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25화 (25/164)

< 일 층 - [1] >

다음 날 아침, 저택에 일단의 무리가 찾아왔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귀하신 분들, 비프로스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문 밖에 나간 오스론이 물었다.

“뭔가?”

“저희는 백작님의 명을 받아 온 안내인입니다. 세계수가 어떤 곳인지 간단히 보여드리는 것이 임무입죠. 메디아에서 오신 분들 모두에게 지금 연락을 보냈습니다. 곧 모두 모여 세계수를 안내받을 예정인데 함께하시겠습니까?”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고 오스론이 대답했다.

“그래. 어디로 가면 되나?”

“집결장소는 광장 앞입니다. 그 전에 간단히 무장하는 걸 권합니다. 초입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세계수거든요.”

그 말대로 롤랑은 갑옷과 검을 차려입고서 저택을 나섰다. 그리하여 앞서 예상한 것보다도 빨리 세계수에 향하게 되었다.

곧이어 기다리고 있던 메디아 귀족들과 합류한 뒤 어느 갈색 언덕을 향해 전진했다.

언덕은 산맥처럼 돋아난 세계수의 뿌리였다. 듣기로 저기 뚫린 구멍이 세계수의 입구라 했다.

뿌리에 가까워질수록 망루, 초소, 목책 등 방어시설이 즐비했다. 높다란 성벽까지 언덕을 빙 둘러싸 있었다.

“세계수에서 튀어나온 괴물······ 최악의 경우 거인을 막기 위한 것이죠.”

안내인이 그리 말했으나 사람들은 그 말을 반만 믿었다. 왜냐하면 망루 위 초병들의 경계 방향이 도시를 향해 있었으니까.

‘무단 침입자들을 막으려고?’

어쨌건 계속 나아간바 세계수의 뿌리 앞에 이르렀다. 뿌리는 시야에 다 담기지 않는 크기였고 그래서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갈색 각질뿐이었다.

“저 위에 있는 것이 입구입니다.”

모두 고개를 들어 안내인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세계수의 뿌리 한 가운데에 구멍이 크게 뚫려있었다. 구멍이 높이 위치했기에 그곳에 오를 수 있도록 사다리가 놓여있었다.

말을 타고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하마(下馬)해야 하나?”

그 멍청한 질문에 안내인은 친절하게도 대답해주었다. 그 누군가가 매우 귀족적인 늙은 기사였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러셔야 할 것 같군요. 말은 저기 초병에게 말해 맡아두게 하겠습니다.”

“지금 말 걱정하는 게 아니고 말이야. 계단이라도 좀 두면 오죽 좋았겠나? 사냥할 때 말이 있고 없고는 천지차이 아닌가.”

“사냥이라고 하셨습니까?”

“아, 난 여기에 영혼의 지위향상을 위한 성전을 하러 온 게 아니라 사냥하러 온 거네. 괴물 사냥 말이야. 하피니 나무늑대니 하는 놈들. 내가 어지간히 사냥을 좋아해야지. 슬슬 내 공원에 사슴과 멧돼지가 전멸한 참이거든.”

“외람되게도 감히 말씀드리자면, 나리. 기대하시는 바와 같이 이루어지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뢰옵기 대단히 죄송하오나 하피를 죽이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무늑대의 경우에는······ 작년에 딱 다섯 마리 죽었고 그마저도 한 마리는 새끼였습니다.”

“뭐 네 마리는 어찌 잡았나 보군.”

“나머지는 굶어죽은 걸 발견했을 뿐입니다. 나무늑대를 상대로 사냥 활과 사냥개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뭘 말하려는 알겠지만 괜찮네. 난 원래부터 활이 아니라 창으로 짐승 죽이는 걸 잘 했어. 그리고 하피를 죽이지 말라고? 유념해두겠네. 그러니 자네도 이 늙은 기사 알론소가 계단 좀 놓이면 좋겠노라 말한 걸 유념해두고 나중에 생각나면 책임자에게 전해 주시게.”

안내인은 문득 멈춰 섰다. 그리고 알론소를 향해 대단히 죄송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정중하게 말씀해주셨음에도 반박하는 무례를 미리 사과드립니다, 나리. 하지만 무턱대고 알겠노라 대답드릴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인가?”

“말씀드렸다시피 직접 보시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론소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안내인의 말에 따라 말을 초병에게 넘긴 후 앞장서서 세계수 구멍으로 통하는 사다리에 올랐다.

롤랑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뒤따라 사다리를 탔다. 그리고 입구에 들어가 세계수 안에 발을 디뎠다.

그 순간 느껴지는 감동은 없었다.

“당장 느끼기엔 평범한 동굴 같은데.”

누군가가 중얼거리자 안내인이 말을 받았다.

“입구니까요. 더 들어가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 말이 옳았다. 긴 터널처럼 이어진 내부를 계속 걷자니 경관이 점차 달라졌다. 벽에 웬 혈관 같은 것이 돋아나 있는 것마저 볼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리 깊숙이 들어왔으면 어두워질 만도 한데?”

“모르셨습니까? 세계수 안은 언제나 밝습니다. 그래서 저런 것도 보이지요.”

안내인이 가리킨 방향을 모두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해골 무더기에 몇몇의 몸이 굳었다.

구석에 굴러다니는 두개골만 해도 산더미였고 죄다 두부 한 가운데가 깨져있었다.

안내인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떠올랐다.

알론소는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저 기분 나쁜 문장은 또 뭐고······ 해골들은 왜 치우지 않고 쌓아두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지요.”

“유해를 가지고? 망자를 존중해야 할 거 아닌가.”

“걱정 마십시오. 무단 침입자들의 유해만 저리 내버려두니까요. 자세히는 가면서 설명하겠습니다.”

일행은 주눅 든 채 터널을 걸었다. 걷는 도중 안내인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세계수에 들일 사람을 엄선하는 것은 타당한 조치입니다. 어중이떠중이 다 들여보내서는 안 되지요. 타당한 이유가 있어요. 세계수 안의 괴물들에게 먹이를 줘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걷는 와중에도 해골 무더기는 여기저기 수두룩하게 보였다.

“맨 처음 세계수에 들어섰을 때 보인 것은 당연히도 들끓는 괴수였습니다. 비프로스트 백작께서는 놈들의 개체수를 줄이는 것이 급선무라 판단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놈들의 생태를 혼란시키고자 세계수 안의 식물들과 초식 괴물들의 근절에 나섰는데, 이때 화포(火砲)까지 동원해야 했지요.”

“짐승을 상대로 포를 썼다고?”

“물론 포야 공성전에나 쓰일 무기겠습니다만 포탄 정도가 아니면 아예 씨알도 먹히지 않는 괴물들이 많았는지라. 극단적인 경우는 괴물 하나 상대로 포 열 문쯤 동원해야 했습니다. 나무코끼리가 그랬지요. 가죽이 워낙 두꺼워 쇠뇌도 통하지 않는 괴수였습니다. 놈들을 소탕하는 것은 사냥이 아니라 전쟁을 방불케 했지요······.

그 고생 끝에 초식 괴물 대부분을 없애는 데 성공한 바, 이곳 세계수 최하층은 이처럼 한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실망하실 건 없어요. 그보다 훨씬 위험한 육식 괴물들이 아직 널려있으니. 예를 들어 아까 말씀 드린 나무늑대가 그렇습니다. 백작께서 놈들 목에 현상금까지 달아두셨는데 여지껏 열 마리도 채 죽지 않았지요. 지금 보이는 이 유해들 절반이 놈들 작품이에요.”

문득 안내인이 걸음을 멈추고 어느 해골 무더기를 가리켰다. 알론소가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유해 위, 벽에 새겨진 크고 시뻘건 문장을 보십시오.”

모두 그 말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늑대의 주둥이에 빨려 들어간 당신

마주칠 것은 오로지 헬뿐임을 명심하라.

적어도 발키리는 아니리라.

발할라는 늑대 배설물 따위가 필요치 않을 테니.

안내인이 설명했다.

“늑대에게 작작 잡아먹히라고 적어둔 겁니다. 기껏 초식 괴물들을 근절했는데 아직까지도 그 괴물늑대들이 남아있는 게 다 무단 침입자들 탓이거든요. 세계수에서 죽기만 하면 발할라에 갈 수 있다 믿고 침입해 몸소 인육을 공급해주니까 집채만 한 늑대들이 도무지 굶어죽질 않습니다.”

통로를 계속 걸으니 갑자기 빛이 환해졌다. 그리고 도무지 나무 안에 있을 법하지 않은, 거의 운동장이라 해야 할 공동이 드러났다.

공동 한 가운데를 향해 안내인이 손가락질했다.

“저기 보세요. 나무늑대들, 저렇게 아직도 많습니다. 그리고 저런 무단 침입자들도요.”

롤랑도 공동을 바라보고는 등골이 얼어붙었다.

공동 한 가운데 뚫린 구덩이에 웬 다섯 명이 갇혀있었다. 함정에 빠진 것일까? 일단 살아있기는 했으나 전혀 다행으로 보이지 않았다.

구덩이 주변에 웬 거대한 늑대들이 자리 잡은 채였기에.

개과라는 것이 실감되지 않을 만치 거대한 늑대들. 한 마리 한 마리가 호랑이쯤은 우습게 물어죽일 크기였다.

안내인이 문득 알론소에게 시선을 향했다.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어떻습니까? 아직 저놈들이 좋은 사냥감으로 보입니까?”

알론소가 떨리는 목소리로 뭐라 답하기에 앞서 롤랑이 말했다.

“잠깐, 저기 함정에 빠진 자들은 무단 침입자가 아니다.”

“그럴 리가요? 거적때기 입은 것이 딱 보기에도 무단 침입자인데요? 세계수에 들어왔으면서 저따위로 입은 꼴이 딱 얼른 죽어 발할라로 꺼지고 싶은 족속 아닙니까?”

그 말에 롤랑은 고함질렀다.

“모르면서 함부로 입 놀리지 말라. 저들은 내 기사된 권위로 입장을 허가받은 자들이니까!”

구덩이에 빠진 것은 나병환자들이었다. 오늘 무작정 세계수에 돌격한 끝에 저리 된 것일까.

안내인은 혀를 찼다.

“음, 그렇습니까? 멋모르고 입 놀려 죄송합니다. 아무튼 안 됐군요. 혹시 뼈라도 수습할 수 있다면 나중에 잘 묻어줄 것을 약속드립니다.”

롤랑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구하지 않을 건가?”

“어떻게 말입니까? 죄송하지만 여기 있는 인원이 전부 제 부하라 할지라도 저 괴물들을 상대로 구원에 나서지는 않을 겁니다. 하물며 지금 계신 분들은 저 따위가 어찌 명령할 수 없는 귀하신 분들인데요.”

“그래, 네 말이 타당하군.”

입을 놀리면서 롤랑은 게임 속 정보를 떠올렸다.

‘나무늑대. 8레벨 괴물. 적당히 강한 주제에 동료를 불러 무더기로 공격해오기에 유저들의 주요 사망원인 중 하나였다. 하지만 별 다른 특수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근접공격 외에는 할 수 없기에 최고레벨에 도달한 유저라면 별 어렵지 않게 나무늑대 무리를 홀로 해치울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결론 내렸다.

‘이길 수 있다······.’

안내인은 매우 죄송한 듯 사과하려 했다.

“아무튼 유감입니······”

롤랑이 도중에 말을 잘랐다.

“그렇다면 구출은 우리끼리 나서야겠군.”

그리고 모지와 제이슨에게 눈짓했다. 어제 한 의논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가자.’

제이슨은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모지는 멍하니 서서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두려울 터였다. 지금 롤랑처럼.

그러나 모지 또한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롤랑이 칼을 뽑았다. 큰 목소리로 고함지르며.

“뜻 있는 자들은!

안내인이 눈을 부릅떴다. 저놈이 지금 뭐하는 건가?

“솟아난 의분에 몸을 맡겨라!”

그리고 모지가 입술을 달싹여 주문을 걸어주었다. 롤랑의 몸에 실바람이 휘감겼다. 가속 주문.

이내 롤랑이 돌격했다. 주문에 힘입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 일 층 - [1]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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