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20화 (20/164)

< 순례길 - [3] >

“그놈의 롤랑은 가짜고 오스론은 모리배에 불과해. 물론 그 두 사기꾼에 혹한 네놈은 그놈들만큼 못난 머저리고.”

아비의 말에 월렴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왕이 국고를 털어 영웅들을 불러냈다 하지 않았습니까?”

“개소리다. 금 좀 냈다고 신의 전사들이 튀어나오면 그걸 용병이라 부르지 영웅이라 부를 이유가 무어냐? 애초에 이 조그만 메디아에서 롤랑을 살 수 있다면 대오공국에선 지금쯤 헤라클레스를 부려먹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신들께서는 금 때문이 아니라 메디아를 위해 그들을 보내주신 겁니다.”

“지랄 같은 소리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순례 서약은 교회 가서 참회기도만 해도 취소할 수 있어. 애당초 그놈의 원정은 병자, 늙은이에 비렁뱅이들이나 가는 거다. 뭔 횡액을 당한들 잃을 게 없는 놈들 말이다. 왜 잃을 거 많은 차기 가주가 직접 가겠단 거냐?”

“숙원이니까요.”

가주는 눈을 부라렸다.

“내가 그놈의 기사도 소설을 진작 다 불태워버렸어야 하는 건데.”

“정말 그러셨지 않습니까?”

“광란의 아마디스는 남겨뒀을걸. 가장 빨리 불살랐어야 하는 걸 좀 덜 불쏘시개랍시고 내버려뒀다니 내가 멍청했지, 빌어먹을. 그래서 정말······ 갈 거냐? 고결하신 롤랑처럼 괴물을 죽이고 거인을 베어버리게?”

“예.”

가주는 한숨 쉬고 이마를 짚더니 눈을 지긋 감아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겨우 입을 떼고는 버럭 소리 질렀다.

“그럼 가라, 가! 이 등신자식, 문 밖으로 걸어 나가지 못하게 네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지는 않겠다만 그걸 내가 널 아끼기 때문이라 생각하지 마라. 네가 이토록 멍청하다면 차라리 네 머저리 동생이 후계로 낫다는 걸 깨달아 내버릴 뿐이다!”

월렴은 잠자코 있었다. 가주는 계속 씩씩거리다가 몸을 의자 뒤로 크게 젖히더니 눈을 감아버렸다. 잠들어버린 듯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자리를 벗어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월렴으로서는 그저 초조해 하던 와중이었다.

가주는 마치 중얼거리듯 말했다.

“발리사다를 가져와.”

월렴이 미소 지었다.

서둘러 방을 나선 월렴은 웬 칼을 한 자루 들고 왔다. 칼의 이름이 발리사다였다.

발리사다를 받아든 가주는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발리사다를 들어 올리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무릎 꿇어라, 월렴.”

월렴은 시키는 대로 했다. 가주는 그 어깨에 발리사다를 갖다 대었다.

“맹세하라, 수습기사.”

월렴은 기사 서약을 읊어나갔다.

“나는 두려움 없이 적에 맞설 것이요, 굳셈과 고결함을 간직할 것이요, 신명을 다해 진실을 지킬 것이요, 나 자신보다 약한 자들을 보호할 것을 기사의 이름으로 서약하나이다.”

가주는 발리사다의 옆면으로 월렴의 어깨를 두 번 쳤다.

“나 푸른 피의 권한으로 이 자의 용맹과 충성을 보증하노라. 지금 여기서 가문의 검과 기사의 서약을 교환한다. 검의 이름은 발리사다라.”

월렴은 감격에 젖어 발리사다를 받아들었다.

지금 월렴은 정식으로 기사가 되었고 가문의 보검을 받았다. 욕이나 잔뜩 처먹고 무일푼으로 내쫓길 줄 알았는데.

월렴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약대로 행하겠습니다, 기사로서.”

“그 중 하나만 지켜도 성기사를 자처할 만할 거다. 기사가 별 거냐? 갑옷 입고 말 한 필 끌면 기사지. 그마저 없으면 강도고.”

아비의 기사도를 모욕하는 발언에도 월렴은 웃었다. 가주는 다시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그 칼이 네가 그리 연모하는 롤랑이랑 비슷한 연배라는 걸 잘 알 거다. 롤랑의 동료 성기사가 썼던 거지 아마? 이 집보다 비싼 거다. 잃으면 죽을 줄 알아라.”

“이거 잃을 즈음이면 저도 이 세상에 없을 텐데요.”

“시체라도 효수해주겠다. 거인 밥이 되지 않았다면야······. 순례자들이 모이기로 한 게 언제지?”

“앞으로 곧?”

“그러냐? 그럼 거인 밥 되러 꺼져라. 냉큼!”

월렴은 아비의 명에 따라 얼른 저택을 나섰다.

광장에서 들려오는 징소리에 따라 길을 걸었다. 그러면서 자기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우선 볼품없는 누더기를 걸친 부랑자들. 거북이처럼 큼지막한 등짐을 멘 노인들도 보였다. 어떤 사람은 전신을 거적때기로 덮은 것을 보아 그 병세를 짐작할 만했다.

‘아무리 그래도 문둥이까지?’

월렴은 이 년 전 발두르 신이 내린 신탁을 떠올렸다. 세계수에 올라 싸움을 거듭한다면 발할라에 데려가 주겠다고, 그리하여 작은 신으로 만들어 주겠다던 약속.

저들은 그 영적 보상에 이끌린 순교 예정자들일 것이다.

그 사실이 월렴은 영 탐탁지 않았다.

순교자들을 발할라에 데려가게 주겠다는 것은 물론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다름 아닌 신이 직접 공언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런 약자 중의 약자들마저 발할라의 전사로 만들어줄까?

‘내가 저놈들과 같은 취급인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에 걸으면서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계속 걷다보니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웅성거리는 소리도.

일단의 기사 무리가 시가를 행진하고 있었다. 느릿하게 걸어가던 노인과 병자들을 밀쳐가며 젊은 기사들은 보무당당히도 시가를 가로질렀다.

“롤랑을 위하여!”

앳되고 익숙한 목소리였다. 흘긋 봤더니 아는 얼굴들이었다.

“젠?”

젊은 기사가 월렴을 바라보았다.

“아, 월렴. 아버님이 결국 보내주시든?”

“어, 응. 서임도 받았지.”

“우리도 그래. 어제 칼 자작님께 단체로 서훈 받았어. 감사드립니다, 어르신.”

어르신? 흘긋 봤더니 나이 든 기사도 보였다. 수염 지긋한 그가 칼 경이라는 것을 월렴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마상시합에도 참가해본 적 없는 저 아저씨가 뭔 배짱으로?’

“어르신이 인솔하십니까?”

월렴이 묻자 칼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네. 이 친구들이 우리 저택에서 기사 수업 받았잖은가. 당일치기로 서임해준 김에 순례도 내가 책임지기로 했어.”

거기까지는 쉬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월렴은 문득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기사수업 받는 귀족 소년들이 대가문 저택에 신세 지며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소년 공동체의 우두머리는 으레 그 대가문 저택의 아들인즉, 저들의 중심에는 칼 경의 아들 울 칼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놈이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

‘그야 칼 경이 데려오지 않았으니까······. 위험하기 때문에.’

“그런데 자넨 종자 하나도 거느리지 않았군. 궁정백께서 어지간히도 자네를 아끼시는 모양이야.”

칼 경이 말했고 월렴은 욱했다. 지금 세를 과시하는 건가?

‘원래 아버지한테 알랑거리던 주제에, 이제 이곳 거물들과 볼 일 없다고 막말하나?’

당장 대들 수는 없었다. 칼 경의 무리는 여든 명이 넘었다. 칼 경을 따르는 젊은 기사들만 열 명이요 그 기사 하나하나가 종자에 병졸까지 거느린 것이다.

앞으로 저놈들이 대놓고 시비 걸어올지 모르겠다. 그리 생각하고 월렴이 속으로 씩씩거리는 가운데 칼 경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부하들 거느리고 기세등등하다 보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못 돌아올 거 아닌가. 고생 좀 하다 얼른 돌아오란 게지. 아버님 뜻을 잘 헤아리게나. 그걸 감안하면 자네를 우리 무리에 끼우는 건 저어되는군. 돌아갔다간 이 젊은 기사 친구들한테 비웃음 당할까 두려워 집에 가겠단 말도 못 꺼내게 될지 모르잖나. 하지만 혼자 있는 쪽이 더 위험할까? 어느 쪽이 나을지 모르겠네그려.”

칼 경은 순례 따윈 집어치우는 것이 낫다는 양 말하고 있었다. 마치 아버지처럼.

더 듣기가 거북했던 월렴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롤랑 경, 진짜겠지요?”

“그렇지 않을까?”

월렴이 기분 좋게 웃었다.

“당연하지요! 아버지께선 롤랑이고 영웅이고 싹 다 순례자들을 늘리려는 사기라 하셨지만 말입니다.”

“그건 아닐걸. 자네 아버님께서야 사후세계에 돌진하고픈 인생 실패자들만 순례에 참여하리라 생각하시겠지만 그렇지 않네. 모든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지. 순례자 중엔 전망이 창창한 치들도 많아. 자네 같은······. 멋지잖나, 전설 속 괴수들과 거인들. 기사 소설 애독자들을 끌어 모으기 충분한 요소지.

물론 몽상가들 말고도 삶을 얼른 내던지고픈 박복한 치들도 많이 참가했네. 아주 많이. 그처럼 고대 영웅이 있든 없든 세계수에 오르고픈 사람들은 애당초 널려있었어. 그런데 굳이 언제 들킬지 모르는 사기를 쳐가며 억지로 참가인원을 늘릴 필요가 있나?”

월렴은 그 설명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칼 경의 무리와 함께 대로를 걸었다.

원정 집결지인 광장에 모인 인파는 꽤나 대규모였다.

별별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다. 소년과 노인, 부자와 빈자, 귀족과 평민······.

무장상태도 가지각색이었다. 군마까지 챙겨온 기사는 물론 창 한 자루 겨우 든 농부도 보였다. 그리고 그 곁에는 가족일 터인 아낙네들이 큼지막한 등짐을 메고 서있었다.

저들 모두 원정에 나설 자들이었다.

순례자들. 혹은 제2차 메디아 비프로스트 원정대라 불러도 좋으리라.

사람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모여들었고 광장은 발 디딜 데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내 옆에 문둥이가 있다느니 소매치기라느니 하는 비명소리가 들려와 어수선했다. 무장병력을 이끈 칼 경 일행과 그 곁에 있던 월렴은 비교적 평화로웠지마는.

‘당분간 이 아저씨 옆에 딱 붙어서 다녀야겠네······.’

월렴이 신음하는 가운데 칼 경의 표정도 굳어져있었다. 왜 그러는지 물어봤더니 칼 경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몸만 챙겨온 놈들이 너무 많아.”

“그게 왜요?”

“보급대가 이 주린 입들을 다 먹일 수 있을까? 비프로스트에 도착해 세계수에 오르기는커녕 거기까지 갈 수는 있을지······”

그로부터 약 한 시간이 흐를 동안 광장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월렴은 이 오합지졸 군대가 과연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지가 아니라 과연 출발은 할 수 있을지를 걱정하게 되었다.

문둥이들은 진작 다 끌려나와 광장 한 구석에 몰린 채 돌팔매당하고 있었고 소매치기하다 붙잡힌 소년의 손목을 자를까 말까 하는 문제로 웬 거한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 소란을 웬 웅장한 소리가 덮었다.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뿔나팔 소리가 들린 쪽으로 모두들 시선을 향했다.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나팔수들을 제치고 웬 남자들이 단상 위에 오르고 있었다. 그 중 한 기사를 월렴은 단번에 알아보았다.

‘롤랑 경!’

다른 두 영웅들도 보였다.

모지와······ 제이선인지 제이손인지 하는 남자. 그 영웅 셋은 단상 위에서 각기 경계를 취하듯 다른 방향을 향해 섰다.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나팔 소리가 그쳤다. 광장은 어느새 조용해졌다.

모두들 전설적 영웅들의 존안을 보느라 여념 없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기사 롤랑이었다. 엄청난 거구를 덮은 피처럼 붉은 갑옷.

햇빛을 반사해 그 모습은 마치 태양신 같았다.

이윽고 영웅들 사이에서 붉은 법의를 입은 오스론 추기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 사람들 대부분은 그에게 별 관심이 없겠지만, 어쨌건 오스론이 입을 열었다.

“발두르 신께서 부르시매 오늘 우리가 여기 모였다.”

주문의 힘 덕에 그 목소리는 광장 전역에 울렸다.

“오늘 순례를 떠나 비프로스트에 도착한 우리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할 것이다. 세계수에 올라 싸우고 또 싸우다 보면 그리 되리라.”

사실 정확한 말은 아니었다. 이들 중에는 순례자라기보다 모험가로서 참가한 인원도 제법 섞였다.

월렴처럼. 세계수에 올라 부와 명예를 얻겠다는 몽상가들.

“그 최후의 순간 발키리가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내뻗어온 그녀의 손길이 너무 곱다 하여 맞잡기를 망설이지 말라. 그녀를 따라간 곳에 발할라가 있을 테니.”

이후로는 발할라가 얼마나 근사한 낙원일 것이며 지금 옆에 선 롤랑과 같은 영웅들과 동료가 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영광일지 상상해보라는 설교가 이어졌다.

월렴은 순교할 생각은 없었지만 전설적인 기사와 전우가 된다는 것은 확실히 매력적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이것은 근사한 서사시에 이름 새길 기회가 아닐까?’

그리고 두 시간 지나 마침내 원정대는 행군을 시작했다.

*******

< 순례길 - [3]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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