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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의 트롤랑-13화 (13/164)

< 독방 - [4] >

그러나 다른 유저들도 롤랑이 한 일, 그러니까 역사 탐구에 흥미를 보였다.

“내 캐릭터도 어찌 거론되는지 좀 알고 싶은데. 나 나올 만한 책도 좀 가져다 줄 수 있어?”

한 전사 유저가 요구했다. 그리고 카를이 끼어들어 물었다.

“단체로 역사서 같은 거 가져와달라 말하자고?”

“왜, 이것도 안 돼?”

“안 좋지. 그랬다가는 저들에게 협조하려는 듯 보일 거 아닌가?”

“책 좀 달라는 게 왜 협조 의사를 내보이는 거야?”

“뭔가 요구를 해서 빚 지우는 것 자체도 그렇고. 현 시대를 파악하려는 노력 자체가 무슨 일이든 하려는 의욕이 싹텄다 해석될지도 모르지 않나.”

“그래서 책도 빌려선 안 된다고?”

카를은 부정했다.

“그건 아니고. 제안 자체는 나쁘지 않다. 일단 이 세상의 정보를 수집해야 의심스러운 행동을 덜할 수 있을 테니까. 다만 모두가 그래서는 안 된다 이거다. 그러니까 이건 롤랑에게 전담하는 게 어떨까?”

유저들은 그 말에 수긍했다.

그리하여 결정되었다. 이제부터 사제들 상대로 무언가 부탁하려면 롤랑이 맡아서 말해주기로.

롤랑이 떨떠름해하는 가운데 카를은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롤랑 너는 보안법의 예외다.”

“내가?”

“그래. 책대여 따위 부탁을 중개해주는 김에 놈들과 말 섞어도 되는 거야. 그러면서 네가 말한 대로 정보도 좀 수집하고······ 저들이 우리한테 뭘 바라는지, 뭘 시키려는지도 알아봐줘라.”

심부름꾼인 줄 알았더니 숫제 전권대사 임명이었다.

롤랑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래도 되겠어?”

“되든 안 되든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도 대화 창구가 필요하니까.”

“대화할 필요성을 느낀다면 차라리 그놈의 보안법을 완화하는 건?”

카를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안 된다. 우리들 꼬라지 안 보이나? PTSD인지 우울증인지 몰라도 죄다 패잔병 몰골이다.”

“패잔병치고는 전투훈련도 하고 그러는데?”

“그야 상황이 급박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고. 아무튼 이 상태로 사제들과 소통할 수는 없다. 말 좀 섞다보면 신전 놈들도 우리 실체를 눈치 챌 테지? 발할라에서 모셔온 영웅들인 줄 알았더니 발할라에서 쫓겨난 병신들이었구나, 하고 생각할 거란 말이다. 그리고 병신들 상대라면 존중할 필요도 없겠구나, 하고 판단하는 순간 전부 끝장이야.”

보안법의 효용을 불신하던 롤랑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확실히 입 다물고 있자는 것은 좋은 방침이 아니다. 그러나 이쪽의 나약하고 한심한 모습을 노출하느니 보다는 나을 것이다. 자고로 만만하면 막 대하기 마련이므로.

‘그것만은 피해야 해. 절대.’

이내 롤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외교관 할게. 그런데······ 나 혼자 하긴 불안하니 너도 같이 하지?”

“함께 외교관 노릇 하잔 말인가?”

“넌 외교관이라기보다는 외교권 있는 우두머리로 행세하는 게 낫겠지. 황제 칭호 달았으니까 이 무리의 수장임을 자처하면 권위가 있을 거 아냐?”

카를은 조금 우물거리더니 이내 말했다.

“난 못해.”

의외의 대답이었다. 롤랑은 황당해져서 물었다.

“사제들 상대로 우리 이익을 대변하려면 네가 가장 적임 아냐?”

카를이 허망한 웃음을 흘렸다.

“지금 여기서 가장 열심히 나불대고 있으니까? 그래서 뭔가 정치적인 걸로 보여? 아냐, 롤랑. 나 그럴 능력 없어. 지금 뭐라도 하려는 건 가만있기에는 너무 무서워서 미칠 것 같아서고.”

친구의 약한 모습에 롤랑은 당황했다.

“네가 왜······”

“고백할까? 사실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지, 제정신인지도 모르겠다. 이 마당에 함부로 입 놀렸다가는 일 망칠 것 같아. 아무튼 영웅대접은 결코 못 받겠지. 그야 난 영웅 같지 않으니까. 내 탓에 들킬까 겁 나서라도 난 입 다물고 있어야 할 것 같다.”

카를은 한숨 쉬며 롤랑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 중에 제정신 박힌 건 몇 없어. 상황을 좋게 변화시킬 의욕 있는 놈은 더욱 없지. 그 중 하나가 바로 너고. 그러니까 잘 부탁한다, 전권대사.”

******

전권대사로서 롤랑은 신전 사람들과 말문을 텄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제와의 만남도 롤랑이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붉은 법복을 입은 남자.

오프닝 영상에 나왔던 NPC였다. 그는 자기 이름을 오스론이라 소개했다.

오스론이 물었다.

“그러니까 발할라에서의 기억이 없단 말씀이십니까?”

롤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휘둥그레 뜨며 오스론은 이어서 물었다.

“소환된 경위도?”

“그것은 얼추 기억하고 있소. 세상이 위태로우니 후손을 도와달라고······ 세계수가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맞소?”

“그렇습니다. 거기까지 기억하고 계시다면······.”

“충분하지 않은 것 같소. 혼란스럽거든. 그 기억은 안개 속에서 툭 튀어나온 조각상 같은 느낌이오. 내 일같이 여겨지지 않아서 목적의식이 생겨나지 않아. 그 밖에도 여러 기억에 성에가 끼었소······.”

오스론의 크게 뜨인 눈은 닫힐 줄 몰랐다.

“그게 대체? 소환의식에 문제가······”

“그거야 모르지. 아무튼 소환된 영웅들이 비협조적인 것은 그런 이유인 줄로 아시오. 우리 중 절반은 이 상황을 일종의 마법적인 납치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있을 정도요.”

오스론은 할 말을 잊은 듯 멍하니 있다가 겨우 입을 떼었다.

“궁니르에 맹세컨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정당한 절차를 거쳤어요.”

“그런 것 같소.”

“아무튼 말씀해주신 데 깊이 감사드립니다, 경.”

침통해 하는 오스론을 뒤로 한 채 롤랑은 방을 나섰다.

무표정하게 복도를 걸었다. 그러면서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매만졌다.

롤랑은 방금 유저들을 대표해서 사기를 쳤다.

방금 오스론에게 한 말은 어제 유저들끼리 입을 맞춘 설정이었다. 기억이 혼란스러워 지금 이 상황이 당최 납득가지 않는다는 설정.

고대의 영웅들이 멍청히 있는 이유로 삼고자 급조해냈다. 그리고 외교관으로서 롤랑이 전달한 것이다.

그러나 잘한 것인지 모르겠다. 잘 연기했는지도.

‘내뱉은 다음에야 후회한들 어쩔 수 없지마는······.’

롤랑의 다른 외교관 임무는 거창하지 않았다. 그저 심부름꾼처럼 유저들이 원하는 책이나 물건을 받아오기만 하면 되었다. 기왕이면 롤랑 본인이 원해서 요구하는 것으로 가장해서.

그날 저녁에도 롤랑은 서고에 가 유저들이 부탁한 책을 요구했다. 사서는 웃으며 반겨주었다.

“독서가시군요! 원하는 대로 읽으십시오, 경. 옛날과 달리 요새는 촌부들도 혼수품으로 책 한 권쯤 주문할 수 있을 만큼 책이 싸답니다.”

사서에게 칭찬받으며 받아온 책들은 양피지 서적이었는데, 인쇄가 아닌 필사에 의한 사본이었다.

이 사실에서 무언가 정보를 유추해내고자 롤랑은 머리를 굴려보았다.

‘인쇄술이 별로임에도 책값이 싸다? 문자 의존도가 늘어 책의 수요와 공급이 증가한 게 중세 전성기였던가······ 아니, 촌부들도 책을 살 정도라면 금속활자가 발명됐나? 그럼 지금은 중세 후기 수준? 그렇담 여기 책은 필사본이어도 바깥에서 유통되는 책들은 인쇄본인가? 그럼 화승총이 있을지도······.’

그러나 결국에는 이 모든 고찰이 포도당 낭비에 불과하다고 결론지었다. 롤랑도 곧 깨달았으므로.

여기는 다른 세계라는 사실을.

‘중세 서양 같다 한들 서양사가 들어맞을 리도, 기술 발전 시기가 동일할 리도 없지. 금속활자가 유난히 빨리 개발되었던들 이상할 것 없고······ 여기에는 판타지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인 마법도 있다. 자동 필사하는 마법 깃펜이 있어 인쇄본만큼이나 값싼 필사본을 유통시키고 있다 한들 어색할 것이 없어.’

심지어 게임 본편의 설정조차 쓸모없을지 모른다. 지금은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뒤인 모양이니까.

당장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이 쓸모없을지 모른다.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그날 밤, 롤랑은 부탁받지도 않은 책들을 빌려와 자기 방에 쌓아놓고 읽어 내렸다. 주로 역사책들을.

롤랑이 기록된 책 중에는 무훈시가 아닌 역사책도 있었다. 거기에서 웬 충격적인 정보를 읽었는데, 롤랑은 카를 대제가 임명한 최초의 변경백이라 적혀있었다.

미칠 일이었다.

일개 기사였다 적혀있더라도 그 계급다운 모습을 보이기 어려울 마당 아닌가. 그런데 이제 롤랑은 전직 변경군주로서 행세해야 하는 것이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훈시의 롤랑은 마상시합에 참가하느라, 거인과 바다괴수들을 죽이느라 바빠 통치를 할 시간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역사책에 나온 롤랑은 변경 사령관으로서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었다.

“롤랑은 (······) 최초의 변경백으로서 황제의 원정마다 후방을 지키고 보급을 도맡았으며 그의 최후 또한 변경백으로서의 책무를 다한 끝에 맞이했다. 카를 대제가 친정한 세계수 원정은 익히 알려졌다시피 오랜 소모전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끝났다. 이윽고 황제는 퇴군을 결정했다. 퇴각 도중의 기습에 맞서고자 롤랑은 직접 군을 이끌고 지원 나가 후미를 담당했다. 그리고 습격당한 끝에 최후를 맞이했다······.”

여기까지 읽고 나서는 역서를 덮고 병서를 펼쳐야 했다. 이제 롤랑 노릇을 하려면 군사 지식도 필요하다는 것이 확실해졌으니까.

척후를 운용하는 법, 성의 구조, 군사용어 따위를 모르는 전직 변경사령관이라니 말이 되지 않는다.

수백 년이 흘러 용어가 달라졌기에 못 알아먹겠다는 변명은 먹히지 않을 터였다. 이 세계에는 언어의 변화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그 사실은 수백 년 전 영웅들이 현대인들과 멀쩡히 대화한들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만 봐도 명백했다.

여러 책을 펼쳐놓고 글을 머리에 구겨 넣듯이 읽어나갔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떤 책에서는 성탑(城塔)과 주탑(主塔)이 다른 듯 서술했고 어떤 책에서는 둘을 동의어 취급했다.

‘백작령(伯爵領)과 성주령(城主領)의 경계’라는 서술에 이르러서는 성주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했으며, 난해한 설명에 주석은 붙어있을지 몰라도 상세한 용어해설 따위는 없었다.

이 세계에도 사전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장 빌려온 책 중에 없었으므로, 모르는 용어가 나올 때마다 유추해석에 의지해야 했다.

그렇게 이틀 내리 책을 읽어 꽤 많은 것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커졌다.

‘광전사 롤랑의 롤플레잉은 어찌어찌 가능할지 몰라. 하지만 변경백 롤랑의 롤플레잉을 하려면······ 힘들어. 변경백이면 행정적, 군사적 능력마저 요구될 텐데 그런 게 책 좀 읽는답시고 획득될 리 없잖아? 설령 군대를 통솔하게 될 일이 없더라도 통솔할 수 있는 양 시늉은 해야 할 텐데······.’

롤랑이 머리가 피곤하여 누워있자니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경께서는 책 좋아해요?”

앤지였다. 그날 이후로 신전에서 전속 시동으로 붙여주었다.

“별로.”

“그런데 왜 읽어요?”

“필요해서.”

“머릿속에 글 채워 넣으면 허약해진다던데.”

“그러느라 몸을 안 움직이니까 그렇겠지.”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롤랑은 침대에 퍼질러 누운 채 잡담을 나누었다.

사실 앤지와의 잡담은 별 유익한 대화는 못 되었다. 어린애답게 앤지도 아는 것이 거의 없었으므로. 그럼에도 쫓아내지 않는 것은 앤지가 시중드는 동안 일과에서 제외된다며 이 일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문득 앤지가 말했다.

“어제 광란의 아마디스 다 읽었어요.”

“장하구나. 그거 더럽게 길기만 하고 재미없던데.”

“재밌던데요. 거기서 기사님 진짜 멋있었어요. 성검 뒤랑달 휘둘러서 거인이랑 괴물들 단칼에 죽이고, 기사단이 달려들어도 못 잡던 바다괴물도 혼자서 죽여 버리고······”

앤지는 롤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뭔가 묘했다.

롤랑이 머쓱해하는 가운데 앤지가 물었다.

“저도 기사가 될 수 있을까요?”

롤랑은 뭐라 대답해야할지 몰라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음, 뭐 어려워도 불가능하진 않지. 응원하마.”

그것을 가능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앤지의 표정이 환해졌다. 녀석이 말했다.

“전 성기사가 되고 싶어요. 기사님처럼요.”

“성기사?”

“예, 성기사요······ 신성 주문 보여주시면 안 돼요?”

롤랑은 왜 자기가 성기사인가 물으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성기사라는 칭호를 정의해보면 꽤 광범위한 것이다. 고결하다는 이유로 성기사라 부를 수도, 궁정 친위기사들을 성기사라 부를 수도, 종교적인 기사들을 성기사라 부를 수도 있다.

그러니 오딘을 섬길 뿐더러 지위 높은 기사 롤랑은 성기사라 불릴 자격이 충분했다.

그래봤자 게임 직업으로서의 성기사가 아닌즉 신성 주문은 쓸 수 없지 않느냐 하면 그것은 또 그렇지 않다.

메디아의 설정 상 모든 플레이어 캐릭터들은 신의 축복을 받은 가운데 무예와 마법을 익힌 정예전사들이었다. 그래서 플레이어 캐릭터라면 전사도 마법을, 마법사도 무술을 익혔다. 기본적인 신성 주문 또한 가능했다.

롤랑도 약간이나마 신성 주문을 사용할 수 있음은 진작 확인한 차였다. 그러니 보여주기로 했다.

마음속에 위대하신 오딘에 대한 경의를 담았다. 메디아 이전부터 좋아하던 신이기도 했으므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뇌리에 떠오른 룬문자를 읽고······.

‘어?’

롤랑은 룬 문자들이 보관된 자신의 내면세계를 주시했다.

못 보던 룬 문자 몇 개가 새로이 생겨나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 문자들을 조합하며 읊조렸다······.

“오딘께 내 영혼을.”

그리고 마법 주문이 발휘되었다. 앤지는 눈을 크게 떴다.

“멋져요!”

롤랑의 몸 곳곳에 회색 룬이 빛났다. 축복 주문이었다.

롤랑은 이것이 마법치고는 너무 심심하지 않나 생각했지만 앤지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앤지는 연신 탄성을 내질렀다.

“정말 멋져!”

“고맙구나.”

“그리고 기사님도요!”

마구 소리 지르는 앤지를 제쳐두고 롤랑은 이 상황을 파악하느라 여념 없었다.

광전사도 기본적인 신성 주문을 쓸 수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능력치를 1 더해주는 축복 주문은 성직자 직업군의 존재의의 중 하나로, 오직 성직자 직업에게만 허락된 강력한 주문이다.

이것을 대체 왜 광전사인 자신이 쓸 수 있는 것인가?

당장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 사실을 기억해두기로 하고 롤랑은 잠이 들었다.

침대 옆자리에는 앤지가 함께였다.

*******

< 독방 - [4]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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