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23화 (23/164)

< 비프로스트 - [3] >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비카파는 잠시 후에야 겨우 입술을 떼고는 롤랑에게 물었다.

“그래서······ 본인께서도 그리 자처하시려오? 비프로스트의 변경백이신 롤랑 경?”

다행히도 롤랑은 당황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오스론이 롤랑을 내세우고 싶어 하리라는 것은 일찍이 예상한 바였기에.

‘저 개새끼.’

“달리 고할 이름은 없군. 내가 바로 기사 롤랑인즉.”

“흠, 그러신가.”

비카파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분노했다기보다는 어이가 없고 짜증이 나는 것 같았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수백 년 전 기사를 자처하는 남자라니. 사칭도 그냥 사칭이 아니라 숫제 조롱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리라.

비카파는 굳이 조롱을 참아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용병 부대를 향해 외쳤다.

“여봐라, 여기 이름을 숨긴 신비기사께서 실력을 뽐내고 싶다 하시는구나! 어울려 드려라!”

그 명을 받들어 웬 거구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다른 용병들보다 머리 하나가 크고 목 굵기는 그 머리통 못지않은 남자였다. 얼굴에 덥수룩한 수염은 그 길쭉한 흉터를 다 가리지 못했다. 거리에서 만났다가는 무심결에 길을 비켜줘야 할 것 같은 외관.

비카파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심심하신 듯하니 이 친구 이기고 나서 입성하시구려. 롤랑 경이라면 간단한 일이겠지?”

“바란다면야.”

롤랑은 기죽은 모습을 내비치지 않고자 애썼다.

오합지졸 군대 모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구경하고자 야영지에 있던 어중이떠중이까지 몰려온 마당이었다.

‘절대 나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자신 앞에 다가온 거구의 용병을 보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조금이라도 못난 모습을 보였다가는 끝장이라고.

‘나는 롤랑이다. 그러니 침도 삼켜서는 안 된다. 전설적인 기사가 단순 덩치 큰 용병에게 위축되다니 말도 안 된다. 당연한 일이다······.’

사실이 그러했으므로 롤랑은 상대에게 오만한 시선을 보냈다.

이윽고 롤랑과 용병에게 무기가 대령되었다.

둘에게 주어진 것은 끝을 붕대로 감싼 봉이었다. 난처했다.

‘나 장검 숙련인데, 목검을 달라고 해야하나? 하지만 무기를 가리는 모습은 영웅답지 않게 치졸해 보일 텐데.’

문득 상대를 보니 놈은 이쪽에 똑바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눈매만 해도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방심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그래줄 것 같지 않은 모양새였다. 생각해 보면 이쪽도 저쪽 못지않은 거구인데 대충 싸워줄 리가 없다.

“시작하시려오, 신비기사 나리?”

상대 용병이 물어왔고 롤랑은 오만하게 대답했다.

“잠시.”

그러고는 주어진 봉에다 손날을 내리쳐 부러뜨렸다.

빠각 하고 부러진 봉의 짧은 부분을 손에 쥐었다. 날도 없고 자루도 없지만 일단은 간이 목검이 될 터였다.

“준비되었다.”

“그럼 살살 합시다.”

용병이 자세를 취했고 롤랑은 검례를 취했다. 봉 끝이 위를 향하게 들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먼저 공격에 나선 것은 용병이었다.

놈이 봉을 비스듬하게 아래로 찔러왔다. 그러나 무릎을 노리는 척 배를 공격해올 것이다.

롤랑은 알 수 있다.

롤랑은 짧은 봉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리고 예상했듯 궤도를 변경해 배를 향해 찔러 온 상대의 봉. 그 봉 끝이 롤랑의 봉 끝과 정확하게 맞부딪쳤다. 손으로 전해진 진동에 용병은 눈을 크게 떴다.

너무 완벽하게 막혀버렸다.

용병이 이를 악무는 차 롤랑이 터벅터벅 앞으로 걸었다.

용병은 신속하게도 봉을 당겼다 내뻗어 이쪽 얼굴을 찔러왔다. 롤랑은 슬쩍 고개를 흔들어 봉을 흘린 다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계속 걸었다.

둘의 간격은 불과 네 걸음.

용병이 최후의 발악으로 봉을 옆으로 거세게 휘둘렀다. 롤랑은 계속 걸으며 자기 봉을 아래에서 위로 슬쩍 흔들었다.

다음 순간 용병의 봉은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 땅을 구르고 있었다.

기겁한 용병은 자기 무기를 찾아 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슴을 콕 찌르는 감촉을 느끼고는 다시 전방을 바라보았다.

봉을 이쪽 가슴에 대고 있는 롤랑이 보였다.

용병은 이내 봉을 줍더니 우울하게 말했다.

“졌습니다.”

롤랑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다.”

다행히, 그러나 당연히 압도적으로 이겼다.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만치 여유로운 결착이었다.

이윽고 우렛소리 같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롤랑 경 만세!”

“만세!”

만세함성이 그쳐갈 즈음 비카파가 읊조렸다.

“다들 잘 봤나? 이렇게 할 수 있으면 통과시켜주는 거다.”

그쳐가던 함성이 아예 뚝 멎었다. 저런 흉내라니.

비카파는 원정대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롤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짜고 친들 그렇게 가지고 놀지는 못할 텐데, 아주 끝내주시는군그래. 그래서 진짜배기 기사 분? 존함이 어찌 되시오?”

롤랑은 아주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대답했다.

“말했지 않은가? 헥토르의 자손, 기사 롤랑이라고."

비카파는 다시금 인상을 구겼다.

“희롱은 상대 가려가며 하지 그러오? 당신이 놀려먹는 남자가 여기 영주라는 걸 기억하시지. 그 기분 망쳤다가는 이겼든 말든 영주로서의 정당한 권한으로 통과시키지 않을 수 있거든.”

“무슨 상관인가? 당신이 어디를 지배하건 내 신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 진짜 너무하는군.”

비카파는 골 아픈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한탄하듯 말했다.

“일단 기사 대우 해드리리다. 열 명의 수행원을 도시에 들이도록 허가하겠소. 기사 이상의 지위라면 나중에 정식으로 보고하든가 말든가 하시구려.”

물론 롤랑은 따로 데려갈 사람이 없었다. 홀로 들어가겠노라고 대답하려는 차, 갑자기 왼팔에 꺼끌꺼끌한 감촉이 느껴졌다.

롤랑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웬 나병환자가 외쳤다.

“저흴 데려가줘요, 경!”

동료의 추태에 아말릭은 눈을 감아버렸다.

‘맙소사. 친절하게 굴었더니 마침내 귀찮아지는구나 하고 짜증낼 판 아닌가.’

자칫하면 불통이 튈 법도 하다. 그러나 아말릭이 눈을 떠보니 의외로 롤랑은 담담한 기색이었다.

롤랑이 말했다.

“그럼 여기 이 친구들 데려가리다. 가능하겠지?”

비카파는 롤랑이 가리킨 나병환자들을 흘긋 보더니 코웃음 쳤다.

“문둥이 다섯?”

“안 되나?”

“뜻대로 하시구려.”

롤랑은 병자들을 향해 손짓했다.

“갑시다.”

용병들이 비켜섰고 롤랑은 보무당당히 앞질러 걸어갔다. 병자 다섯은 그 뒤를 불안하게 따랐다.

그 틈에 웬 남자가 섞여 들여가려다 용병들에게 걷어차여 억 하고 자빠졌다.

곧이어 오스론 추기경을 비롯해 남아있던 나머지 귀족들도 관문을 통과했다. 이제야말로 부랑자에 농투성이만 남았다.

이제 용병들은 거리낄 게 없을 터였다. 쇠뇌를 마구 쏴 갈겨도 무방하게 되었으니.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겨진 사람들은 아우성쳤다.

“비켜라, 돈놀이꾼 주제에!”

“신이 두렵지도 않느냐!”

울려 퍼지는 욕설과 저주들.

그 중 누군가의 말이 비카파의 귀에 들렸다.

“문둥이도 들여보내주면서 왜 우린 안 보내주냐!”

그리고 비카파는 비웃었다.

“당신들이 세계수에 들어가면 거인과 괴수들의 한 끼 식사가 될 뿐이지. 그러나 문둥이는 놈들한테 나병을 옮겨줄 거 아닌가.”

*******

< 비프로스트 - [3]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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