공중난투에서 광전사는 한 놈의 발을 베어냈다. 그러나 그 몸이 붕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광전사는 저 멀리 나가떨어져 어느 늑대의 등 위를 굴렀다. 그 위로 다른 늑대들이 주둥이를 벌리고 덮쳐왔다.

한놈이 막 광전사의 어깨를 물기 일보직전, 늑대를 덮치는 야수가 있었다.

‘끼야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달려온 푸른 야수가 늑대를 껴안고는 놈과 함께 땅을 굴렀다. 늑대의 몸에 불이 옮겨붙었다.

늑대는 고통에 겨워 비명 질렀다.

불이 싫은 것일까. 늑대들이 슬그머니 뒤로 내빼던 와중이었다.

뒷걸음질 치던 늑대가 노란 번개줄기에 관통 당했다. 온몸의 털들이 삐죽삐죽 돋아나며 늑대가 절명했다.

번개의 근원은 발키리가 쥔 룬 창이었다.

뒤이어 쿵쾅쿵쾅 하고 땅이 흔들렸다. 늑대들은 털은 곤두세우고 그 방향에 주둥이를 향했다. 그리고 온몸의 털을 빳빳이 세우며 임전태세를 취했다.

세계수의 패자, 거인이 돌진해오고 있었다.

“우—트—가—르—트—!”

달려온 서리거인은 양 손에 움켜쥔 도끼를 늑대의 머리통에 내리찍었다.

뒤이어 일단의 무리가 당도했다. 소수이지만 어쩐지 위험할 것 같은 무리. 늑대들은 더욱 신중해질 필요를 느꼈다.

가장 거대한 우두머리 늑대가 울부짖었다. 그 포효를 신호로 늑대 군대는 대열을 구축하고, 적절한 거리를 벌리며 적들을 상대할 준비를 갖췄다.

제이슨이 고함질렀다.

“덩치! 앞으로 나가!”

서리거인이 한 발짝 앞으로 내딛었다. 그와 동시에 또 다른 늑대의 뇌수를 드러내고자 도끼를 휘둘렀다.

그 공격은 헛손질이 되었다. 도끼로 노린 늑대가 훌쩍 뛰어올라 저 멀리 벗어났기에. 그 틈을 노리고 두 마리 늑대가 달려들어 거인의 팔을 물고 늘어졌다.

“놔—라—!”

거인이 힘껏 몸을 흔들자 늑대 둘은 떨어져나갔다. 그리고 거인이 다시 도끼를 휘두르려 하자 둘은 미련 없이 벗어나버렸다.

이후로도 이런 식이었다. 일격이탈. 늑대들은 한 번 덮친 다음 바로 빠지는 식으로 축차 공격해왔다. 그렇게 놈들이 공격보다는 회피에 전념했기에 정확하기 그지없는 발키리의 번개조차 몇 발 빗나가버렸다.

전황을 바라보며 제이슨은 신음했다. 불안한 마음에 욕설을 지껄였다.

“모지 이 병신새끼는 뭐하는······”

그때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거인의 몸에 실바람이 휘감겼다.

그 순간 이상할 만치 빨라진 거인은 그 도끼의 사정권에서 벗어나려던 늑대를 순식간에 따라잡아 다리를 찍어버렸다.

뒤이어 흑기사와 발키리 두 소환물에게도 실바람이 휘감겼다. 심지어 흑기사 옆에 끼어 의미 없이 창질을 반복하던 알론소에게도.

늑대들은 이들의 가속에 쉬이 적응하지 못했다. 축차 공격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순식간에 다섯 마리가 당해버렸다.

‘가속 주문······ 모지 제 몫 하네.’

한편 저편에서는 야수적인 전투가 한창이었다.

끼야야아악, 끼야아아악 울어대면서 푸른 야수가 이리저리 날뛰었다.

야수의 몸에서 옮겨 붙은 불이 바닥에서 타닥거렸다. 늑대들은 저 불길의 야수를 어찌 상대해야 할지 몰랐다. 이내 포위망 안에 가둬두는 것만으로 만족하려는지 늑대들은 푸른 야수를 상대로 으르렁거리다가 야수가 돌진해오면 얼른 몸을 내뺄 뿐이었다.

여기까지면 늑대들이 일방적으로 거대한 괴물을 가지고 노는 셈일 뿐이리라. 그러나 야수적인 괴물은 푸른 야수 하나가 아니었다.

“와라아!”

늑대들이 푸른 야수를 피해 달아나려 들면 어김없이 광전사가 달려가 그 배를 갈라놓았다. 그 속도는 너무 빨라 어찌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늑대들이 착실히 쓰러져나가고 있었다. 그 거대한 몸뚱이들이 풀썩풀썩 쓰러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제이슨의 표정도 점차 밝아졌다.

‘의외로 어찌 되나?’

이쪽의 방어는 단단하고 광전사는 날뛰며 적들을 죽여대고 있다.

상당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이쪽에 피해를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곤혹스러운지 늑대들의 공세는 점점 움츠러들고 있었다.

‘슬슬 늑대 새끼들이 꺼져 줄지도······’

제이슨이 알기에 늑대는 손해 보는 것을 좋아하는 동물이 아니었다. 더 공격한들 재미없겠다 싶으면 알아서 물러날지도 모른다.

그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려던 와중이었다.

광전사의 눈에 어느 흰 늑대가 들어왔다. 다른 늑대들은 죄다 검었기에 그 늑대는 유난히 두드려졌다.

흰 늑대가 가장 거대한 늑대 옆에 있다는 사실은 광전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귀중한, 모피!”

지면을 박차고 광전사가 달려들었다.

마치 발사되듯이 달려 나간 그 속도에 거대한 늑대는 반응하지 못했다. 그 주둥이가 미처 벌려지기도 전에 광전사가 흰 늑대 앞에 당도했다.

거대한 늑대가 눈을 크게 뜬 순간, 흰 늑대의 주둥이 속에 칼이 쑤셔 박혔다.

흰 늑대는 부르르 떨면서 어떻게든 주둥이를 다물고자 했다. 그러나 광전사가 칼에 더욱 힘을 주어 아예 그 내부를 헤집어버렸다.

흰 늑대가 마구 비틀거리더니 그 다리에 힘이 풀렸다.

참으로 깔끔하게 죽였다.

멋진 모피를 상하지 않게 사냥했다는 사실이 광전사는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이 전리품을 얻게 해주신 주께 감사드렸다.

“이 영광을 오딘께 바친다!”

그리 외치면서 칼을 빼내고자 흰 늑대의 이마를 짓밟고 허리에 힘을 주었다. 흰 늑대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며 칼이 뽑혔다. 그것을 본 거대한 늑대의 눈이 뒤집혔다.

거대한 늑대는 늑대가 아니라 멧돼지처럼 달려들었다.

광전사는 왼발을 축으로 몸을 회전시켜 놈의 돌격을 흘려보냈다. 이내 거대한 늑대는 저 멀리까지 돌격했다가 뒤늦게야 원수를 들이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놈이 광전사를 보고 눈을 흘겼다.

거대한 늑대가 컹 하고 짖더니 이내 울부짖었다. 그들의 여사제가 죽었노라 알리고자.

‘아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그 순간 철수를 예상하고 주춤주춤 움직이고 있던 늑대들이 멈춰 섰다. 그리고 모두 천장을 향해 울부짖었다.

‘아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제이슨은 당황했다.

‘씹, 뭐냐?’

늑대들의 공세가 바뀌었다.

더 이상 늑대들은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 결과 푸른 야수가 표적이 되었다.

방금까지 푸른 야수의 몸에서 타오르는 불을 두려워하여 놈에게 다가가지 않으려 하던 늑대들은, 이내 그 불길을 몸으로 꺼버리겠다는 듯 달려들었다.

일곱 늑대가 동시에 푸른 야수를 물어뜯었다. 주둥이 안이 타들어감에도 불구하고 턱에 준 힘은 더욱 거세졌다.

푸른 야수는 몸을 뒤틀며 반항했다. 그 불타는 몸에 깔려 한 늑대가 타죽었으나 늑대들은 야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마침내 그 목덜미 안 뼈가 드러난 순간, 푸른 야수는 특유의 새된 비명을 지르며 소멸했다.

푸른 야수는 쉽게 죽지만 쉽게 소환할 수 있는 소환물이다. 사라졌다면 바로 소환하면 될 터였으나 제이슨은 그럴 수 없었다.

“씹할······ 개씹······”

강대한 소환물들이 이룬, 이 견고한 방어선이 위태로웠다.

늑대들이 육탄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펼치던 늑대다운 축차 공격이 아니라 물소 떼와 같은 일제 돌진이었다.

늑대들은 그저 몸으로 부딪쳐왔다. 공격이 성공하든 말든, 끝내 실패하여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그 크기가 크기였기에 놈들의 돌격 하나하나가 끔찍하게 육중했다. 그나마 주변에 죽어 널브러진 늑대들의 시체가 방벽이 되어주지 않았다면 이미 방어선은 뚫려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흡, 흡, 흡.

흑기사는 한 다리를 땅속에 쑤셔박은 채 늑대들의 충돌에 밀려나가지 않고자 애썼다. 그 뒤에서 지켜지고 있는 발키리, 그녀의 번개는 이제 빗나가려야 빗나갈 수 없게 되었다. 늑대들이 피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이 거인의 살점을 물어뜯는 데만 전념했기에.

늑대들의 거대한 주둥이가 불쑥불쑥 이쪽을 덮쳐왔다. 그때마다 알론소와 제이슨은 소스라쳤다.

제이슨은 공포를 잊고자 고함질렀다.

“모지? 뭐하냐!”

아까까지는 모지도 소소하게 활약하고 있었다. 회피하려던 늑대에게 사안(邪眼)으로 몸을 굳게 만들어 이어진 공격에 당하게 만든다든가. 화염구를 늑대들 한 가운데에 쏘아 놈들의 공세를 주춤하게 만든다든가.

그런데 지금은 주문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제이슨은 못 견디게 불안했다.

“뭐하고 있냐고!”

물론 모지는 보이지 않았다. 주문으로 투명해진 상태였으므로.

‘아니, 투명해져서 보이지 않는 게 맞나? 주변에 있기는 한 건가?’

도망친 것인가?

제이슨은 불안감과 배신감에 미쳐 자신도 뭐라 하는지 모를 욕설로 울부짖었다.

그때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정해, 제이슨. 푸른 야수 죽었더라. 다시 소환해.”

모지의 목소리였다. 제이슨의 가슴에 안도와 분노가 동시에 치솟았다.

“뭐하다 자빠져서 이제야 대답하냐!”

“롤랑한테 가속 다시 걸어주고 왔어. 슬슬 주문 효과 끊어질 것 같아서. 말은 나중에. 얼른 푸른 야수부터 불러.”

그 말에 제이슨은 흥분한 와중에도 입을 다물었다. 저놈이 지금 뭐라고 했나? 롤랑에게 갔다 왔다고?

저 격전지 한 가운데로?

옆에 있던 푸른 야수마저 죽었기에 광전사는 저편에서 외로운 난투를 벌이고 있었다.

늑대들은 그저 압도적인 질량을 무기 삼아 광전사를 들이받으려 했다. 광전사가 아무리 재주 좋은들 지금은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그 몸놀림이 엄청나게 빠른 덕에 어찌어찌 늑대들의 돌격을 피해내고 있었지만, 주문의 효력이 끊겨 둔해진다면 바로 당해버릴 터였다. 그러니까 주문을 다시 걸어준 것은 나무랄 데 없는 판단이었으나 제이슨은 당혹했다.

저 괴물들 한복판에 걸어갔다 돌아왔다니.

본디 게임 메디아에서 소환사는 활이나 칼 따위로 소환물들과 함께 싸우기 마련이다. 그러나 제이슨은 그러지 못했다. 눈앞에서 광분하고 있는 저 거대한 늑대들을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저번 신전에서의 습격 당시에도 그랬다. 소환물들을 내보낸 채 제이슨은 회랑으로 통하는 문 뒤에서 푸른 야수가 소멸하면 다시 불러내는 작업에만 전념했었다.

“씹······”

제이슨은 누구를 향해야 할지 모를 욕설, 아마도 이 상황 혹은 자기 자신을 향해야 할 욕설을 애써 입속에 담아둔 채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이윽고 지면에 불길이 치솟더니 푸른 야수가 나타나 이쪽 방어에 가세했다.

< 일 층 - [3]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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