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9화 (9/164)

< 위층 복도 - [4] >

순식간에 두 명이 끔찍하게 죽었다. 그러나 빽빽이 자리 잡은 나머지 창잡이들은 물러날 데가 없었다. 그저 그 자리를 지키기에 급급하던 차, 선열에서도 비명이 울렸다.

“온다!”

이쪽의 소요를 읽었는지 소환물들이 접근해오기 시작했다.

“이십 보!”

분명 죽여 없앴건만, 어느새 다시 불러냈는지 푸른 야수가 불길을 휘날리며 달려왔다. 그 뒤를 서리거인이 뒤따르며 거대한 발소리를 울렸다.

“십오 보!”

괴물을 칼로 상대하기는 벅찰 것이다.

이때야말로 창수들이 나서야 하련만. 후열의 창잡이들은 전황에 신경 쓸 수 없었다. 살아남기 급급한 와중에는 대국적인 시야를 가질 수 없는 법이다.

“아, 아아아아, 아아악!”

광전사가 날뛰고 있었다.

후열의 창잡이들로서는 그저 눈썹을 한 번 꿈틀인 순간이었다. 광전사의 손에서 칼이 한 번 번뜩였고 두 명이 죽었다.

이 초 후에는 네 명이.

순식간에 창잡이들은 열 명 넘게 쓰러졌다. 그리하여 빈 공간이 생겨난 덕에 창을 내찌를 수도 있게 되었다. 그렇다 한들 뭔가 할 용기는 생기지 않았지마는.

창잡이들은 뒷목의 털을 쭈뼛 세우고 무기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서로를 돌아보며 속삭였다.

‘빙 둘러서 저 새끼 포위하고······ 신호 내리면 다 같이 찌르는 거야.’

그 작전대로 하는 와중에도 여섯 명이 죽었다. 광전사는 거의 잘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뛰며 사람을 죽여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광전사가 눈앞의 적을 죽이는 데 바빠 포위망 구성을 방해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여덟 명의 창잡이가 광전사를 둘러쌌다. 모두들 침을 삼키며 신호와 함께 달려들었다.

“찔러!”

그리고 광전사는 웃었다.

광전사 단 한 명을 향해 여덟 창이 덮쳐왔다.

저들로서는 동시에 내찔렀겠지만 광전사의 눈에는 그리 보이지 않았다. 그 창마다의 미세한 차이가 광전사의 눈에는 매우 노골적으로 보였다.

맨 먼저 자신의 가슴을 노리고 찔러오는 창을 보았다. 광전사가 칼을 슬쩍 뻗어 그 진로를 방해하는 것만으로 창의 궤도가 꺾였다. 같이 찔러 오던 다른 창의 물미에 꽂히도록.

옆구리를 노리고 오는 창은 둘. 광전사가 몸을 약간 휘젓자 두 창대는 양 겨드랑이 사이에 끼었다.

경악하는 두 놈의 표정이 광전사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광전사는 흥겹게도 몸을 회전시켰다. 겨드랑이에 창 두 개를 끼운 그대로.

그 회전 속도는 뒤에서 내찔러온 창이 광전사의 등에 닿기보다 빨랐다. 주인의 손에서 강탈된 창은 빙 돌아 기다란 원을 그렸다.

창대와 그에 닿은 상대의 뼈가 동시에 으스러졌다. 오오독, 하는 소리가 나더니 포위하고 있던 일곱 명이 나자빠졌다.

“억······”

그리하여 불과 사 초 만에 짧은 포위는 끝났다. 이제 광전사는 다시 날뛸 뿐이었다.

광전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냥감을 찾아서.

그 눈에 먹음직스러운 등짝이 보였다.

이 상황을 지켜본지라 이미 주변 용병들의 낯에서 핏기가 가신 채였다. 그 중 한 명은 아예 직업정신 따위 내팽개치고 달아나고자 했다.

놈이 내보인 뒷모습이 광전사를 흥분시켰다. 달아나는 사냥감은 쫓아가서 잡아야 하는 법이다.

“멈, 춰!”

광전사가 즉시 달려들었다. 푸숙, 하고. 그 비겁한 등에 칼날을 쑤셔 박았다 뺐다.

이처럼 나약한 사냥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광전사의 눈에 창을 이쪽에 겨눈 용병이 보였다. 그 용병은 광전사를 왼쪽에 두고자 오른쪽으로 슬슬 이동하고 있었다.

교본적인 십자 자세. 창대를 잡은 위치도 괜찮은 것이 나름 전문적으로 익힌 것 같다.

그 용병이 중얼거렸다.

“살려줘, 새끼야. 여기 보지 마······”

안면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놈은 창을 휘휘 휘두르며 이쪽의 접근을 차단하려 했다. 얼핏 보면 발악하는 것 같아도 제법 격식이 있는 동작이었다.

그래서 광전사 역시 격식 있게 응수했다.

광전사가 성큼성큼 다가가자 용병은 괴성을 내지르며 창을 찔러왔다.

쭉 뻗어 이쪽의 안면에 다가오는 창날. 그러나 창날이 머리칼도 건드려 보기 전에 광전사의 손이 창의 물미를 잡았다.

“씹, 할!”

용병은 비명 지르며 창을 잡아당겨 빼고자 했으나 창이 조금도 회수되지 않았다.

용병은 지체 없이 창을 버리고 장검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검신이 절반쯤 뽑히기도 전에 그 손목이 날아가 버렸다.

끔찍한 비명소리가 뒤따랐다.

손목이 날아간 적은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 하지만 광전사는 그 목에 칼을 꽂아 그르륵,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듣고서야 만족했다.

이내 다음 사냥감을 찾았다.

아직 많이도 널려있었다. 광전사가 달려들었다.

공포에 찬 사냥감의 가랑이 사이에 광전사가 칼날을 쑤셔 박았다. 고통에 찬 표정을 즐겁게 바라보며 피 흐르는 가랑이에 발길질.

울려 퍼지는 비명이 달콤했다.

주변 용병들이 움찔하던 와중에도 용사가 있었다. 한 용병이 조용히 창을 들어서는 어깨에 힘을 주었다.

저 괴물, 광전사는 등을 돌리고 있다.

지금이다. 창을 던지자.

찌를 수 있다······..

던져진 창은 광전사의 손에 부드럽게 잡혀버렸다. 마치 그러기 위해 던져진 듯 자연스러운 안착이었다.

용사는 차마 비명 지르지도 못했다. 던졌던 창이 그 주인에게 돌아와 배를 파고들어 등으로 빠져나왔기에.

이후로는 용사가 더 없었다. 전의를 상실한 용병들은 고깃덩어리에 불과했고 광전사는 썰기에 바쁠 뿐이었다. 그리고 푸주한이 쓰는 칼이 그러하듯, 광전사의 손에 들린 칼은 뇌수와 기름기에 범벅되어 더 이상 날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제 용병들의 살은 예리한 검날에 잘리는 것이 아니라 가공할 힘에 강제로 끊겨나갔다. 때문에 주변에 울린 소리는 ‘서걱’이 아니라 ‘우직’ ‘뿌드득’ 따위였다.

후열이 붕괴하다 못해 죄다 달아나기 시작한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달아나는 겁쟁이들을 광전사는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았다. 살의와 경멸에 찬 광전사의 눈에 유독 무장상태가 좋은 누군가가 보였다.

광전사가 기사를 가리켰다.

“아, 아아아. 너.”

저놈. 방에서 보았던 놈. 황제에게 흉기를 박아 넣은 놈들과 함께 있던 그놈.

광전사는 포효하며 기사에게 달려들었다.

지나가는 길을 가로막는 놈들을 베고, 또 베면서 일직선으로 달려들었다.

기사는 광전사가 자신을 향해 다가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포에 차 도주하며 더 빨리 달리고자 하다가 발이 엉켜 넘어지고 말았다.

억 하고 엎어진 기사의 등에 묵직한 충격이 가해졌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 광전사가 그 등을 짓밟은 것이다.

기사는 울면서 고함질렀다.

“항복이요 항복! 항복! 죽이지 말·····”

뒷말은 잇지 못했다. 광전사가 그 머리채를 휙 당겼다. 그 강렬한 힘이 엎어진 기사를 뒤집어 위를 보고 눕게 만들었다.

광전사의 시뻘건 눈을 똑바로 보게 된 기사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박동하는 가슴팍 위에 광전사가 걸터앉았다.

광전사는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단검을 주워들었다. 기사는 저 괴물이 무얼 하려는지 알아채고 비명 질렀다.

“하지 마세요! 하지 마세요!”

그러나 광전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역수로 쥔 단검을 그 미간에 겨냥하고 내리찍었다. 아작 나는 소리와 함께 기사의 얼굴은 두 짝으로 갈라졌다.

원수를 처단한 광전사는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원수를 처단했노라—!”

그 포효가 너무 컸기에 뒤따른 줄 튕기는 소리, 그리고 화살이 공기 가르는 소리가 묻혔다.

날아온 화살은 광전사의 등에 정확히 내리꽂혔다. 세 발이나.

광전사는 신음하며 뒤돌아서려 했다. 그러나 화살이 세 발 더 날아왔다.

두 발은 쳐냈으나 나머지 한 발이 가슴에 꽂히고 말았다.

광전사는 으르렁대며, 후열이 사라진 나머지 고스란히 보이게 된 사수들을 노려보았다.

광전사가 힘겹게 몸을 일으킨 순간, 화살 한 발이 더 날아왔다. 쳐내려 했으나 팔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내 화살은 정확히 배에 꽂혔다.

광전사는 피를 토하며 고꾸라졌다.

이 가공할 위업에도 불구하고 사수들은 썩 기뻐 보이지 않았다. 자기네 운명이 저 광전사보다 낫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감했기에.

“니미···· 씹할·····”

후열뿐만 아니라 전열 역시 반쯤 붕괴된 채였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선 푸른 거인이 예비동작을 취했다. 거인은 땅에 널브러진 시체를 들더니 이쪽에 던져버렸다.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용병 두 명이 시체에 적중 당했다.

시체에 깔려 두 명이 나자빠진 틈으로 공격이 가해졌다. 두 번 죽었으나 그래도 다시 나타난 푸른 야수가 덮쳐온 것이다.

또 다시 새된 울부짖음.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애당초 제 몸을 아끼지 않는 듯, 야수는 온몸을 뒤틀며 주변에 열을 흩뿌렸다. 어떻게든 그 난동을 멈추고자 사방에서 검을 찔러 넣었으나 검을 통해 전해진 불꽃이 용병들의 살을 태웠다.

고기 구워지는 소리, 그리고 비명.

푸른 야수를 어떻게든 치워내고자 보병들이 발악하는 가운데 한 줄기 번개가 대열의 중심을 관통했다.

번쩍하더니 세 명이 쓰러졌다.

번개가 날아온 방향에는 룬 창을 쥔 발키리가 우뚝 서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지켜선 흑기사 소환물도.

난전 와중 소모되는 것은 용병들뿐이었다. 빈틈없이 구성한 대열은 오히려 용병들의 발목을 잡았다.

그 와중에 후열에서 나름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미친놈 뒈졌다. 사수들 다시 전방!”

누군가가 그리 외친 순간, 발키리가 용병들 너머로 시선을 보냈다. 그녀의 희뿌연 눈에 쓰러진 광전사가 들어왔다.

안 될 일이지. 발키리가 입술을 달싹였다. 소생 주문을 외우기 위해서.

그러나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키리의 눈에 부들거리는 광전사의 몸이 비췄다. 사후경직? 아니었다. 저것이 부활의 징조라는 것을 발키리는 알아보았다. 그래서 내버려두었다.

과연 회색빛이 광전사의 몸에 퍼지더니, 이내 화살이 툭툭 뽑혀 나오고 움푹 파인 그 살이 급속히 돋아나기 시작했다.

이내 광전사가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돌격.

전방을 향해 장전하던 사수들은 곧장 광전사의 습격을 받아야 했다.

******

< 위층 복도 - [4]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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