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환전(召喚殿) - [3] >
비로소 사제들의 낯에 핏기가 돌아왔다. 어지간히도 안도했는지 한 사제는 가쁜 숨을 몰아쉴 정도였다.
사제들은 서로에게 물었다.
“이제 분위기를 내야지요?”
“그러세.”
한 사제가 문 밖을 향해서 손짓했다.
이윽고 양쪽 문이 벌컥 열리더니 요사한 음악소리가 울려 퍼졌다. 먹고 있던 이들이 놀라 그쪽에 시선을 향한 가운데, 무희와 광대들이 입장했다.
영웅들은 식사를 멈추고 잔치에 낀 예인들을 바라보았다. 롤랑 역시 기겁하여 한 어릿광대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희게 분칠한 조그만 난쟁이.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저게 뭔?’
이후 어릿광대들은 시끌벅적 익살과 묘기를 선보였고 무희들은 신비롭게 춤췄다. 그리고 신명나는 음악소리, 작은 북과 징도 흥겨이 울렸다.
신전의 경건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을 광경이었다. 예인들을 데려온 것만 해도 신전에서 영웅들을 대접하겠노라고 부진 애를 쓴 것이리라.
그러나 처참한 분위기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악화된 것 같았다. 모두들 허옇게 질려 뭘 어찌 대응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허옇게 분칠한 어릿광대들은 우습기는커녕 공포영화에 나올 듯 기괴하게 보였고, 무희들은 아름다웠으나 그 아름다움은 너무 고전적인 것이어서 현대인이 보기에는 거리감만 느껴졌다.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짐승의 고기들, 너무나 고대의 맛 그 자체인 꿀술은 그들의 마음을 누그러지게 하는 데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았다.
결국 돼지 통구이는 뒷다리만 겨우 사라지고, 술통은커녕 술병 하나 비워지지 않은 채 연회는 끝났다.
*******
사제들도 불온한 낌새를 느낀 듯했다. 광대와 무희는 빨리도 퇴장했다. 원래는 뭔가 더 하려다가 도중에 예정을 변경한 것일까.
다시 적막해진 가운데 붉은 법복의 남자가 나섰다.
“지상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피로들 하신 모양입니다. 영웅 분들 모두를 위한 방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선 편히 쉬시기를······.”
그리 말하고는 사제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이 거대한 공동에 ‘영웅’들만을 남겨놓고서.
시중을 들라고 남겨둔 수도사들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수도사들은 영웅들이 껄끄러워하는 것을 느낀 탓인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덕분에 영웅들끼리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카를이 말했다.
“상황을 정리해보죠. 게임 하다가 게임 캐릭터가 되어 다른 세계에 불려왔다, 이렇게 이해하면 될 것 같은데······”
즉시 누군가에게서 반박이 튀어나왔다.
“그건 말도 안 돼요.”
“이유는?”
“증명할 필요가 없을 텐데요. 그따위 일은 이 세상에 일어나지 않아요.”
그야 그렇다. 판타지는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판타지다. 증명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당연한 사실 아닌가.
카를이 말했다.
“하지만 그따위 일이 이미 일어난 거 같은데요. 이게 정교한 연극이나 몰카 같은 거라 주장하실 셈인가 본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습니다. 보세요.”
카를은 자기 앞 술잔을 가리켰다. 그 순간, 지켜보던 몇몇이 기겁하여 신음했다.
술잔이 공중에 떠오른 것이다.
“마술?”
누군가 중얼거린 말에 카를은 반박했다.
“마법이겠죠. 제 성기사 카를은 염동력 레벨 1이거든요. 실 같은 건 연결돼 있지 않습니다. 저도 아까 연회 도중에 무의식적으로 하고는 어찌나 놀랐는지. 혹시 사기인지 아닌지 확인하셔도······”
그 순간 금발 남자가 고함질렀다.
“씹할, 너도 한패냐?”
“네?”
“어디서 마술 갖고 개수작이야, 병신 새끼가? 아까도 네가 음식 먹어야 할 것 같다느니 어쩌니 말 꺼냈지? 이 새끼 이거 순 바람잡이 아냐?”
“마술 아니라 해봤자 납득 안 하실 텐데, 직접 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아저씨, 메디아 이름 제이슨이라고 하셨죠? 소환사라고 하셨죠 아마. 그렇담 마법 쓸 수 있으실 텐데, 시험해보시는 게 어때요?”
“시험해보긴 뭘 시험해봐? 이 개······”
“마법이요. 맘속에 있는 문자를 보면서 웅얼웅얼 속으로 읊으면 됩니다. 다들 해봐요.”
그 말대로 몇몇 사람들이 명상하려는지 눈을 감았다. 현성 역시 눈을 감고 내면의 문자인지 뭔지를 보고자 했다.
처음에는 불가능하거나 최소한 어려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눈을 감은 순간, 스물네 개의 문자를 볼 수 있었다.
룬 문자.
왠지 모르게 읽을 수 있었다. 그것들을 조합하여 뇌리에 문장을 써냈다. 그리고 읽었다.
물은 얼어붙어라.
그리 읊으며 제 손에 든 술잔을 노려본 순간, 성에가 끼더니 물이 얼어붙었다.
물이 아니라 등골이 얼어붙은 듯 소름이 끼쳤다.
급히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더니 그들 또한 이적을 벌인 듯했다. 그들의 동공이 확장되고 입이 열려있었다. 여기저기서 신음에 비명까지 들려왔다.
“뭔 일 있습니까?”
수도사들이 급히 달려왔으니 카를이 손을 내젓자 이내 다시 멀찍이 물러갔다.
그러나 일련의 소동 여파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모두 이 정신 나간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기겁하고 있었다.
카를을 바람잡이라 비난하던 제이슨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이슨은 제 손에 들린,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던 단검을 놀라 크게 뜬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카를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단검 소환?”
“몰라, 씹할······.”
제이슨은 그저 멍하니 욕설만 읊조릴 뿐이었다. 놀라야 할지, 아니면 이 또한 사기극이라며 화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운 것일까.
그리고 혼란스럽기는 현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어 좋아해야 하나, 아니면?
모두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카를이 짝짝, 박수를 치며 시선을 모았다.
“이제 이 상황에 대해서 의논해 봅시다. 정체불명의 마약을 통해 집단 환각을 보고 있다든가 하는 의심은 나중에 하고요. 주어진 상황 자체를 전제로 이야기해보죠.”
카를의 말에 현성이 물었다.
“우리가 고대 영웅을 부르는 소환 의식에 의해 불려왔다는 거?”
“그래요, 그거.”
이왕 말문이 트인 김에 용기를 내보았다.
“왜 존대? 나 현성이야, 인마.”
“현성이? 너도 왔······”
그리 내뱉고는 뭔가 깨달았는지 카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수도사가 아직 저 멀리 있음을 확인한 다음 말했다.
“마침 잘됐네요. 모두 약속합시다. 이제 현실 이름 쓰지 말기로 해요.”
“왜?”
“서로 철수야 민수야 하다 보면 저놈들이 눈치 챌 테니까. 고대 영웅인 줄 알고 부른 놈들이 그저 평범한 인간군상이라는 것을. 그리 되면 어찌될지는? 아무도 모르죠. 죽일지 살릴지······. 이 중에 한국인 아닌 분도 있습니까?”
다섯 명이 손을 들었다. 그들을 향해 카를이 말했다.
“자기 이름이 론이나 해리라 여기에 어울릴 것 같더라도 닉네임을 쓰세요. 아까 보니까 저놈들은 우리 신상명세를 대강은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죠? 차이가 나면 안 될 것 같아요.”
“어, 예······.”
“모두 현실 이름은 숨기고, 메디아 이름을 사용하자는 데 찬성해요?”
현성, 그러니까 롤랑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머지도 그리 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물었다.
“게임 이름을 쓰고 자시고, 우리 되돌려 보내달라고 할 수 없나? 왜 게임에서도 역(逆) 소환 있었잖아.”
“있었죠.”
“그럼 그거 해달라고 하면 되는 거 아뇨? 쟤들이 노예가 필요해서 우릴 불러온 거면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라 영웅을 부른 거고, 우리가 영웅인 줄 알고 있다면 지금 우리에겐 권위가 있지 않겠나? 그럼 우리 요구를 마냥 무시하진 않겠지?”
그 의견에 롤랑은 일순 마음이 끌렸다.
롤랑 역시 다른 세계에 가 영웅이 되는 망상을 가끔은 해봤다. 그러나 막상 다른 세계에 불려 와보니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간절하다.
어릿광대들만 해도 어찌나 무섭던지. 처음 그들이 들어올 때 자신을 죽이러 온 줄 알았다. 그 순간 문화 차이를 실감한 바, 여기서는 맘 편히 살 수 없으리란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문득 뇌리에 어느 불안한 가능성이 스쳤다. 그것을 입 밖으로 냈다.
“괜찮을까요?”
“무슨 소리?”
“쟤들이 아까 우릴 발할라에서 불러왔노라 하던데, 북유럽 신화에서 발할라는 싸우다가 죽은 전사들이 가는 사후세계잖아요. 그래서 늙어빠진 바이킹들이 싸워서 죽고 싶어 자식에게 도끼로 제 목을 베어달라고 요구했다는 말도 있고······ 되돌려 보내 달라 했다가는 막 이러는 거 아니에요?”
모두의 시선을 받는 가운데 롤랑은 말을 이었다.
“좋아요, 발할라로 돌려보내 드리지요. 그렇담 어느 걸로 목 잘라드릴까요? 칼? 도끼? 그도 아니면 도끼창?”
“그냥······ 원래 장소로 돌려보내 달라 하면 되는 거 아냐?”
“그 원래 장소가 어딘지 저놈들이 알고 있기나 하느냐가 문제죠. 혹시 가능할지 몰라도 조심스럽게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뒈지기 싫으면?”
“예.”
“씹할.”
이처럼 처량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이어졌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애초에 정보도 부족한 상황에 무슨 묘수를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나마 합의에 이른 사항이 있기는 했다.
당장 신관들이 무슨 소리를 하든 대답하지 말자는 것.
“저들과 멋모르고 대화를 나누다가는 무슨 정보를 흘리게 될지 모릅니다. 어찌 이용될지도 모르고요.”
카를의 주장이었고 반박이 나왔다.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제이슨이 불퉁하게 쏘아붙였다.
“그러니 차라리 입 다물고 있자? 뭔 개소리야. 입 닥치고 있으면 상황이 호전될 리 있나?”
“최소한 상황이 파악될 때까지는 그래야 한다는 겁니다.”
“상황 파악을 하려면 뭐가 뭔지 알아보기부터 해야지. 입 다물고 있어도 알아서 정보가 들어올 거 같지는 않은데. 상황 봐서 말 섞든 말든 할 일이지 저쪽에서 뭐라 지껄이든 일단 닥치고 있자니 그게 말이 돼?”
“이 분 이거 국가보안법 무시하고 북괴랑 펜팔해도 무죄라 주장할 분일세.”
카를이 빈정거렸으나 먹히지 않았다. 제이슨이 물었다.
“국가보안법이 뭔데 씹할?”
말이 너무나도 잘 통해서 눈치 채지 못했지만 그는 한국인이 아닌 모양이었다. 카를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적이랑 내통하면 안 된다 이거죠. 사적인 대화라도 적에게 유용한 정보를 흘리지 말자는 취지도 있고. 애초에 당장 입 놀리다가는 정보가 입수되기보다 유출되는 게 더 많지 않겠습니까.”
“하여튼 통제하고 싶다 이거지? 네가 뭔데?”
외국 유저라면 메디안 운영자의 권위도 통하지 않을 터였다. 어쩔 수 없다고 느낀 롤랑이 중재에 나섰다.
“벌써부터 싸울 거예요? 그러지 말고······ 차라리 다수결 어때요?”
결국 그렇게 하기로 했다. 다수결.
여기 모인 인원은 총 서른일곱 명이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몇 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찬반 여부를 표한 결과, 이십사 대 칠로 카를의 주장이 승리했다.
어느 정도는 당연한 결과였다. 대부분이 한국인인 이 인원이라면 메디안 운영자가 득표할 테니.
그리하여 제이슨이 오만상을 구긴 가운데 보안법이 통과되었다. 그리고 결정되었다. 입단속을 철저히 하는 것을 넘어 아예 당분간 입 닥치고 있기로.
*******
< 소환전(召喚殿) - [3]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