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7화 (17/164)

< 큰방 - [4] >

물론 다른 유저들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카를이 어느 책을 펴들었다. 거기 그려진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롤랑의 영지 어딘지 찾았다. 비프로스트란다, 비프로스트. 무덤도 거기 있다네.”

광전사 유저 랑슬로는 그 책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비프로스트? 세계수 있는 곳 아냐?”

“그래. 시트에다 적어야 하니까 넌 이제 비프로스트에 대한 상세 정보 좀 찾아 봐라.”

“오케이······ 지역 정보는 어디서 찾아봐야 하나······”

랑슬로가 책을 뒤적이는 사이 카를은 종이에 적었다.

롤랑의 영지 : 비프로스트.

한글로 적었다. 보이지 말아야 할 자들에게 읽히지 않도록.

랑슬로가 비프로스트에 대한 정보를 찾아내면 그 역시 이 종이에다 적을 터였다.

종이의 윗줄에는 다른 정보가 빼곡 적혀있었다. 롤랑의 생년월일이며 족벌은 어찌 되는지, 어느 전투에 참가했으며 그 전투의 승패는 어떠했는지 등등.

TRPG 식으로 말하자면 롤랑의 캐릭터 시트랄 만했다.

카를 외에도 수십 명이 적어준 것이었다. 각자 온갖 책과 사료를 뒤져서.

롤랑의 캐릭터 시트만 준비된 것은 아니었다. 모지와 제이슨의 캐릭터 시트 또한 제법 상세하게 작성된 채였다.

캐릭터시트를 작성하도록 요구한 것은 롤랑이었다.

‘자기가 뭘 하고 다닌 위인이었는지 몰라서야 말이 되나? 빠른 시일 내에 모두 자기 행적을 찾아내든가 아예 행적을 날조라도 해서 자기 설정을 채워야 할 거야. 당장 출정할 세 명은 시간을 두고 그럴 여유가 없으니, 모두가 도와줘야 하고.’

대강 이런 요청이었는데, 롤랑의 경우에는 사료가 워낙 풍부한 나머지 시트를 채우기가 어려웠다. 다 적기도 고역이요 각 책마다 상반된 정보가 적혀있을 경우 어느 쪽이 옳은지 분간하기도 힘들었으니까.

모지의 경우에는 사료가 적었기에 오히려 시트를 채우기 쉬웠다. 대충 옮겨적은 다음 나머지는 상상으로 때우면 되었으니까.

반면 제이슨의 경우에는 사료가 아예 없어서 문제였다. 애초에 제이슨이란 이름 자체가 흔해빠진 터라 당최 뭐하는 영웅이었는지 알아내기도 불가능했다. 결국 유저들끼리 날조한 설정들이 제이슨의 캐릭터 시트를 이루었다.

제이슨의 설정 대부분을 짜낸 것은 다름 아닌 카를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인선이었다. 고대 인물의 배경과 행적 등을 어색하지 않게 짜낼 만한 인재가 달리 없었기 때문에.

끔찍하게 싫었지만 그래도 세심히, 카를은 제이슨의 시트를 다 적어 내렸다. 일을 마친 다음에는 점검하고자 세 장의 캐릭터 시트를 훑어보았다.

가장 주의 깊게 읽은 것은 당연하게도 롤랑의 시트였다.

롤랑 LV 16

- 광전사 LV 15, 성기사 LV 1

근력 7

민첩 8

정신 4

지혜 4

건강 4

신성 8

* 특기 : 장검 숙련 LV 4, 방패 숙련 LV 3, 중갑 숙련 LV 3, 반격 숙련 LV 3, 전투함성  LV 3

* 주문 : 원소 룬, 축복, 회복, 소생, 정화

* 가호 : 초재생, 바람의 화신, 부활하는 자(추정, 성기사 가호)

능력 정보 밑으로는 업적이며 작위, 출생지, 전투이력 따위가 줄줄 적혀있었다. 카를은 그것을 유심히 살폈다.

‘내 친구라서 그런 건 아니지만 이 시트가 제일 중요하지.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영웅 중 하나가 바로 롤랑인 것 같으니······’

정말이지 이 캐릭터 시트에 가장 공을 들였다. 모순점이 없나 여러 유저들이 살피고, 이후에도 사료에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면 고쳐 적거나 새로 몇 줄 적는 등 실시간으로 보완을 거듭한 문서였다.

다른 캐릭터 시트에도 눈길을 보냈다.

‘모지, 지원 마법사. 당연 도움이 될 테고······ 제이슨, 이 또라이 새끼는 뭐 또라이 나름대로 쓸모가 있겠지. 둘 다 성격 면에서 문제가 있지만 뭐······ 그걸 내가 신경 쓸 처지인가?’

카를은 자조했다.

‘출정하기로 한 이 셋은 우리 중에 가장 용감하고 이타적인 셈이지. 그러니까 남겨진 나머지는 다 몸보신에 주력하는 쭉정이란 건데······ 물론 날 포함해서······ 앞으로 잘 해나갈 수 있을까? 이기적이고 겁 많은 우리 찌꺼기들끼리?’

현성, 아니 롤랑도 앞으로는 곁에 없을 것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카를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지난 며칠간 해오던 대로는 안 될 것이다.

우선 보안법부터 폐지해야 할 것이다.

카를 또한 무조건 대화를 금하겠다는 것이 신전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뿐임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모두 함께 탈주하리라 생각했으므로. 탈주할 것이라면 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카를은 노선을 변경해야 했다. 롤랑이 그러했듯 직접 저들과 대화하고, 상황을 파악해나가야 할 터였다.

얼핏 생각하기에도 끔찍하게 어려운 일이었다.

절망감과 부담감이 엄습해왔다. 카를은 고개를 탁자에 처박으며 신음했다.

‘대체 내가 여기 왜 떨어진 건가?’

******

“카를 대제가 대체 왜 강림한 건가?”

오스론의 한탄에 주변 사제들은 그저 고개만 푹 숙였다.

오스론은 침울하게 말을 이었다.

“문장관이 날 거의 심문하듯 몰아붙이더군. 소리까지 지르더라고? ‘고대 전사들 불러내라 했더니 대체 왜 카를 대제를? 황제한테 몸소 칼 들고 싸우라 요구하려고? 그게 아니라 받들어 모실 상전이 필요했나? 그거 정말 필요 없는데 말입니다!’ 하고 말이야······”

“놈이 감히?”

“그래, 감히. 일개 문장관 따위가 공작이요 추기경인 날 죄인 취급했어. 그런데 정말 화나는 게 뭔지 아나?”

“놈이 또 어떤······”

“그 명확한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저 죄인처럼 듣고 있어야 했다는 사실일세. 왜냐하면 정말 잘못했으니까. 보초도 세우지 않아 하룻밤에 여섯 명이나 죽은 건 놈이 뭐라 추궁하지 않더군. 너무 어이가 없어 훈계할 생각마저 가셨나 봐. 하지만 역시······ 카를 대제가 나타난 건 어찌 넘길 수가 없는 모양이더군.”

오스론은 한숨 쉬었다.

한 사제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예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의도치 않은 일입니다. 분명 저희가 프레이께 요구한 것은 롤랑 경과 기타 서른다섯 명뿐이었어요.”

“그렇담 카를 대제가 그 기타 등등에 포함됐을 뿐이란 말인가? 하기야 그렇겠지! 황금시대의 주인! 교회 태피스트리에 성자들보다 많이 수놓인 빛의 수호자! 대륙의 구원자! 그러나 발할라에서 보기엔 좀 쓸 만한 전사 중 하나일 뿐이라 롤랑 주는 김에 딸려줬다 이거지?”

사제는 아마 그랬으리라는 말을 꾹 삼켰다. 오스론은 계속해서 말했다.

“역시 이건 내가 생각하기에도 정신 나간 일이야. 카를 대제라니? 정치적, 외교적 위험 정도가 아니지. 열강들을 도발할 신성모독이요 걸어 다니는 황금사과 수준 아닌가. 따먹을 수만 있으면 군대든 뭐든 동원할 괴물들이 온 천지에 널려있다고!”

“어찌 하면······”

“일단 묻어두세.”

“묻는다 하심은?”

“바깥에 내보내지 말라 이걸세. 집어먹어도 되나 싶을 만치 커다란 황금사과니까. 일단은 갖고 있단 걸 숨겨야 해. 각지에서 도적떼를 불러들이지 않도록······ 알아들었나?”

“예.”

“당장은 돌려보낼 방법을 찾는 데 전념하게.”

“아시다시피······”

“불가능한 건 나도 알아. 자네들이 벌써 몇 번이고 말했잖나. 그래도 그냥 멍하니 있지는 말고 뭐라도 시도해보라 이걸세. 자네들은 가장 우수한 소환 사제들 아닌가? 평소에 하는 일 없으니 이럴 때라도 뭔가 일을 해야지.”

“그러나 방법이 전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마는······”

“프레이 신께 무슨 착오가 있었던 게 아닌가 여쭤보기라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오스론이 툭 던진 말에 사제들의 표정이 굳었다. 한 사제가 애써 말했다.

“그러나 천상과 교신하는 것은 힘든 걸 넘어 위험한 일입니다. 뇌가 타들어가거나······ 신들께서 귀찮은 나머지 아예 저주를 내릴 수도······”

그 순간 오스론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고 사제는 이를 악물었다. 무슨 표정인지 읽어낼 수 있었다.

‘내 알 바냐?’

과연 오스론의 입에서 나온 것은 좀 더 순화된 형태의 그 말이었다.

“자네들 실수 아닌가. 바로잡으란 걸세. 자기 오물은 자기가 치워야 하는 거 아닌가.”

사제가 입 다물고 있자 오스론이 쏘아붙였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예하.”

“표정에서부터 싫다는 게 드러나는군. 내일부턴 오죽 좋겠군그래? 내가 없어지니까 말이야. 원정 나가러······ 기왕이면 원정에서 죽어버리길 바라겠지?”

“당치도 않은······”

“유감이게도 내가 비명횡사 할 리는 없을걸. 내 곁에 누가 있을지 알잖은가? 롤랑일세. 고금 제일의 기사가 나를 지켜줄 거야. 나는 반드시 살아 돌아올 거다. 그리고 그때 자네들이 내가 분부한 일에 진력하지 않았다는 게 드러난다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그리고 다음 날, 원정 출정식을 거행하며 사제들은 한 마음으로 빌었다.

부디 위대하신 롤랑 경께서 저놈을 싫어하시길.

그리고 끝내 죽게 내버려 두시길.

******

< 큰방 - [4]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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