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프로스트 - [1] >
십오 년 전, 오스론 추기경은 비프로스트 원정사령관에 자원했다.
공작위는 직함뿐이요 변변한 사업체도 없던 오스론에게 영지란 꿈에도 그리던 것이었다. 그리고 영지를 얻는 데 대규모 원정만한 기회는 달리 없다.
동생인 오스 왕의 지지 하에 사령관이 된 오스론은 있는 힘을 다해 원정을 준비했다. 그리고 곧바로 난관에 부딪쳤다. 병력, 자금 모든 것이 부족했다.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후원자들을 끌어 모았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럭저럭 후원금이 모였지만 원정 준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거인이 들끓는 외지, 세계수의 땅 비프로스트가 원정지라면 더욱.
어쩔 수 없이 외국까지 손을 뻗쳐 강대한 후원자를 모셔 와야 했다. 그리하여 세계적인 은행가이자 용병대장으로 악명 높은 비카파가 초빙되었다.
원정자금 육 할과 정예병력 오천을 내놓는 대가로 비카파는 원정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지휘관직 외에도 작위, 이자, 광산 채굴권 등 잡다한 것을 많이 받기로 했지만 비카파에게도 이 지출은 사활을 건 도박이었으리라. 여러 가지 저당 잡힌 것이 많은 오스론 역시.
실패하면 자결뿐이라는 심경으로 두 지휘관은 비프로스트에 향했다.
이후로 흉포한 괴물들, 그리고 그보다 수배쯤 위험한 거인들과 사투를 벌이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끝내 원정대가 승리한 순간, 점령된 비프로스트는 공작령이 되었고 오스론은 비프로스트공이 되었다.
오스론에게도, 메디아에게도 다시없을 경사랄 만했다. 순식간에 메디아의 영토가 반 이상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비프로스트를 개척하기 위한 자금마저 비카파에게서 빌려야 했기 때문에. 그리고 오스론은 물론 메디아조차 그 빚을 상환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삼 년이 지나 원금은커녕 이자도 받지 못하리라 판단한 비카파는 자신의 용병들에게 공작성(城)을 포위하라 지시했다. 오래지 않아 오스론은 성에서는 물론 비프로스트에서마저 쫓겨나버렸다.
주인 잃은 성을 차지한 비카파는 자신을 비프로스트 백작이라 선언했다. 그렇게 모두의 증오를 한 몸에 받는 외국인 군주가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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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카파가 예의 신전 습격을 지시한 흉수입니다. 분명해요.”
오스론의 말에 롤랑이 물었다.
“어째서?”
“그 무도한 용병 놈은 메디아가 아직도 자신에게 돈을 갚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자기가 내준 개척비용이야 비프로스트를 차지함으로써 대신했다 쳐도 원정비용을 내준 건 별개라더군요. 물론 들을 가치도 없는 헛소리이기에 전하께서야 무시해 오셨습니다마는······”
이어진 설명은 이러했다.
왕이 의식을 치르고자 황금을 마련했다는 소식이 비카파의 귀에 들어갔으리라.
비카파가 생각하기에 왕은 자신에게 돈을 갚아야 할 것인즉 그 의식에 쓸 황금을 제 몫이라 여겼을 것이다. 채권자들은 으레 채무자의 지갑이 곧 자기 것이라 여기는 법이므로.
이내 비카파는 황금을 강탈하기로 결심했으리라.
그리하여 자기 용병대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한량들을 꼬드겨 황금이 운반된 신전에 습격을 지시했으리라는 것이었다.
꽤 그럴 듯한 추측이기는 했다. 그러나 진실이야 어떻건 롤랑이 듣기에는 난감할 뿐이었다.
습격 흉수가 누구든, 비카파가 뭘 했든 간에 이쪽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뭘 어쩌란 거냐? 복수라도 하라고? 그 비카파인가 하는 놈을 죽여주면 좋겠단 건가?’
“기억해 두겠소.”
대답은 그리 하면서도 롤랑은 속으로 신음했다. 하필이면 지금, 저기 목적지가 보이는 마당에 저런 소리를 하다니.
‘도착한 기쁨을 즐기게 놔두지도 못하나?’
정말이지 걷는 내내 여행이 최대한 빨리 끝나기를 기원해왔다. 행군은 아주, 아주 괴로웠다. 육체적으로는 조금, 정신적으로는 매우.
롤랑이 보기에 이 오합지졸 군대는 숫제 강도떼였다.
하룻밤 자고 나면 도둑질 당했다고 하소연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성추행은 애교요 강간미수 사건도 세 건이나 발생했다.
신경이 곤두 선 원정대는 조심스레 뒤따라오던 나병환자들을 상대로 울화를 해소하려 했다.
그리고 강도 미수까지. 보급이 부실하다 싶어 식료구입에 나선 순례자들이 현지인들이 제시한 식량 가격이 너무 비싸다며 울컥하고는 약탈에 나서려 했던 것이다.
이런 야만적인 상황에도 오스론 추기경은 무관심했다. 그 고상하신 추기경께서는 곰곰 생각에 잠긴 척 모든 것을 못 본 척할 뿐이었다.
다른 문제는 몰라도 나병환자 경우에는 롤랑이 나서야 했다. 이런 상황을 막는 것은 도덕은 물론 필요의 문제이기도 했다. 영웅이 이끄는 원정대가 병자를 박해하더란 소문이 퍼지게 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들을 보호하는 것은 간단했다. 그저 영웅들 옆에 붙어 따라오도록 하면 되었으니까.
사실 그보다 더 걱정한 것은 부족한 식량이었지만 그것은 간단히 해결되었다.
롤랑이 약탈하려던 비렁뱅이들을 가로막고 농부와 교섭하여 약간의 식량을 구입한 다음날, 오스론은 근처 도시에 들러 꽤 많은 양의 보릿자루를 지원받았다.
그래도 먹는 입이 너무 많아 그마저 간당간당해질 무렵 보급대가 도착했다. 며칠 뒤에는 행로에 있던 근교에 들러 또 다시 물자를 지원받았다.
매번 조달되는 식량은 넉넉하진 않았지만 아사자를 만들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그것만 봐도 오스론이 행군 계획을 제대로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스론은 결코 군사작전 문외한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강도 사건, 폭력 사건에는 무관심한 거지? 추기경이면 높으신 성직자로서 도덕적 결벽증을 보여줘도 이상할 것 없지 않나?’
어쨌건 이 모든 것이 끝이다.
롤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전방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산맥과도 같은 회색 언덕이 시야의 절반을 차지했다.
좀 더 가까이서 보면 그 언덕의 회색 표면이 각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땅 위로 조금 드러난 세계수의 뿌리다.
그리고 뿌리 너머에는 당연히 줄기가 있다.
원정대가 외쳤다.
“세계수를 보라!”
거대한 회색 기둥. 그 넓이만 해도 비현실적이지만 그 높이에 비하면 넓이는 초라할 지경이다. 성층권 너머로 치솟은 부분부터는 구름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저 기괴한 무언가가 세계수요 그 주변을 둘러싼 도시가 바로 비프로스트였다.
“드디어 도착이군요!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경!”
어느새 롤랑의 곁에 젊은 기사 월렴이 다가와 있었다.
행군 도중에 자꾸 친한 척하는 바람에 롤랑으로서는 짜증나는 녀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기꺼이 기쁨을 나눌 수 있었다.
“경 역시.”
월렴은 함박웃음을 지어보였다. 롤랑이 살짝 웃자 월렴의 웃음은 더욱 커졌는데, 문득 누더기 입은 누군가가 다가오자 그 웃음이 가셨다.
한 나병환자가 고개 숙이며 말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경.”
롤랑이 대답했다.
“그저 해야 할 걸 했소.”
“저희에겐 목숨 줄이었지요. 언젠가 반드시 갚아드리겠노라 하고 싶지마는 그럴 능력이 없군요.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경을 위해 기도드리고 싶어도 문둥이가 기도한들 신들께 닿지 않을 테니······.”
“닿을 거요.”
나병환자는 작게 웃었다.
“아말릭이라 합니다. 언젠가 발할라에서 뵐 수 있다면······”
아말릭이 말을 이으려다 말았다. 롤랑이 손을 내밀었기 때문에.
뭔가? 악수라도 하자고?
문둥이랑?
순수한 호의일지, 선량함을 과시라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이쪽으로서도 부담스러웠다. 아말릭은 뭐라 한 소리 하고픈 심정이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말릭은 손을 소매에다 숨긴 채 롤랑과 손을 마주잡았다.
악수를 마친 뒤 롤랑이 말했다.
“발키리가 그대를 인도하길.”
아말릭은 고개 숙여 답했다.
“언젠가 발할라에서 뵙길.”
동료 나병환자들에게 돌아온 아말릭은 생각했다. 문둥이와 손을 잡다니, 의도야 어떻든 확실히 저 기사가 용감하긴 하다고.
진짜 롤랑은 아니겠지마는.
아말릭은 전 신학도로서 왜 돈 좀 냈다고 전설 속 영웅을 부려먹을 수 없는지 논문을 써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논문은 기본적인 신학상식으로만 채워져 있을 것이요 너무나 당연한 내용이라 논문을 받아든 교수는 별 감흥이 없으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설마 그 사실을 오스론이 추기경씩이나 되어 모를 리 없다는 것도.
물론 문둥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원정대는 환호를 계속하며 저기 보이는 세계수를 향해 전진했다.
아말릭은 나병환자 동료들에게 말했다.
“숨어 있다가 저놈들 다 들어가면 그때 들어갈까요?”
다른 나병환자가 입을 열었다.
“롤랑님이랑 같이 가요. 우리만 남겨지면 저 자식들, 뭔 짓을 할지 모르니까.”
아말릭은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아무리 영웅 행세 중이라도 시내에서까지 따라붙으면 싫어할 텐데.’
하지만 동료들에게 말하기는 곤란했다. 순진한 치들이었다. 저 롤랑이 진짜라고 믿을 만큼.
그동안은 영웅들이 자기네를 챙겨주노라 기뻐하는 심정을 망치기 뭐해 굳이 영웅들이 가짜임을 설명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설명하고 같이 간들 좋아하지 않으리란 것도 말해야 할까?
하지만 이내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병자들과 함께 영웅들을 조심스레 따라나섰다.
그리하여 비프로스트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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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프로스트 - [1]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