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프로스트 - [4] >
시내에 들어온 후, 아말릭과 병자들은 허리를 깊이 숙여 절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롤랑 경······ 정말이지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요? 반드시 발할라에서 뵐 수 있기를 빌 뿐입니다.”
하고 말하더니 아말릭은 동료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제 저들은 무얼 할 것인가? 이대로 세계수에 돌격해 발할라의 영으로 화할 생각일까? 아니면 바로 죽기는 무서운 나머지 골목길 어딘가에 처박힐지도 모른다.
롤랑은 그저 착잡하게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오스론이 말을 걸어왔다.
“롤랑 경, 정말이지 드릴 말씀이 없군요. 정말 죄송했습니다. 제멋대로 날뛴 바람에 수고스럽게 만들어서요. 그래도 그 무용이 정말 대단하지 않았느냐, 앤지?”
그 말에 조그만 꼬마가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추기경님. 롤랑님이 정말 멋있었어요.”
“저런 기사를 모시게 된 것을 너는 평생의 영광으로 여겨야 한다, 앤지.”
“예, 추기경님.”
신전에서의 그 꼬마 수도사 앤지였다. 신전에서 롤랑을 보필하랍시고 녀석을 보낸 바였다.
앤지는 장차 롤랑의 종자가 될 예정이었다.아직은 갑옷 손질법도 모르는즉 종자로 들이는 것은 관련 교육을 받고 나서의 일이겠지마는.
‘내 몸 간수하기도 벅찬 마당에 애까지 붙다니.’
썩 달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앤지를 내치지 않은 이유는 나름 정치적이었다. 위대하신 롤랑 경이 수도사를 종자로 들이는 것은 신전 입장에서 큰 은혜이므로.
당시 롤랑은 신전에 빚을 지워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역시 잘한 짓이었는지 모르겠어······.’
오스론이 말했다.
“이제 앞으로 지낼 숙소에 가지요. 나름 괜찮은 저택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비카파 그 돈놀이꾼이 그래도 여기 제 별장은 자기 것이라 우기지 않더군요. 발할라에 비하면 물론 누추할 터입니다마는 그래도 몸 누이기에는 괜찮은 곳이리라 자부합니다.”
그리하여 롤랑을 비롯한 영웅들, 그리고 앤지는 오스론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별장의 호화스러움에 위축되었다.
롤랑은 궁전이라 해도 믿을 건물을 질린 채 바라보았다.
‘이 새끼 빚 때문에 쫓겨났다면서 뭔 놈의 별장이?’
오스론이 재촉했다.
“드시지요. 미리 사절을 보내 명령한바 청소는 이미 끝났을 겁니다.”
별장에 들어가 보니 내부 또한 호화스럽기 그지없었다. 상아 장식, 거대한 짐승 양탄자, 번쩍거리는 가구 등등.
각자 방 하나씩 받고 짐을 풀었다. 오스론이 물어왔다.
“지낼 만하겠습니까?”
롤랑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발할라 아닌가 싶을 정도로구려.”
오스론은 만족스레 웃었다.
“그거 참 다행입니다그려. 그렇담 편히 쉬고 계십시오. 전 잠시 일이 있어 자리를 비울까 합니다. 모쪼록 다른 두 영웅 분들과 여독을 푸시기를.”
그리고 오스론은 앤지를 데리고 저택을 나섰다.
잠시 후 롤랑의 방에 나머지 두 영웅이 들어왔다. 제이슨은 방을 두리번거리더니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내 방도 나쁘진 않긴 한데 씹할, 왜 네 방과 비교하니 안방과 다락방 정도의 차이가 있는 거냐? 저 침대 크기 봐라 저거. 저게 바로 말로만 듣던 킹 사이즈인가?”
롤랑이 혀를 찼다.
“나 혼자 잘 건데 침대가 커서 뭐해?”
“너 혼자 VIP 대우 받는 것 자체가 서러워 죽겠다 이거지. 쭉 그래, 쭉! 죄다 롤랑 경 롤랑 경 아부하느라 입이 닳겠던데 아주.”
“부러우면 네가 롤랑 하던가. 나 아까 추기경이 ‘여기 비프로스트 변경백 납셨다!’ 어쩌고 할 때 진짜 미치는 줄 알았거든? 날 가지고 수작질 하려나본데 앞으로 어찌 대응해야 하나 몰라.”
문득 모지가 말했다.
“그래도 그때 반응은 좋았지.”
“뭐 롤랑 경은 인기 있는 영웅이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네 행동거지 덕도 컸던 것 같던데. 자신만만하게 용병을 압도하는 것이 내 보기에도 퍽 근사하더라고. 진짜 용맹한 기사 같더라.”
제이슨도 긍정했다.
“뭐 이 새끼 그때 진국이긴 하더라고. 말투부터가 아주 생생해. 카를 새끼 어색하게 위엄 부리는 거랑은 격이 달라.”
롤랑은 그저 웃었다.
“내가 그 연기 하려고 이계까지 와서 죽어라 책 읽고 수업 들었던 거지.”
아무튼 간에 남이 보기에도 반응이 좋았다면 다행이다. 롤랑은 앞으로도 그래야 할 테니까.
귀족 기사로서 적당히 거만하게, 대담무쌍한 기사로서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만만하게 굴어야 할 터였다. 롤랑은 사전배경이 확고한 인물인즉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나만 그래서 되는 게 아니지.’
문득 든 생각에 롤랑이 말했다.
“앞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굴어야 한다고 생각해.”
“‘이렇게’가 뭔데?”
“과장스러울 정도로 영웅답게.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당당하게. 마침 딱 좋은 예가 있네. 제이슨처럼 말이야.”
“나?”
“그래, 이놈 정도로 미친놈이어야 영웅다워 보일 거야.”
“그거 힘들겠네.”
문득 모지가 중얼거렸고 제이슨이 즉시 눈을 부릅떴다. 모지가 시선을 피하는 차 롤랑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우리의 대외적 행동방침을 정하자고.”
“대외적 행동방침?”
“그래, 아까처럼 돌발 상황에 즉석해서 행동해야 할 경우······ 아까야 내게만 해당된 사건이었지만, 앞으로는 우리 셋이서 함께 맞닥뜨릴 상황이 더 많을 거 아냐? 그런 상황마다 셋이서 의견조율하고 행동할 수는 없잖아.”
모지가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감은 잡히는데 정확히 이해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예라도 좀 들어볼래?”
롤랑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웬 오만한 귀족이 농부 소녀를 괴롭히고 있다고 쳐. 그 귀족은 대충 영주 아들이니 뭐니 뭐 그런 뒷배 있는 놈이라 치자고. 자, 그 상황에 마주쳤어. 어떡한다? 제이슨? 어쩔래?”
“귀족 새끼는 패고 여자애를 강······”
롤랑은 재빨리 질문을 돌렸다.
“모지 넌?”
“모르겠는데. 뭐 일단 판타지 소설에서 흔한 상황이네. 클리셰대로라면 주인공이 귀족을 혼쭐내고 소녀를 구출하는 거지? 그래서 어쩔 거냐면······ 못 본 척할 거 같네.”
“왜?”
“일진이 왕따 괴롭히는 거랑 비슷한 상황이잖아. 귀족은 뒷배가 있을 테고 소녀는 그 영향권 아래 자기 생활이 있을 텐데. 제3자가 함부로 나섰다가 상황을 악화시키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동감이야. 나도 못 본 척할 거 같네. 하지만 말이지, 셋이서 그런 상황에 맞닥뜨렸다면 우리는······ 제이슨 의견에 가깝게 행동해야 할 걸.”
제이슨이 웃었다.
“여자애를 강간한다고?”
“귀족을 조진다고, 마······ 흔해빠졌고 현실성까지 없는 클리셰대로. 하지만 흔한 전개에는 흔한 전개 나름의 가치가 있는 법이지?”
“애초에 매력적인 전개라서 그리 자주 나오는 거니까.”
“그래. 우리는 합리성을 포기하고서라도 매력적이어야 해. 현실적인 선택은 순문학 등장인물의 몫이지. 하지만 우리가 보여야 할 건 영웅전기거든.”
“왜냐하면 영웅이니까?”
“그래, 우린 영웅답게 굴어야 해. 그러니까 지금 정해두자고. 우리 셋이서 의견조율 따위 할 수 없는 돌발 상황에 맞닥뜨리면, 우리는 이 상황에 어찌 굴어야 합리적일까 따윌 생각해선 안 돼. 우리가 생각해야 할 건 그것이 얼마나 영웅적인가야.”
그리고 어찌 굴어야 영웅적일지는 그 자리에서 즉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이 아닌 감성 및 말초신경에 판단을 맡기면 될 테니까.
롤랑이 말했다.
“내가 무슨 말 하고픈지 다 알아들었지?”
모지가 대답했다.
“대강은. 하지만 정말 뭔 상황이든 일단 돌진하고 보자고? 그건 좀 아니지 않아?”
“무조건까진 아니고. 행동에 앞서 서로 눈짓이라도 해서 할까 말까 확인은 해야겠지. 하지만 어지간한 상황이면 저지르자는 방향으로 결정하자고.”
“영웅적으로?”
“그래.”
잠시 침묵하고 있었던 제이슨이 웃었다.
“그러자고. 맘에 든다.”
“넌 성격대로 굴면 될 테니까?”
“뭐 그런 것도 있고.”
그 자신이 행동방침의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 맘에 든 것일까? 제이슨은 정말로 의기양양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롤랑은 생각했다.
역시 저놈 생각은 이해할 수가 없다고. 심지어 머리가 나빠 보이기까지 하다고.
그러나 신전에서 증명되었다. 제이슨은 대체로 옳았다.
그리고 옳다면 본받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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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프로스트 -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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