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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의 트롤랑-7화 (7/164)

< 위층 복도 - [2] >

사방이 하늘빛이었고 실제로 하늘 같았다. 발 디딘 곳은 거대한 나뭇가지였는데 그 사실은 사방을 둘러싼 구름에 가려져 쉬이 깨달을 수 없었다.

롤랑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겨우 멈췄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기에.

‘롤랑, 내 가장 총애하는 전사······. 괴로이 목 매달린 채로도 네 전쟁은 나를 들뜨게 하노라.’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들어 보니 나뭇가지에 웬 노인이 있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노인.

노인은 나뭇가지에 목이 매달려 축 늘어져 있었다. 목이 졸린 탓에 하나밖에 없는 눈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달랑거렸다.

저 교수형 당한 노인이 전쟁신 오딘이라는 것을 롤랑은 알아챘다.

바로 무릎을 꿇고 경배를 올렸다.

이 열정적인 추종자 앞에서 오딘은 혀를 기괴할 만치 쭉 내민 채 웃었다.

‘너는 수많은 적을 죽이고 또 죽여 그 영혼을 내게 바쳐왔다. 그 전리품들을 모아 귀한 룬을 빚어냈다. 등을 보이라. 보상차 룬을 새겨줄 터이니.’

롤랑은 무릎 꿇은 그대로 뒤돌았다.

등 뒤에서 오딘이 물어왔다.

‘그래, 어느 룬을 원하지?’

롤랑은 기도하듯 대답했다.

“신성한 룬 문자를······.”

‘나의 투사로서 기적을 행사하길 원하는가? 그리 되리라.’

곧이어 등에서 뜨거운 통증을 느꼈다. 인두로 지지는 고통, 그러나 이것은 주신께서 내리시는 고통이다. 롤랑은 이를 악물고 신음소리도 내뱉지 않았다.

인고의 시간이 지나 마침내 오딘이 말했다.

‘이제 나의 기적을 네 손으로 사역할 수 있으리라. 영광스럽게 그 힘을 휘두르라. 그리하여 더 많은 영혼을 내게 보내, 네 목 매달린 주신을 기쁘게 하라.’

******

광전사가 눈을 떴다.

그 충혈 된 눈은 상대가 든 쇠뇌를 향했다. 쇠뇌라는 것 자체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광전사가 날뛰던 시대에는 없던 병기였으니까. 그러나 무슨 용도인지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파악하기도 쉬웠다.

놈을 향해 똑바로 질주했다.

쇠뇌수를 지키고자 두 명이 막아섰다. 각자 왼손에 쥔 버클러를 들어서는 그 진로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장애물이 가로막아도 광전사의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달리는 짧은 시간, 광전사는 제 왼팔에 박힌 화살을 뽑아냈다. 그리고 바로 던져버렸다. 다트처럼, 휙 하고.

“저 새끼 무······”

남자의 목을 관통하고 빠져나온 화살이 뒷말을 삼켰다.

옆에 있던 남자는 그저 눈만 크게 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확장된 그 동공에 지척까지 다가온 광전사가 비췄다.

“악!”

남자는 비명 지르며 오른손에 쥔 칼을 휘둘렀다. 너무 놀라 그만 눈 감고 휘둘러버렸는데, 검에 무언가 닿은 느낌이 없었다.

빗나갔나?

눈 떠보니 웬걸, 광전사는 자신은 내버려두고 쓰러진 동료의 주검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정확히는 주검의 오른손에.

죽어가면서까지 칼을 움켜쥔 그 손. 거기에 무슨 분노를 느낀 듯 광전사가 낮게 으르렁거리더니 시체를 향해 달려들었다.

뭐하려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차, 광전사는 기괴할 정도로 빠르게 엎드리더니 칼을 움켜쥐고 있는 그 손가락들을 쥐어뜯었다.

손가락이 뼈째로 뜯겨나가고서야 칼자루가 드러났다.

광전사는 기쁨의 포효를 내지르며 전리품을 주워들었다. 피 묻은 칼자루를 세게 쥐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광전사는 검을 질질 끌며 어느 침대를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광전사는 신음하는 카를의 앞에 섰다.

그리고 허리를 곧추세우더니 칼끝이 위를 향하게 높이 들었다. 천천히 칼의 옆면을 내세운 채 제 얼굴을 가리며 검례(劍禮)를 취했다.

그 입이 열렸다.

“오딘께는 나의 영혼으을.”

순간 칼에 반쯤 가려진 그 얼굴에 회색 룬 문자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골수 메디아 유저라면 그것이 축복 주문이라는 것을 알아챘으리라.

지켜보던 남자가 지시했다.

“저 새끼도 마술쟁인가 본데······ 쇠뇌 장전들 하고, 나머진 저 새끼 둘러싸.”

광전사는 높이 든 칼을 어깨에 메듯 자세를 잡았다. 그것을 금방이라도 휘두를 듯 칼끝을 뒤로 향했다. 졸지에 카를은 그 뾰족한 칼끝과 마주하게 되었다.

카를이 비명 지르는 차 광전사는 또 다시 중얼거렸다.

“주군에게는 나의 삶으을.”

칼끝에서 회색빛이 방출되어 카를을 감쌌다. 치유 주문이었다. 카를의 어깨 출혈이 급속도로 멎어가는 가운데 광전사는 웃었고, 포효하며 외쳤다.

“그리고 명예느은!”

“쏴!”

“나를 위하여—어—!”

화살과 광전사가 서로를 향해 쏘아졌다.

화살촉이 미간을 관통하려던 그 찰나, 광전사의 턱이 위아래를 휘젓더니 다음 순간 화살이 물려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칼로 쳐내기도 불가능한데.

몇몇이 비명 지르는 가운데 광전사가 칼을 휘둘렀다.

어어, 하고 중얼거리던 남자의 목이 하늘을 날고 피분수가 치솟았다.

땅에 떨어지려던 머리통에서 머리칼이 휘날렸다. 그것을 광전사는 단번에 움켜쥐더니 허공에 휘둘렀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그 머리통의 미간에 박혔다.

“어, 어······”

광전사의 오른손이 칼을 내뻗어 한 도끼수의 고간을 꿰뚫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화살이 박힌 남자의 머리통을 쇠도리깨처럼 빙빙 휘두르다가, 뒤에서 덮쳐오던 남자에게 내던졌다.

뒤로 날아간 머리통과 부딪친 남자의 머리통이 충돌했다. 두 머리는 동시에 박살나 파편을 흩뿌렸다.

누군가가 이를 악물며 고함질렀다.

“저 새끼부터 죽여!”

광전사의 뒤에서 칼잡이가 덮쳐오는 동시에 저 구석에서 쇠뇌수가 장전했다. 양 옆으로는 도끼수가 다가오고 있었다.

덮쳐온 칼을 검을 들어 막아내고, 왼손으로 입에 물고 있던 화살을 휙 던졌다.

바람 소리와 함께 쇠뇌수가 나자빠진 순간 광전사의 오금을 향해 도끼날이 덮쳐왔다.

광전사가 다리를 들었다 내려 도끼를 짓밟았다. 도끼수는 도끼를 빼내려 끙끙댔으나 그럴 수 없었다. 코끼리가 밟고 있는 듯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도끼 따위 차라리 내버리고 주변에 널브러진 무기라도 주우면 좋았으련만, 그러지 않고 도끼에 집착하던 남자는 곧이어 광전사에게 무릎을 걷어차였다.

“그어억······”

남자의 무릎은 박살나는 것이 아니라 끊겨나갔다. 왼쪽 허벅지 아래를 잃은 남자는 그대로 고꾸라져 비명질렀다.

광전사의 그 어깨 위로 또 다른 도끼가 내리 찍혔다. 이번 습격범으로서는 그대로 어깨를 찍어버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광전사가 몸을 뒤틀어 회전하며 왼손을 어찌 움직인 것 같았다. 습격범은 거기까지 파악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도끼 자루 중간이 광전사의 손에 붙잡혀 있었고 도끼수는 배에서 격통을 느꼈다.

걷어차인 그는 내장조각을 뱉어내며 뒤로 날아갔다.

순식간에 셋이 죽었다. 그 광경에 그저 어, 어, 거리던 남자 한 명도 어느새 손목이 날아갔다. 그리고 목도.

그렇게 넷이 오 초 만에 죽어버렸다.

아직 방에 남아있는 네 명. 창백해진 얼굴로 문 밖으로 뛰쳐나가려던 그들을 향해 광전사가 달려들었다.

둘은 문 밖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나머지 둘은 아니었다.

“억······.”

공포로 박동하는 심장에 차가운 강철이 닿았다.

문지방에 발을 디딘 남자의 가슴 밖으로 칼끝이 삐죽 솟아났다. 광전사는 칼을 회수할 겸 남자의 등을 걷어찼고 앞으로 날아간 남자는 다른 동료의 등에 부딪쳤다.

놈은 넘어지고 말았다. 비명 지르는 그 목에 칼이 꽂혔다. 그르륵 숨이 넘어간 놈의 머리를 짓밟으며 광전사가 포효했다.

“오딘이여어! 이 주검들을 받아주소서어—!”

그리고 도망친 둘을 쫓아서 문 밖을 뛰쳐나갔다.

남겨진 인원들, 그러니까 겁에 질린 영웅들은 위아래 턱을 연신 부딪치며 그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바들거리던 카를이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어떻게든 뗐다.

“부, 부, 부활······. 부활을······.”

카를은 기듯이 침대에서 내려가 옆 자리에 널브러져 있던 모지에게 다가갔다. 화살에 꿰뚫린 모지는 텅 빈 눈으로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카를은 울면서 읊조렸다.

“기도문이? 발? 발두르여······.”

기도하면서 떨리는 손으로 모지의 몸에서 화살을 뽑아내었다. 그 일 자체는 쉬웠다. 카를의 완력이 대단했기에 화살은 쉬이도 뽑혀 나왔다. 그와 함께 살 뭉텅이도.

카를은 구역질을 애써 참고 기도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기도가 끝난 순간, 묘한 빛이 나더니 아무 일도 없는 듯했다.

그러나 십여 초 후. 모지의 몸이 부들거리더니 그 입에서 콜록거리는 소리가 났다.

주문이 효과가 있다.

카를은 주변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들 소생 써요, 소생······”

소생 주문을 쓸 수 있는 성직자 인원은 다섯 명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카를의 말에 부응한 것은 네 명뿐이었고 그마저도 한 명은 널브러진 시체들 한 가운데에서 동료의 시체를 찾아 비틀거리다가 뇌 조각이나 창자 따위에 토악질하기 바빴다.

결국 죽은 아홉 영웅 중 되살아난 것은 세 명뿐이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게임처럼 벌떡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부활의 전조인 듯 꿈틀거리는 시체들은 일종의 사후경직이 진행 중인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카를은 혼이 나간 듯 멍하니 있다가 문득 바닥에 떨어진 도끼를 움켜쥐었다. 피로 끈적거리는 도끼 자루의 감촉은 역겨웠다. 그러나 놓지 않고 입을 열었다.

“넋 놓고 있으면 안 돼······ 다들 무기 주워요.”

몇몇이 그 말을 따라 주변에 널브러진 흉기를 들었다.

그러나 끝내 방을 나서지는 못했다.

*******

< 위층 복도 - [2]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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