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방 - [1] >
눈 뜨기 무섭게 비명을 질렀다. 온몸이 불타오르는 것 같은 느낌.
롤랑은 한참을 헐떡거리고는 주위를 살폈다.
아무래도 병실이 아니라 침실 같았다. 몸 상태로 보나 온몸에 감긴 붕대를 보나 중환자인데 어째서?
일순 그리 생각했지만 이내 방을 장식한 중세풍 가구들을 보고는 납득했다. 중세에야 병원은 가난한 병자들이 무료봉사를 받는 곳이라 대개 열악한즉, 여력이 된다면 제 침실에서 병구완 받는 것이 이상적이었다던가.
“누구 없······”
롤랑이 중얼거리자 문 밖에서 한 사제가 뛰어 들어왔다.
사제는 상반신을 일으킨 롤랑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내 문 밖을 향해 외쳤다.
“롤랑 경께서 정신을 차리셨습니다!”
뒤이어 문병객들이 들이닥쳤다.
들어온 자들 역시 사제들이었다. 사제들은 떨떠름해 하는 롤랑 앞에 무릎 꿇었다.
다음 순간 롤랑은 아픈 와중에도 기겁했다. 신관들이 자신을 향해 큰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납작 엎드린 채 신관들은 복창하듯 외쳤다.
“염치불구하고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선은 롤랑 경이 없었더라면 습격을 막아내지 못했으리란 칭송. 그리고 자기네가 습격을 대비하지 못한 탓에 고귀한 영웅들이 허망하게 쓰러지고 말았다는 사죄 및 하소연이 뒤를 이었다.
“그 악적들은 이 신전에 운반된 황금을 노리고 습격해온 모양입니다. 그 황금은 영웅들을 부르는 대가로 신들께 바치고자 준비한 공물이었지요. 이 신전까지의 운반은 궁정 기사들이 담당했으므로 넘볼 수 없었지만 그들은 떠나간즉, 이제 지키는 병력이 없으리라 판단하고 습격해왔을 터입니다······”
롤랑은 무덤덤했으나 사제는 그 낯에서 무슨 의문을 읽었는지 멋대로 설명을 이었다.
“죄다 추측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심문할 상대가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경께서 모조리 처단하셨으니까요. 정말이지 그런 무용을 볼 수 있을 줄이야······”
포로 하나 잡지 않고 죄다 죽여 버렸다. 그 멍청하고도 흉악한 행위를 사제는 나무라기는커녕 오히려 칭송하는 듯 주절거렸다.
“일이 끝난 후 시체를 추슬러 파악했기로 경께서 처단한 악적이 사 할을 넘었더군요. 과연 무훈시가 올바로 진실만을 노래하고 있었음을 깨우치게 된 날이었습니다.”
이후로도 광전사가 얼마나 큰일을 해냈는가, 하는 칭송만을 들어야 했다.
롤랑으로서는 예의 광전사와 자신을 동일시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동일시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는 알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자신은 무얼 했는지.
롤랑은 광폭화한 이후, 그러니까 트랜스 상태에 빠진 이후의 일들을 떠올렸다.
방에 있던 적들을 쓰러뜨린 후 도망친 적을 뒤쫓아 달려 나갔다. 그리 흥분한 채로 옆방에 갔다가 친구의 시체를 보았다.
온몸에 화살이 박힌 채 쓰러진 자객 유저의 시체였다. 그때 느낀 통분을 롤랑은 기억했다.
슬픔과 울분이 뒤섞여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맹렬한 복수심이 치솟았다. 그 와중에 머릿속에서는 죽은 친구의 이름이 메아리쳤더랬다.
‘토렴.’
그 이름을 떠올린 순간 흘러내린 눈물에 롤랑은 당혹했다. 게임 친구의 죽음에 눈물이라니? 물론 슬픈 일이기는 하지만, 감정이입할 만큼 썩 친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당시의 광전사 역시 친구의 죽음에 통곡했고 반드시 복수를 완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 하고자 피비린내가 풍기는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이윽고 광전사는 계단을 올라 적들로 짐작되는 무리들을 발견했다. 당연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달려 나가 적들을 베고 물어뜯으며 죽였다. 광전사니까.
‘그러다······’
그 끝에 죽었다. 삐죽한 화살에 꿰뚫림으로써.
그 순간 느낀 바닥의 감촉을 롤랑은 기억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룬 문자가 빛나더니 다시 몸이 일으켜졌다는 사실 또한 기억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소생한 광전사는 다시 맹렬하게 싸웠다. 그렇게 죽이고 또 죽인 끝에 적들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남자를 발견했다. 이미 패색이 짙은 형국에 전의를 상실한 남자였다.
광전사는 남자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굴욕스럽게 붙잡힌 채 공포에 질린 지휘관이 외친 말을 지금에서야 기억했다.
‘죽이지 마시오! 항복하겠소! 항복! 제발!’
그 말을 당시 롤랑은 들어먹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광전사는 마구 비명 지르는 남자의 가슴을 칼로 도려냈다. 그리고 그 안에 박동하던 시뻘건 것을 꺼내들며 이 전리품을 오딘께 바치노라 고함질렀다.
그로써 사실상 싸움이 끝났다.
그러나 광전사는 칼질을 멈추지 않았는데, 이유인즉 아직 적들이 조금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들이 전의를 상실했으며 살려두는 것이 이득이란 사실에 광전사는 관심이 없었다.
이내 모두 죽였다.
이윽고 트랜스 상태가 풀렸으며, 온몸이 만신창이였던 롤랑은 그대로 쓰러졌다.
이 끔찍한 사건의 일부는 자신이 주도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감은 나지 않았으나 무덤덤하지도 않았다. 당시의 흥분이 아직도 손을 떨리게 했기에.
진정하고자 물이라도 한 잔 마실까 했다. 그러고자 이불 밖으로 손을 빼려다 말았다.
‘아니, 이 꼴을 보이면 안 돼.’
롤랑은 떨리는 손을 이불 깊숙이 쑤셔 넣어 감췄다. 전투후유증에 시달리는 꼴이라니? 영웅답지 않다.
다행히도 뭔가 눈치 챈 기색 없이 사제는 계속 말했다.
“정말이지 롤랑 경과 제이슨 대선배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모두 죽고 말았겠지요. 아, 혹시 함께 싸운 자들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서리거인이며 발키리 같은 자들 말입니다. 전부 제이슨 선배께서 불러낸 소환물들이었습니다. 예식 때 가끔 나오곤 하는 발키리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기록에나 남아있던 존재들인데 설마 그들이 나타나 고대의 영웅과 함께 적들을 물리칠 줄이야, 이 감격을 어찌······”
문득 침묵 서약을 잊고 롤랑이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예를 들어 카를은······”
사제의 얼굴이 침통해졌다.
“그 분께선 무사하십니다. 다만······ 많은 영웅들께서 허망하게도 스러졌지요. 저희가 무구 한 벌 드리지 않은 탓에······”
이후로도 중얼중얼, 횡설수설.
한참을 떠들던 사제들이 방을 나선 것은 이십 분이 지나서였다.
신관이 나가기 전 건네준 물약을 마시니 열이 좀 가라앉았다. 숨 쉬기가 좀 편해진 가운데 대령된 죽 한 그릇을 들어올렸다.
죽을 먹고 있자니 또 다른 누군가가 방에 들어섰다.
“좀 어떤가?”
고개를 돌려보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롤랑은 웃음을 흘렸다.
“말투 듣고 웬 높으신 분 온 줄 알았네. 카를 대제로서 위엄 갖추기라도 하려는 거야?”
롤랑의 물음에 카를은 엄숙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하지. 격식 좀 차려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투를 꾸미기로 했다. 아무튼 좀 괜찮나? 치유 주문은 만능이 아니므로 꽤나 열이 오를 거라더군. 그 말대로 며칠이나 앓았다. 옆에서 간호하는 중 네가 죽는 게 아닌가 싶었을 정도로.”
롤랑은 그 말투 무지 어색하니 그냥 원래대로 지껄이라 내뱉으려다 말았다. 게임에서도 문어체를 즐겨 쓰던 녀석이 아닌가.
롤랑이 물었다.
“네가 간호했다고?”
“만능이 아니건 뭐건 치유 주문을 걸어줄 사람이 필요했고. 사제들이 뭔 짓을 할지 몰랐으니까.”
“뭔 짓을 하긴 뭘 해?”
“중세 놈들 의학수준으로는 의료행위가 테러행위 될 수도 있지 않나.”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롤랑은 애써 입을 열었다.
“음, 그래. 고마워.”
“고맙기야 내가 고맙지. 정확히는 우리가.”
오늘은 날 칭찬하기로 정한 날인가? 롤랑이 떨떠름해하는 차, 카를은 말했다.
“네가 없었으면 다 죽었지.”
롤랑이 답했다.
“광폭화 덕분이었지 뭐.”
“아니, 그 자리에 광전사는 너 말고도 둘이나 더 있었다. 나선 것은 너 하나였고. 물론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졸아들어서는 벌벌 떨기만 한 것은 나머지도 모두 마찬가지였으니까.”
갑자기 반성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롤랑은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 뭐. 그 왜, 해병대 총기난사 사건? 지들이 괴롭히던 후임이 총 들고 달려오니 귀신 잡는 해병대원들이 죄다 빤스만 입고 도망친 사건도 있잖아. 패닉 상태면 다 그리 되는 거지. 우리야 뭐 누구 괴롭히다 당한 것도 아니고 서로 욕할 거 있나?”
“욕먹지 않는다고 해서 해결될 게 아니니까. 우리는 그 상황에 칭송 받을 활약이라도 해야 했어. 그러지 못해서 여럿 죽었고.”
카를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문득 롤랑이 물었다.
“그런데 여기 내게 주어진 독방이네? 침대도 돌아왔고. 몸 좀 나아지면 다시 그 큰방으로 옮겨야겠지?”
“아, 그건 됐다. 그냥 쓰는 게 나을 것 같아.”
“왜?”
“이번 습격, 이유를 짐작하고 있나?”
롤랑은 아까 들었던 이유를 떠올리고 대답했다.
“황금을 노린 습격이라던데?”
카를은 쓰게 웃었다.
“단순 도적떼라기엔 적들의 수준이 너무 높지 않았나?”
“도적이 아니면 뭔데?”
“모르지. 아무튼 비관적으로 생각하자면······ 저 신전 놈들이 비협조적인 우리를 손보고자 일을 벌인 것일 수도 있지 않나.”
롤랑은 조금 생각해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닐 거 같은데. 우리가 여기 온 지 겨우 하루 지났다고. 그걸 못 참고 징벌에 나설 리가?”
“비약이 심했긴 했지. 아무튼 이번 일로 우리는 위대하신 고대 영웅이든 뭐든 실은 약자에 불과하다는 게 드러났다. 그러니까 너는 이 방에 지내는 게 낫지. 멋대로 방 옮기는 등 대놓고 신전의 반감을 사는 것은 위험할지 모르니······”
“그럼 나 계속 혼자 지내야 해? 솔직히 불안한데.”
그 말에 카를은 쉽게도 대답했다.
“그럼 같이 지내도 되고.”
“뭐?”
“앞서 말한 건 그냥 내 의견을 말했노라 생각해라. 선택은 네게 맡길게. 나도 어찌 행동해야 좋을지 확신이 안 되고 그냥 어렴풋이 추측만 할 뿐이니까. 솔직히 내가 뭘 안다고 지시하겠어? 내게 무슨 정치적 감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난 그냥 완장 차고 나서길 좋아하는 병신이야.”
순식간에 말투가 돌아와 버렸지만 거기 신경 쓸 수는 없었다.
저 자기비하는 이번 일로 자신감을 잃은 데서 비롯된 것일까? 롤랑은 뭐라 위로해야 할지도 알지 못해 그저 입을 다물었다.
카를은 조금 더 있다가 방을 나섰다. 그 후로도 시간이 흘렀다. 약기운이 떨어졌는지 롤랑의 몸에서 열이 다시 올라왔다.
롤랑은 누워서 땀을 흘려대며 앓다가 정신을 잃었다. 그 후로 세 시간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죽 한 그릇 먹은 뒤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 푹 잠든 다음 일어나 보니, 열이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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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방 - [1]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