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9화 (19/164)

< 순례길 - [2] >

이후로도 힘들게 대화하자니 뭉쳐있기로 했던 약속도 무색하게 셋 다 따로따로 흩어지고 말았다. 그 사실을 롤랑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급히 모지와 제이슨을 찾아보았다.

‘제이슨은······ 괜히 걱정했네. 알아서 잘 웃고 떠들고 있으니.’

제이슨과 담소 중인 사람들도 불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다들 흥미가 넘치는 듯 제이슨을 둘러싼 채였다.

사실 뭐하던 작자였는지도 모를 제이슨보다야 모지가 유명한즉 사람들은 모지에게 더 관심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모지는 술을 잔뜩 퍼마신 듯 붉게 달아오른 채 연회음식을 먹어치우느라 바빠 보였다.

과연 모지에게 다가간 사람들은 말을 걸려다 말고 물러서야 했다.

‘애당초 자기가 잘 대응할 수 없으리라 확신하고는 말 걸 여지를 없애버린 모양인데. 혹시 말 걸더라도 저 상태라면 이상하게 대꾸한들 그러려니 할 테고.’

그런 식으로 무난하게 연회가 흘러갔다.

다행히도 롤랑이 걱정한 만큼 고생스럽지는 않았다. 귀빈을 배려한 것인지 사람들이 적당한 인원이서 적당한 질문을 해왔으므로.

그리하여 연회가 막바지에 이르자 오스론이 다가왔다. 근처에 있던 귀족이 오스론에게 예를 표했다.

“참으로 길한 날입니다, 예하.”

오스론도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정녕 그렇소이다. 다 귀빈들 덕이겠지요. 롤랑 경, 연회는 즐기셨습니까? 전하께서 뵙길 원하십니다.”

롤랑은 모지를 흘긋 보고 대답했다.

“우리 셋 다? 지금 한 명은 취할 대로 취했는데.”

“경께서만 가도 폐하께서는 흡족해하실 겁니다.”

“그렇다면야.”

혼자라는 사실에 롤랑은 부담을 느끼며 오스론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웬 경건한 장소에 도달했다.

향초와 신상(神像)들이 늘어선 가운데 대리석 제단이 보였다. 그리고 제단 앞에 홀을 쥐고 앉아있는 법복을 입은 남자. 복장은 달라졌어도 오스 왕이 분명했다.

‘통치자가 제사장을 겸하는 제정일치 나라였지 아마.’

게임 메디아에서는 익숙한 요소였다. 그리고 익숙한 요소가 하나 더.

롤랑은 제단 저편에 놓인 사진을 바라보았다. 아니, 사진? 카메라가 있을 리는 없으니 그림인가?

그리 긴가민가할 만큼 정밀한 그림이었다. 검은 머리 아름다운 여자가 그려진. 저 초상화의 주인을 롤랑은 본 적이 있었다.

“메데이아 공?”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보시는구려?”

“뵌 적 있으니까.”

게임에서 말이지마는.

문득 게임 속 인간관계가 꼭 여기에 그대로 반영됐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롤랑은 변명하듯 덧붙였다.

“메데이아 공께서 날 기억하고 계실지는 모르겠군. 그때 난 귀족기사 한 놈에 불과했거든.”

“겸손도? 메데이아 공께서 프레이 신과 무사히 혼인할 수 있었던 건 경 덕분이잖소? 그 신성한 혼례를 망치려는 악적들에 맞서 롤랑 경께서 어찌 활약하셨는지는 아직도 전설로 내려오고 있소. 아무튼 메디아가 어떤 나라인지 아시겠지요?”

롤랑은 알고 있는 설정을 말했다.

“바다 건너오신 메데이아 공께서 건국한 나라요. 그러나 내 기억하기로 메데이아 공께서는 장녀상속제를 원하셨을 텐데? 남자를 싫어하셨으니까. 그런데 결국 뜻대로 상속이 이루어지지 않았나 보구려. 남성이 왕으로 즉위한 걸 보니.”

“아니, 그분의 뜻은 이루어졌소. 메디아는 여전히 장녀상속제고 난 그저 섭정에 가까운 왕이라오. 메디아의 진짜배기 지배자는 내 아내요. 수 년 넘게 병석에 드러누운 여왕이지. 오스마 여왕······ 그리고 여왕의 병환이 내가 귀 영웅들을 소환한 이유요. 아내를 낫게 하고 싶소.”

어쩐지 소박한 이유에 롤랑은 당황했다.

“여왕 폐하를 낫게 하고 싶으시다? 그런데 왜 우릴? 내 알기로 우리 중에 전설적인 약사는 없는데?”

“전설적인 약을 제조할 줄 몰라도 구할 수는 있으실 거요······ 그렇잖소? 황금사과 말이외다.”

“황금사과?”

“경께서 당신의 대제께 진상하였다 들었소이다. 아니오?”

롤랑은 생각했다. 확실히 그러기는 했다.

게임에서 롤랑은 친구 카를에게 아이템 황금사과를 내주었다.

그런데 그것은 직접 교환을 걸어 내준 것도 아닌, 단순 아이템 획득을 포기하여 간접적으로 내줬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마저 행적으로 반영되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몬스터와 싸우다 패한 것, 혹은 PVP를 한 것은? 게임 내에서 욕설을 한 것은 어찌 되었나?

롤랑은 카를에게 툭하면 친애의 정을 담아 비읍으로 시작하는 초성체와 육두문자를 날리곤 했는데 이 세계에서 카를은 롤랑의 주군이 아닌가. 만약 채팅 내용마저 행적으로 반영됐다면 롤랑은 기사도의 화신은커녕 불경하기 그지없는······.

왕의 말이 상념을 끊었다.

“황금사과가 필요하오. 내 아내를 위해서. 그리고 이 나라를 위해서. 그러기 위해 신들께 공물을 바쳐 그대 영웅들을 불렀소.”

“분명 소환될 때는 세계를 위해서라 들었소만.”

“궁극적으로는 그리 될 거요. 황금사과는 세계수에 있고 그걸 구하고자 세계수에 오르다 보면 용, 늑대, 거인 따위 신의 적들과 싸워야 할 테지. 그리 신의 적들을 해치우다 보면 절로 구세될 거 아니겠소?”

“그럼 황금사과를 구하기만 하면 끝인가?”

“마지막으로 황금사과를 내게 보내주시면 되오. 그 순간 신성한 계약은 이행된 것으로 간주되오. 처음부터 그런 계약으로 그대들을 불렀소.”

그리 말하더니 오스 왕은 무언가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 아내 오스마 여왕은 메데이아 공의 적손이오. 신들께서 보시기에도 그 피가 끊겨서는 결코 안 될 고귀한 혈통이외다. 메데이아 공과 결혼하신 프레이 신께서는 물론 다른 신들께서도 그리 생각하시어 여러분을 보내주셨소. 그러니 무어라 흠잡지는 말아 주시길.”

다 듣고 난 롤랑이 입을 열었다.

“그마저 완수되면? 이후로는 뭘 어쩌면 되오?”

혹시 임무가 완수되면 신들이 발할라로 도로 불러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물었다. 왕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후로야······ 원하시는 대로 기사로서의 본을 보이시어 만백성을 널리 이롭게 하면 되겠지요. 이왕 육체를 얻으셨으매 조금 즐긴다 하여 신들께서 꾸짖지는 않으시리라 믿소.”

얼핏 듣기로는 임무가 완수되어도 이 세상에 그대로 남으리라는 것 같다.

대충 생각해서 내놓은 답변인지, 아니면 확실한 것인지 롤랑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당장에는 귀가 번뜩 뜨였다.

‘그놈의 황금사과만 주면 계약완료? 나머지는 맘대로 하라고?’

이후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끝에 오스 왕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염치없는 부탁이 있소. 남들에게 황금사과 이야기는 말하지 말아주시겠소?”

그러면서 왕은 고개를 푹 숙였다. 롤랑은 당황했다.

‘기껏 국고를 털어 고대 영웅들을 소환해서는 사과나 따오라 부탁했다는 것이 망신스럽나?’

본디 영웅들을 소환한 대외적 목표는 좀 더 고상한 것이었을까? 어쨌건 롤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리다.”

왕은 감격을 표현하는 듯 웃어보였다.

도로 연회실에 돌아오니 모지는 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꼬부라진 목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나, 는 주문을 쓸, 는데, 왜, 그러느냐면, 주문, 쓰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바보들의 대화를 듣는 것 같았다. 저런 꼬락서니인 동료를 내버려두고 제이슨은 무얼 하고 있나 봤더니 웬걸.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여 희희낙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롤랑은 이해할 수 없었다. 현대인의 심미관에는 썩 예쁘지도 않을 아줌마들과 노닥거리는 것이 뭐 그리 즐겁단 말인가?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면박주기도 민망해 롤랑은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롤랑은 모지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시선을 끌기 위해서.

“아, 롤랑 경. 알현은 끝나셨습니까?”

계산대로 금세 사람들의 관심이 돌아왔다.

자신 앞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롤랑은 근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

< 순례길 -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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