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층 복도 - [3] >
괴한은 기사였다. 편력 기사로서 마상시합장을 전전하다 어느 날엔가 강도 겸 용병으로 전락해버린, 흔해빠진 강도 기사.
옛날에는 기사 소설도 주워 읽곤 했기에 전설과 신화도 제법 알고 있었다. 그 지식으로 방금 맞닥뜨린 그 괴물을 명명하자면 하나밖에 없을 터였다.
광전사.
옛 주신 오딘의 추종자들. 오딘이 세계수 가지에 매달림과 함께 사라져버린 괴물들.
“지원! 지원 좀!”
뒤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같이 도망친 동료의 목소리다. 도와달라고 울부짖고 있다. 잡혔나 보다. 하지만 뭘 어찌? 도우러 갔다가는 같이 죽어줄 뿐이라는 것을 안다.
필사적으로 달려 옆방 앞에 도착했다.
‘지금쯤 안에서 자고 있던 놈들을 모두 해치웠겠지. 합류하여 그 괴물의 존재를 알리고 다 같이 쏴죽이든가 해야······.’
그러나 방에서 이상하게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횃불 한두 개 든 것으로는 불가능할 만치.
불안하게 방 안을 바라본 기사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방 안 광원이 등불이나 화톳불 따위가 아니었기에.
‘괴물?’
털 대신 푸른 불꽃을 휘날리고 있는 야수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놈에게서 나는 불빛 때문에 방 안은 휘황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야수 옆에 선 남자들. 복장만 봐도 결코 기사의 동료가 아니었다.
“누구야?”
방 안의 남자가 이쪽을 노려보며 물어왔다.
기사가 주춤하는 차 방 안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에 누구 왔어?”
“모르는 새낀데, 복장 보고는 분간 못하겠어. 피범벅이라.”
“닉네임 물어봐. 닉네임이 뭔지 알고 있으면 유저겠지.”
이내 야수 옆에 선 남자가 물어왔다.
“너 닉네임 뭐냐?”
기사로서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다른 한 가지 사실은 이해했다.
동료들은 실패했다는 것. 심지어 전멸했다는 것.
기사는 죽어라 달리기 시작했다. 방 안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멀어져갔다.
“도망치는데. 어째? 소환물 보고 쫓아가라 해?”
“몰라, 마!”
다행히 추격은 없었다. 그러나 기사의 심장은 계속해서 박동했다.
‘그 야수는 뭔가? 소환 신전이니까 일종의 소환물인 건가?’
기사는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필사적으로 궁리했다. 역시 아군과 합류해야 할 터였다.
계속 달려나간 끝에 계단이 있었다. 어두운 그곳을 바라보며 기사는 생각했다.
‘위층은? 소환 사제들 치러 간 놈들은?’
아래층은 예비대일 뿐이고 본대는 위층으로 갔다. 그들은 어찌 됐을까? 작전대로 사제들을 다 죽였을까? 지금 일층의 참상을 보니 역으로 당해버린 것은 아닐까 불안했다.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고함소리에 기사는 소스라쳤다.
“토려어어어어어엄! 토오오려어어어엄!”
광전사의 포효였다.
기사는 공포에 질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어 등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뭔······ 롤랑? 옆방도 무사한가? 그럼 안 도우러 가도 되나?”
“돕고 싶음 가든가 말든가 맘대로 하라고! 개새끼가 왜 자꾸 동의를 구하려 들어. 내가 돕지 말라 그러면 나중에 옆방 새끼들 다 뒈진 게 내 탓이라 할 셈이냐······”
다행히도 뒤에서 쫓아오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 틈을 타 기사는 부리나케 뛰어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이 층에 도달한 즉시 상황이 좋지 않음을 깨달았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음, 비명, 고함, 금속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야수의 포효······.
조용한 암살현장이 아닌 치열한 전투의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습격 실패?’
일순 도망칠까 했으나 그랬다가는 광전사가 쫓아올지 몰랐다. 차라리 본대에 합류하고자 달렸다. 복도는 어두웠으므로 불빛을 찾아 달렸다.
본대와는 곧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광전사니 뭐니 지껄일 짬이 없었다.
“삼십 보(步)!”
꽤 넓은 복도를 용병들이 빈틈없이 틀어막고 있었다.
선열은 검과 버클러를 찬 경장보병들. 후열에는 창잡이들이 긴 창을 들어 앞을 향했다. 그 사이에는 쇠뇌를 든 사수들이 대기했다.
이 대열이 쉬이 뚫릴 것 같지 않지만 괴한은 오한이 들었다. 이렇게 방어진을 형성한 것 자체가 완전한 기습 실패를 암시했으므로.
게다가 복도 너머에 있는 저 괴물들은 또 무엇인가.
‘씹······, 뭐야 저거?’
우선 보이는 것은 파란 피부의 거인이었다. 그 옆에는 흑요석처럼 번들거리는 갑주의 흑기사가 우뚝 서있었다.
1층에서도 봤던, 온몸에서 불길을 휘날리는 야수도 한 마리······.
마지막으로 웬 갑주로 무장한 여자. 그 등에 돋아난 맹금류의 날개를 보니 분명 발키리일 것이다.
소환사가 불러낸 존재들이 분명하다.
그 존재감 넘치는 넷은 거대한 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소환 회랑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저 너머에 당시 습격의 목표였던 사제들이 있으리라.
정신 나간 일이었다.
‘저 네 마리 못 때려잡아서 용병대가 발이 묶였다고?’
용병대와 그들을 막아선 네 체의 소환물. 두 무리는 일정 거리를 둔 채 대치하고 있었다.
이내 용병 지휘관이 고함질렀다.
“이십오 보!”
이 대치 구도를 깨려는 듯, 푸른 야수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십 보!”
저 구령은 푸른 야수와의 거리를 말하는 듯했다.
야수가 내뿜는 빛 때문에 놈이 다가올수록 눈이 부셨다. 용병들은 눈을 질끈 감으며 놈과의 충돌에 대비했다.
“십오 보······ 창 들어!”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던 야수가 잠시 멈추더니, 이내 달려오기 시작했다.
“발사!”
놈을 향해 겨누어진 쇠뇌가 일제히 발사되었다. 몇 개가 명중하여 야수는 고통스레 포효했으나 그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내 놈이 덮치려는 듯 도약했다.
모두들 창을 높이 들어 올렸다. 덮쳐온 야수는 삐죽 솟아난 창 두 개에 관통되었다. 야수의 배에 박힌 창은 그 등을 찌르고 솟아나왔다.
“죽였······”
그 창의 주인들은 죽은 야수에 깔려 함께 죽었다.
이윽고 야수는 푸른 불꽃으로 화해 사라졌다. 소모가 있었지만 어쨌건 막아냈다는 생각에 모두의 어깨 힘이 빠져나가던 그때, 후열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후열에 습격!”
이어서 들려온 포효에 기사는 몸이 굳었다.
“너희 영혼으으을!”
거대한 포효와 함께 피분수가 치솟았다.
기겁하여 뒤를 돌아본 용병들의 눈에 보인 것은 광전사였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미친 듯이 칼을 휘젓는 그 꼬락서니. 달리 표현할 수 없었다.
“오딘께 바친다아아—아—!”
한 명의 급습이라기엔 너무나 큰 파문이 번졌다.
광전사는 후열을 담당하던 창잡이들 한 가운데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손에 잡힌 모든 목을 졸라 죽이고, 베어 죽이고, 찔러 죽였다.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인 속도로.
창을 뻗기에는 복도가 너무 좁았고 동료들이 뒤섞여 있었다. 뒤늦게나마 창잡이들은 예비로 찬 장검을 빼들었으나 이 또한 소용없었다.
웬 용병이 비명처럼 고함질렀다.
“막아!”
광전사가 검을 내리쳐왔다. 섬뜩할 만치 커다란 파공음과 함께.
창잡이는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쨍 하는 소리. 다음에는 칼을 쥔 손에 강렬한 충돌이 전해졌다.
막아냈구나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찡 하는 소리에 이어 콱, 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하여 창잡이의 시야는 일순 붉게 물든 다음 암전되었다. 칼날을 부순 그대로 내리친 장검이 그 두개골을 쪼갠 것이다.
“한 노옴!”
광전사는 창잡이의 배를 걷어차 놈의 두개골에서 장검을 빼냈다. 그 빠져나온 반탄력을 이용해 검을 휘둘러 다음 목표물을 노렸다.
칼날이 그린 곡선은 노린 방향과 정확히 맞닿았다.
불운한 목이 몸에서 떨어지고 피분수가 치솟았다.
< 위층 복도 - [3]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