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방 - [2] >
결국 롤랑은 독방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러나 잘 때만 그러기로 했고, 하루의 대부분은 유저들이 모인 큰방에서 보내야 할 터였다.
롤랑은 독방에서 나와 예의 큰방에 가보았다.
복도를 걷던 와중 큰방 안에서 웬 큰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 너머로 금속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였다. 순간 섬뜩하여 롤랑은 무작정 달려 나갔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보인 장면에 안도했다.
“방패 꽉 잡고 있어. 지금 찌른다······”
무기를 쥔 두 명이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짜 전투는 아닌 듯했다.
한 명이 큰 방패로 앞을 막은 가운데 웬 적발 남자가 대각선으로 빠르게 움직이더니 방패 위로 검을 내찔렀다. 찡 하는 소리가 울리자 적발은 검을 회수하더니 이번에는 한 번 휘두르고, 두 발짝 퇴보했다.
일련의 동작을 마치고는 만족스레 웃더니 말했다.
“보법(步法)? 아니, 그건 너무 무협 느낌이니 스텝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발놀림이 자연스레 구사되는데? 장검 숙련이 단순 칼 잘 휘두르는 형태로 구현된 것은 아닌 게 확실해.”
“그럼 실전에서도 싸울 수 있을까?”
“그럴 거 같은데? 저번처럼 싸우기 전부터 얼어붙지만 않는다면야······”
구경하던 롤랑이 방 안에 들어가 물었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대련?”
“대련이라기보다는 게임 캐릭터로서의 전투 기술이 얼마나 발휘될 수 있나 시험해보는 거지. 그런데 이제 서로 존댓말 안 쓰기로 했잖······”
그때 방 안에 있던 유저들이 롤랑을 바라보곤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리의 중심에 있던 카를이 고함질렀다.
“영웅이 귀환했노라!”
그리고 자리에 있던 모두가 박수치기 시작했다. 짝짝, 짝짝짝짝짝짝.
롤랑이 아연한 가운데 사람들이 몰려오더니 그 주변을 둘러쌌다. 그리고 롤랑의 등과 어깨를 마구 두드려댔다. 헹가래까지 하려는 것은 아직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만류해야 했다.
어쨌건 나름 칭송해주는 모양이었다. 롤랑은 머쓱하게 입을 열었다.
“그만해요. 아무튼 며칠이나 지난 거 같던데 그동안 뭐하고 지냈어요?”
카를이 대답했다.
“반말 써, 반말. 다들 그러기로 했으니까. 요 며칠간? 마법은 제대로 써지는지, 게임 캐릭터의 전투 기술은 제대로 발휘되는지 등등을 시험했다. 저번처럼은 안 된다 싶어서.”
그 저번이란 예의 습격을 말하는 것이리라. 롤랑이 물었다.
“그래서 어때?”
“상상 이상이었다. 다들 잘 싸우더군. 사실 다 근육돼지니까 주먹만 휘둘러도 세겠더라만, 무기도 잘만 다루데. 일단 다들 싸울 마음만 먹으면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말투 되게 괴상망측하네.’
그리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은 채 롤랑이 물었다.
“그럼 다들 싸우겠다고 맘먹은 거야? 사제들이 바라는 대로······ 괴물이랑?”
“그건 아니고, 호신 정도는 해야겠다 이거다. 리얼 RPG를 즐길 생각은 아직 없어도 살아남기는 해야지.”
롤랑은 불안하게 물었다.
“아직? 그럼 언젠가는 하겠단 거야? 때가 되면 게임 캐릭터마냥 괴물들과 치고받고 싸워야 하나?”
카를은 즉답했다.
“그럴 순 없지.”
“만약 싸우지 않을 경우 죽이겠노라 협박이라도 받으면?”
“그 경우 차라리 다 같이 탈출이라도 해야겠지. 그 뒤로는 뭐······ 어디 산 속에라도 숨어 살까? 양산박 호걸들처럼?”
롤랑이 생각하기에는 그 경우 양산박보다 탈영병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와 동시에 이렇게 느꼈다.
‘한국에서도 탈영병들 몰골은 말이 아니던데. 중세문명이나마 포기하고 야인처럼 지내는 게······ 가능한 건가? 스마트폰과 동고동락하던 현대인들이?’
그러나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한 번 습격으로 이미 잔뜩 죽은 마당이 아닌가. 외상증후군 환자가 속출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문득 직접 PTSD 환자는 생기지 않았느냐 물어보았다. 그 질문에 카를은 쓰게 웃었다.
“그리 의심되는 치가 세 명 있다. 그런데 그게 PTSD인지 아니면 이 환경에 놓여서 생긴 우울증인지 어떻게 분간하겠나? 슬프게도 우리 중에 정신병 의사는커녕 그냥 의사도 없더란 말이지. 의대생은 한 명 있는데 그 양반이 유사시 자기 믿지 말래. 생쥐 해부도 제대로 해낼 자신 없다나 뭐라나······. 아, 진짜 말투 고정 안 되네.”
수십 명 인원 중에 의사가 없다는 것이 단순 불운한 탓은 아닐 터였다. 애초에 메디아 유저들은 서로서로 백수라 놀리던 치들이니까. 이 중에 전문직업인 수가 유난히 적더라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렇담 의사나 공학자가 이 미개한 중세에 우월한 전문지식을 뽐내는 일은 기대하지 말아야겠군. 나 역시 문과 나부랭이라 초문명적인 활약은 불가능할 테고 말이지.’
그리 생각하고 롤랑은 허탈하게 웃었다.
“정말 우리는 몸만 달랑 왔구나.”
롤랑이 중얼거렸고 카를이 말을 받았다.
“진짜 알몸으로 와버렸지.”
“비유였는데.”
“알아.”
이후로는 모두들 원래 하던 일을 계속했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다시 자신의 상대를 잡아다가 계속 훈련했다.
목검으로 치고, 창으로 받고······.
카를은 그들의 중심에 우뚝 섰다. 팔짱 낀 채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서로 맞붙어 훈련 중인 두 명에게 고함질렀다.
“거기, 너희! 똑바로 세게 쳐! 그따위로 살살 치는 게 무슨 훈련이냐!”
지적받은 유저가 변명했다.
“목검이라도 세게 치면 다치잖아?”
“치유 주문 있으니까 다쳐도 괜찮다! 그러니 막 치열하게 싸워! 실전에서 세게 칠까 말까 망설일 셈이냐!”
카를은 거의 윽박지르다시피 했다. 그 성난 기세를 보며 롤랑은 놀랐다.
‘아까는 분명 기운이 쫙 빠져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무슨 교관이 따로 없네.’
하기야 당연한 일이었다. 목숨의 위기를 넘기고 실제 여럿 죽은 마당인 것이다. 가뜩이나 책임감 강한 카를로서는 위기감에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리라.
롤랑 또한 유저들의 틈에 섞였다. 처음에는 살짝살짝 마법을 시험해보았다. 그러다 이내 대련을 했다.
대련의 상대는 전사 유저였다. 몸 전체가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게다가 저 덩치라니. 자신의 몸 또한 그럴 터였음에도 롤랑은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주변 곳곳에서도 비슷한 대련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시끄러운 와중에 둘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각각 방망이를 쥐었다.
“나 장검 숙련이라 방망이는······”
롤랑이 투덜거리자 대련 상대가 말했다.
“그렇다면 방망이로 검술이 구현될 거요. 이건 검증이 끝난 사실이야.”
그러고는 상대 전사가 상단 자세를 취했다. 방망이를 머리 위로 든 간단한 자세.
별로 길지도 않은 몽둥이를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꼴사나울 법도 하건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금 방망이는 전사의 신체에서 더욱 뻗어나간 연장선이었다. 가뜩이나 거대한 몸을 더욱 거대해 보이게 만드는.
그에 맞서 롤랑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속으로 욕설을 읊조리며 방망이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뭔가 자세를 취해야겠다고 맘먹자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롤랑이 방망이를 얼굴 높이로 들어 올려 얼굴 절반을 가렸다. 자세 겸 검례.
상대 전사가 검을 내리쳐옴으로써 대련이 시작되었다.
롤랑은 오른쪽으로 발을 내딛으며 그 팔을 노리고 방망이를 뻗었다. 공기를 가르며 나아간 방망이가 그 팔의 관절을 치기 직전, 전사가 슬쩍 몸을 회전시키자 방망이는 그 겨드랑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전사는 즉시 어깨를 움츠려 방망이를 자기 옆구리에 끼었다.
롤랑이 힘 있게 방망이를 잡아당긴 순간 그 추진력을 이용하여 전사가 돌진해왔다.
그 시선이 이쪽의 하반신을 향했다. 그렇담 하단 공격이 덮쳐올 것인가?
아니다. 시선마저 속임수다. 롤랑은 알 수 있다.
과연 대각선으로 내리그어질 것 같았던 검은 이내 롤랑의 가슴을 향해 내찔러왔다.
롤랑은 옆으로 이동하여 그 옆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대련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다. 서로 간에 한 번의 유효타 없이 원만하게.
롤랑이 숨을 헐떡이며 손을 내밀었다. 전사는 마주잡아 흔들며 씩 웃었다.
“수고······.”
롤랑도 마주 웃었다.
“수고요. 막 심장이 벌렁벌렁하네요. 아니, 벌렁벌렁하네. 그런데 이거 보호구 없이 싸워도 되는 거였나? 어디라도 한 대 맞으면 바로 골절이겠던데?”
“카를 말대로 치유 주문 믿지 뭐. 아무튼······ 잘 싸웠어, 응.”
이후로도 알찬 시간이 이어졌다.
근접계열 유저들은 목검을, 방망이를 휘두르며 연습했다. 사냥꾼 유저들은 소환사가 꺼내준 활을 들어 사격을 수련했다. 심지어는 웬 냄비뚜껑을 버클러랍시고 가져와 방패막이를 연습하는 유저까지 있을 정도였다.
정진을 위한 연습이 아니라 원래 있는 것을 꺼내기 위한 노력이었다. 게임 캐릭터에게 잠재된 전투기술을 체득하여 만약의 상황에 발휘하기 위한 연습.
몇몇은 신나게. 대부분은 필사적인 얼굴로 각자 전투기술을 연마했다. 거의 죽어가는 표정으로 방망이를 휘둘러대는 유저도 보였지만 롤랑은 그들의 모습에서 희망을 읽었다.
‘어제 몇 명 죽기까지 했는데 바로 개선에 나서다니.’
상황을 지휘하는 카를을 보며 롤랑은 생각했다.
뭔가 좀 나아지는 것 같다고.
그러나 이 희망찬 현장에 폭탄이 엄습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제이슨이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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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아직도 사제들이랑 말 안 섞고 방에만 처박혀 있냐? 사춘기 애새끼도 아니고 뭐하는 짓거리야?”
방에 들어온 제이슨이 맨 처음 꺼낸 말이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카를이 물었다.
“뭐 하러 왔어요?”
“사춘기 애새끼들 달래러.”
“사제들 부탁 받고?”
“그렇지 뭐. 보안법인가 뭔가 어겼다고 욕할 생각 마라? 보니까 너희도 날 동지로 생각 안 하드만. 며칠째 왕따 당하는 와중에 연대의식이 불타오르지 않았으리란 건 명백하지?”
“그래서 신전 편에 붙었다 이겁니까?”
제이슨이 혀를 차더니 대답했다.
“그 새끼들 편 아니야.”
“사제들 부탁 받고 왔다면서 뭔?”
“아, 씹할. 그 새끼들 편 아니라고!”
제이슨은 억울해 보이는 표정이었으나 지켜보는 유저들의 표정은 곱지 않았다.
카를 또한 마찬가지였다. 잔뜩 구겨진 그 얼굴이라니.
‘왜 저리들 싫어하는 거야?’
이대로는 싸우겠다 싶었다. 그것을 막고자 롤랑이 중간에 끼어 물었다.
“그놈의 부탁이란 게 뭔데요? 우리 보고 싸우러 나가라는 겁니까?”
순간 카를이 자신을 째려보는 게 느껴졌으나 롤랑은 무시했다.
제이슨이 말했다.
“아니, 사제들 왈, 최소한 자기넬 없는 사람 취급하진 말아 주십사 하던데?”
“겨우 그거 전하러 왔어요?”
“그건 아니고. 나 혼자 따로 지내면서 파악한 상황이 있거든? 그걸 바탕으로 충고하러 왔다. 너희 계속 이딴 식이면 안 돼. 그러다 다 뒈져.”
욕쟁이 입에서 나온 것치고는 협박조가 아니었다. 수학공식을 설명하는 듯 담담한 어조. 그래서 더욱 섬뜩했다.
제이슨은 계속 말했다.
“이번 습격의 이유, 알고 있냐?”
“황금을 노린 도적의 습격이라고······”
“그래, 그놈의 황금이 문제야. 오프닝 영상 기억하냐? 황금이 무지하게 많았는데 그걸 허공에서 나온 손이 다 가져갔지 아마? 사제들이 말하길 그 황금이 우릴 발할라에서 불러내기 위해 신에게 바친 공물이라더군. 그런데 그 황금을 대준 게 누구일 것 같아?
왕이야. 왕이 자기 금고를 털어 황금을 여기 신전에 보냈대. 나라꼴이 말이 아니니 국가의 명운을 신에게 걸겠답시고 말이야. 그런 값을 치르고 불러낸 너희가 계속 합죽이 행세하고 있으면? 저 왕이나 사제 새끼들이나 다 좆되는 거지. 사제 새끼들은 왕의 금고를 날려먹은 셈이고 왕은 돈도 잃고 체면도 깎인 셈 아니냐? 그럼 저들이 어찌 나올까? 왜 황금 줬는데 폐품을 줬느냐며 신들에게 클레임을 걸 수도 있을 테고······ 당장 이 상황을 덮으려 할 수도 있겠지.
예를 들어 도적으로 위장시킨 용병들을 보내 우릴 전부 쓱싹한 뒤 왕에게 말하는 거야. ‘도적들이 황금을 앗아가 소환의식은 치러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래도 좆같겠지만 그나마 분노의 화살이 도적들에게로 돌아갈 테니 신전 측으로선 보다 낫겠지.”
모두의 얼굴이 굳어갔으나 반박은 나오지 않았다. 제이슨은 실소하더니 말을 이었다.
“아무튼 기억해. 저 새끼들은 너희가 사춘기 애새끼마냥 굴어도 오냐오냐 떠받들어줄 부모가 아냐. 기껏 징병한 신병이 말 들어먹지 않으면 총부리 겨눌 독전관들이지.”
그리고 제이슨은 방을 나섰다.
< 독방 - [2]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