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방 - [3] >
남겨진 사람들 사이에 욕설과 한탄이 오갔다. 욕설이야 제이슨을 향한 것이었으나 한탄은 무엇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뜬금없이 다른 세계에 불려온 이 처지? 아니면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뭘 하든 괴로우리라는 사실?’
유저들 모두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방금 들은 내용이 그리도 당혹스러운 것일까.
멀거니 있는 유저들을 향해 카를이 외쳤다.
“다들 뭐하나? 다시 무기 들어!”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지금 뭔가 할 상황이······”
“그럴 상황이 뭐가 아닌데? 상황 안 좋은 거 알았음 더욱 땀 흘려야 할 것 아닌가? 다들, 무기, 들어!”
마지막은 거의 괴성이었다. 결국 유저들은 시키는 대로 따랐다.
다들 굳은 얼굴로 훈련을 재개했다. 그들 표정에 깔린 우울함과는 별개로 유저들이 발휘하는 전투기술은 수준 높기 그지없었다······.
저녁이 되었다. 방으로 수도사들이 식사를 가져왔고 모두들 조심스레 먹기 시작했다.
롤랑도 끼적끼적 빵을 씹으면서 남 몰래 수도사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느라 시선이 마주친 수도사가 고개를 숙이며 물어왔다.
“하명하실 게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롤랑은 고개를 가로저어 신경 쓸 필요 없노라 전했다.
오리 날개를 씹으며 롤랑은 고개 숙인 수도사를 유심히 관찰했다.
이쪽에서 시선을 주기만 해도 황송한 듯 고개를 조아리는 젊은 수도사. 저 공손함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존경일까, 아니면 일단 비위를 맞춰주기 위한 가면일까?
언뜻 보기에는 전자인 듯싶다. 젖살도 빠지지 않은 얼굴. 젊다 못해 어려보이고 순진해 보이는 저 얼굴에서 다른 마음을 읽어내기란 어렵다.
좀 더 관찰해보던 롤랑은 이내 고찰을 포기했다. 실은 저 수도사가 감시자라느니 교단의 암살자라느니 하더라도 제 눈으로 어찌 알아챌 수 있겠는가.
롤랑은 식사를 마친 뒤 터덜터덜 제 방으로 돌아갔다.
호텔이 부럽지 않은 고급 방.
어쩐지 불안해지는 정경에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웬 조그마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시중을 들게 되어 영광이에요, 기사님.”
문 옆에서 서있던 어린애가 꾸벅 인사해왔다.
롤랑은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내곤 겨우 물었다.
“시중이라고?”
“예. 심부름도 하고, 기사님께서 주무시는 중에 열이 올라오면요, 사제님들께 알려드릴 거예요.”
“너 시동이야?”
“아니요, 전 수도사예요.”
“그런데 왜?”
“환자를 돌보는 건 수도사의 의무예요.”
소년은 비장한 얼굴로 말했고 롤랑은 한숨 쉬었다.
“그래서······ 밤을 새겠다고? 나 이제 열없어. 가서 롤랑 경이 시중은 필요 없으시다 하셨다고 전해도 된다.”
갑자기 소년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될까요?”
“혹시 내쫓기면 혼나는 거냐?”
“아뇨, 그게······ 오늘 밤새면 내일 일과 빠지고 쭉 낮잠 잘 수 있어서요. 내일 피혁 닦는 날이라 힘든데.”
“피혁을 닦아?”
좀 더 말을 섞어보니 이곳의 수녀와 수도사들은 천과 양털 세정작업이 주요 일과라고 했다. 그 천과 양털은 인근 도시의 공업조합에서 받아온 일감인데, 그것을 손질하는 것은 딱히 고생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가끔, 이번에는 내일 해야 하는 피혁 세정작업은 냄새 나고 힘든 일인즉 이 어린 수도사는 그 작업에서 빠질 수 있도록 여기 보내졌다는 것이다.
롤랑이 듣기에도 썩 생소한 일은 아니었다.
‘중세 수도회 같은 운영방식인가? 소환 신전이라더니 꽤나 수수하네.’
“여기 돈 많은 거 아니었나?”
“아닐걸요. 사제님들도 우리랑 똑같은 걸로 하루 두 끼만 드세요. 요즘엔 한 끼. 그 한 끼도 귀리죽 한 그릇이에요.”
롤랑이 말문이 막힌 차 소년이 물어왔다.
“그래서 오늘밤 시중들어도 돼요?”
롤랑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라.”
“고마워요, 기사님.”
롤랑은 소년이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내주고는 침대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아 한 시간 가량을 보내고 나니 옆에서 색색 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흘긋 옆을 보았다. 눈 감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소년이 보였다.
‘혹시 누구한테 발견되면 경을 치는 게 아닌가?’
롤랑은 아예 문을 잠가버리고는 소년을 침대에 눕혔다.
그 몸을 들었다 내려놓았음에도 소년은 깨지 않았다. 간호할 환자보다 먼저 잠드는 시중꾼이라니. 훈련받은 시동은커녕 그냥 꼬맹이가 분명했다.
‘어쩌면 동정심을 이끌어내고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자 일부러 이런 꼬마를 보낸 것일지도 모르지.’
그런 전략이었다면 꽤 성공적인 셈이었다. 아예 보안법의 존재조차 잊고 대화했을 정도니.
그렇다면 하루 두 끼를 먹느니 귀리죽을 먹느니 운운한 것 또한 고의적 발언이었나? 그랬다면 그 역시 성공적이었다. 롤랑은 그 말을 들은 순간 오늘 끼적끼적 먹은 흰빵을 기억하곤 죄책감마저 느꼈음을 기억했다.
아무튼 썩 기분 좋은 대화는 아니었다. 정말 이 신전이 부유하지 않다면, 이 소환된 영웅들은 매일같이 비싼 빵과 고기를 먹어치우는 돼지 무리로 여겨질 터였다.
그리고 그만 처먹게 하고자 도축해버릴지도 모르지.
롤랑은 우울하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역시 제이슨이 옳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
침대 위로 내리쬐는 햇살과 함께 하루가 시작되었다.
먼저 일어난 롤랑은 아직 자고 있는 소년을 흔들어 깨웠다. 질겁하여 일어난 소년이 용서를 빌었다.
“정말 죄송해요! 용서하세요!”
롤랑은 근엄하게 말했다.
“네 죄를 사하노라. 가서 사제님들에게 롤랑 경은 열이 없었고 다 나은 것 같더라 전해주도록.”
덧붙여 롤랑 경이 시중을 반기지 않았노라고 전하라 시키려던 것은 이내 그만두었다.
‘정보 수집을 해야 할 상황이잖아. 만만한 현지인 대화상대가 있어서 나쁠 것 없지.’
그리 생각한 김에 수도사를 시켜 아침식사를 이 방으로 내오게 했다. 그리고 소년과 함께 먹었다.
롤랑은 빵만 한 덩이 집어먹고 나머지는 소년이 먹도록 넘겨주었다. 며칠 굶은 듯이 빵을 뜯어먹는 소년에게 물었다.
“이름은 뭐냐?”
“앤지예요, 기사님.”
“여자였어?”
말해놓고서도 멍청한 질문이었노라 자책했다. 언어가 확연히 다른데 원래 세계에서 여자 이름이었던들 이쪽에서도 여자 이름일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의외로 이쪽에서도 여자 이름이 맞는 듯했다.
“아뇨, 조그말 때 여자이름 쓰면 오래 산답시고 원장님이 그리 지어줘서 그래요.”
우연인가? 아니면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 사이에 언어의 유사성이 있는 것인가?
심지어 작명에 관한 미신조차 꽤나 익숙한 것이다. 생각해 보면 북유럽 신화의 신들도 차용된 세계관이니 그 외에도 여러 문화적 공통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면서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자 여러 화제를 꺼내보았다. 그러나 앤지는 대답이야 꼬박꼬박 했지마는 대화보다 식사에 열중하고픈 모양새였다.
그래서 롤랑도 더는 말 걸지 않고 녀석이 닭다리를 다 먹어치우도록 내버려두었다.
뼈 골수까지 쪽쪽 빨아먹은 후에야 앤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은 롤랑을 향해 제법 모양새를 갖춰 허리를 숙였다.
“잘해줘서 고마웠어요. 기사님 책에도 나온다면서요? 그것도 주인공으로.”
롤랑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더라.”
“그거 꼭 다 읽을게요.”
그것을 무슨 감사 표시라도 되는 양 말하더니 앤지는 떠나갔다.
롤랑은 대강 물로 입을 헹구어 양치한 뒤 방을 나섰다.
짧은 복도를 걸어가자니 수도사들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숙여왔다. 롤랑은 애써 그들을 외면하며 머쓱하게 걸었다.
모두가 있는 큰방에 들어섰다. 카를이 롤랑을 바라보며 물어왔다.
“왜 아침 먹으러 안 왔나?”
“내 방에서 먹었어.”
카를이 미간을 찌푸렸다.
“혼자서? 왜?”
“혼자는 아니고. 어느 꼬맹이랑 말 좀 섞느라.”
카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구랑 말했다고?”
“웬 꼬맹이랑. 보안법은 사제들이랑 대화 안 하기로 한 거잖아? 걔는 그냥 어린애였어. 앞으로 걔 상대로 여러 정보 좀 얻어들을까 생각 중인데.”
“네가 무슨 룰 변호사인가? 멋대로 해석하고 행동하는 건 자제하자, 응? 돌출행동 하는 건 제이슨만으로 충분하다.”
카를은 정말로 불쾌한 표정이었다. 롤랑이 물었다.
“그래서 앞으로 걔랑 말하지 말라고?”
“아니, 이왕 말문 튼 거 계속 대화해봐라. 유용한 정보 들으면 즉각 전달해주고.”
롤랑은 친구의 얼굴을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카를이 물었다.
“뭐야?”
“아니, 너 말투뿐만 아니라 태도까지 진짜 황제처럼 군다고 생각해서.”
일순 카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가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뭐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카를이 입을 열었다.
“기분 나빴음 미안하다. 하지만 알 테지? 우리 중 누군가는 총대 메고 지휘봉 휘둘러야 한다는 거.”
롤랑은 흘긋 아직도 식사 중인 유저들을 살폈다. 다들 끼적끼적 먹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기운이 없어보였다. 카를 같은 누군가가 다그치지 않으면 저들이 생산적인 활동을 할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마지못해 롤랑은 동의했다.
“뭐 그렇지.”
“아무튼 대놓고 명령조로 말하는 건 자제하겠다. 그러니까 너도 독단행동은 자제해줘.”
그 말에 롤랑은 오늘 아침 앤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 무엇을 깨달았던가?
‘이대로는 안 되는 거였지.’
이내 롤랑이 말했다.
“그럼 독단행동이 되지 않게 동의 좀 구하겠는데. 나 신관한테 뭣 좀 달라고 부탁해도 돼?”
“뭘?”
“책.”
카를은 조금 생각해보더니 대답했다.
“그러던가.”
롤랑은 즉시 행동에 나섰다. 복도에 나가 적당한 수도사를 멈춰 세웠다.
“사소한 부탁이 있소마는.”
급히 머리를 조아리는 수도사에게 롤랑은 어느 책의 제목을 말했다.
수도사는 고개를 두 번 끄덕이고는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탁받은 책을 가져와주었다.
롤랑은 받아든 책을 방으로 가져왔다. 유저 몇몇이 다가와서는 책 표지를 보더니 물었다.
“광란의 아마디스? 이걸 왜?”
롤랑은 머쓱하게 대답했다.
“이 소설 주인공이 나라더라고. 읽어둬야 롤랑처럼 구는 데 차질이 없을 것 같아서.”
지금 카를이 걱정하는 것은 유저들이 함부로 입 놀리다 자기네 정체를 들키는 것이었다. 그 사실로 말미암아 롤랑은 생각했다.
‘정체를 들키지만 않을 수 있다면 입 놀려도 되지 않나?’
영웅이 아님을 발각되지 않으려면 연기를 하면 된다.
영웅다운 연기를.
롤랑은 자리를 잡고 앉아 책 표지를 보았다. 제목은 로마자조차 아닌 생소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그러나 롤랑은 읽어낼 수 있었다.
광란의 아마디스.
현실에도 같은 제목의 무훈시가 있었던 만큼 그 비슷한 내용이겠지 싶었는데, 실제 읽어보니 그렇지 않았다. 이 무훈시에서 롤랑은 거인과 괴물들을 죽이고 또 죽이느라 바빠 원전의 롤랑과 달리 연애, 정치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어보였다.
다만 여기서 죽였노라 언급된 거인과 괴물들의 이름은 꽤 익숙했다. 그 중 웬 괴물의 이름은 특히나.
‘에치피? 이 자식은······’
카를과 함께 쓰러뜨린 묘지기 에치피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괴물이었다. 처치하자 황금사과를 내뱉은 놈이었으니까.
이내 다 읽고 나서 롤랑은 간단히 평가했다. 이 책은 무훈시처럼 포장된 게임 플레이 로그인 셈이라고.
그렇다면 게임 내 행적은 전부 실제 역사로 반영된 것인가?
‘하지만 특정 퀘스트를 여러 유저가 각자의 방식으로 해결한 것은?’
그 모든 것이 반영됐을 리는 없다. 도시로 편지를 운반해 달라는 촌장의 퀘스트만 해도 그렇다. 그 심부름은 메인 퀘스트의 일부인즉 유저 수백 명 넘게 완수했을 것이다.
그 사실이 고스란히 반영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가뜩이나 종이가 귀한 고대에 어느 시골촌장이 보수까지 줘가며 수백 장의 편지를 작성할 것인가.
‘모 세계적 RPG에서도 어느 흑룡은 본디 유저들이 쓰러뜨린 레이드 보스였는데, 추후 관련 코믹스가 발매되면서 NPC 국왕이 쓰러뜨린 것으로 설정이 바뀌었지. 그처럼 플레이어 캐릭터의 행적과 공식 설정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흔한 일이야······ 만약 그렇다면 자기가 게임에서 해결한 퀘스트와 괴물 토벌을 여기서도 제 업적인 양 생각하는 건 위험한가?’
이 책에서 분명하게 언급된 내용만 롤랑의 업적으로 여겨야 하나? 하지만 그 역시 위험하지 않을까?
이 책은 역사책이 아닌즉 허구가 상당부분 섞여있을 것이다. 아니면 아예 허구 속에 약간의 역사가 섞여있거나.
그런즉 이 책을 맹신해서는 안 될 것이다. 롤랑이라는 영웅에 대한 역할극 참고서는 되겠지마는.
결국 장편의 책을 다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것은 찝찝함뿐이었다.
< 독방 - [3]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