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환전(召喚殿) - [2] >
금발 남자가 허리를 조이느라 낑낑거리는 동시에 정적이 찾아왔다. 그러나 긍정적인 변화는 아니었다. 모두 조용하다 해봤자 그저 우두커니 서있을 뿐이었으므로.
곧이어 사제들이 단상 위에 올랐다.
“영웅들이여, 우리의 영광스런 선조들이여!”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사제들은 허리를 굽혀 절했다.
그 중 붉은 법복을 입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미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후손들을 보우코자 강림한 영웅들과 그들을 보내준 프레이야 여신께 영광 있으라! 우리 소환전(召喚殿)의 부름에 응해주신 데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이 중에는 소환사 대선배 분들도 계시지요? 불초한 후학으로서 경의와 감격을 표합니다! 아, 오늘은 진실로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말을 끝마친 후 남자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벌거숭이들을 둘러보았다. 호응을 바라는 눈치였으나······.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를 이 상황에 아무도 화답해주지 못했다.
단상 위 사제의 얼굴에서 미소가 옅어지는 가운데 벌거숭이 중 누군가가 물었다.
“지금 이 상황, 뭐요?”
“이 상황이라니요?”
“그건 내가 물은 거잖아! 난 그냥 집에 있었는데 어째서······.”
단상 위 사제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여기 오시기 전에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하신 겁니까?”
“설명이고 자시고, 난 그냥 집에 있었다니까?”
“그럴 리가? 미리 여신께 당신의 전사들을 내려주십사 청했고, 승낙을 받았는데?”
단상 위에서 의식이 잘못되었느니 어쩌느니 소리가 들려왔다.
사제들은 자기네끼리 무어라 쑥덕이더니 이내 어느 벌거숭이를 향해 물었다.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귀공께서는 혹시 섬의 왕자이신 아스톨포 공이 아니신지?”
사제가 가리킨 방향을 모두들 바라보았다. 과연 조각 같은 미남이 거기 있었다.
그런데, 왕자 아스톨포? 그 이름과 연관 지어 생각하니 현성의 머리에 문득 한 캐릭터가 떠올랐다.
LV 15 기사 아스톨포. 현성의 메디아 친구. 저 미남의 머리색과 피부색을 보니 그 캐릭터인 듯도 싶었다.
단상 위의 남자는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듯 애절하게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미남은 떨떠름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일단은······.”
“아, 역시!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과연 위명 자자한 미모입니다! 그렇다면 귀공의 친우, 광란의 아마디스 경은 계시지 아니합니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남자는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분명 그분을 요청했는데······.”
사제들은 서로 또 쑥덕이더니 무슨 결론을 내린 듯 물었다.
“당대의 이름으로 바꾸어 여쭙겠습니다. 이중에 혹시 광란의 롤랑 경이 계시지 않습니까?”
현성은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나?”
작게 중얼거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제는 놓치지 않았다.
“아, 거기 계셨습니까!”
붉은 법복을 입은 남자가 현성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 순간 현성은 저 남자가 어쩐지 눈에 익노라고 생각했다. 복장은 물론 목소리마저도. 곧이어 깨달았다.
‘동영상에서 거인의 아들이 풀려났느니 이미르의 군대가 어쩌느니 하며 나불거리던 그놈.’
시뻘건 법복, 동영상에서도 눈길을 끌던 그 붉은 옷이 번뜩이고 있었다.
붉은 법복의 남자가 말을 이었다.
“경의 무훈은 이백 년이 흐른 지금도 뭇 기사들의 고귀한 경쟁심을 불타오르게 하지요! ‘광란의 아마디스’하면 흔해빠진 무훈시 따윈 불쏘시개로나 쓸모 있게 하는 걸작입니다. 저 콧대 높은 교수와 시인들도 필독서로 꼽는 작품 아니겠습니까? 경께서 발키리에게 하사받은 듀랑달(Durandal), 그 검은 이제 왕실 대관식에 쓰이고 있답니다······”
이후로도 나불나불, 현성의 캐릭터 롤랑의 업적을 늘어놓던 남자는 한참 후에야 다른 벌거숭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는 사람이 더 없나 알아보려는 것일까. 남자는 벌거숭이 하나하나의 얼굴을 세심하게 훑더니, 이내 포기했는지 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너무나 안도한 얼굴로 다른 사제들에게 중얼거렸다.
“의식은 실패하지 않았네. 정말 다행이야.”
한편 현성은 이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해보고자 애쓰고 있었다.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다. 전형적인 전개 그 자체였으니까.
다른 세계에 왔으며,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는 것.
당연히 그 따위 판타지 결론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머리를 굴려 판타지가 아닌 현실적 사고를 해보고자 애썼다.
모니터에서 방출된 빛은 일종의 세뇌광선이며, 그에 의해 환각을 보고 있다? 각하. 초과학적 추측이 환상적 추측보다 나을 이유는 없다.
그 빛에 어지러워 할 때 누군가 급습하여 자신을 납치하고 게임 동영상 같은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몸의 근육은 뭔가 약물을 투여한 결과이고? 실현 가능성은 쥐꼬리나마 있을지 몰라도 역시 공상적 추측에 불과하다. 없던 근육을 만들어낼 약품의 존재 여부도 모르겠다.
부질없는 추리를 하느라 애쓰자니, 현성을 포함한 벌거숭이에게 옷가지들이 대령되었다. 모두들 떨떠름하게 받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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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받아 생식기를 가렸으니 덜 위축될 만도 했다. 그러나 ‘소환된’ 그들 사이에 말문이 트인 것은 한참 후였다.
은발 남자가 속삭이듯 물었다.
“다들 메디아 하다 이렇게 됐어요? 저 닉네임 카를입니다.”
그 질문에 누군가가 대답했다.
“그런데요······ 카를이면 아저씨 혹시 메디안 운영자예요?”
“예, 맞습니다. DLC 시작하니까 이 꼴이 됐네요. 다들 이상한 빛에 어지러워 하다가 눈 떠보니 이 사태인가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현성은 대화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카를?’
친구에게 다가가고자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인 화려한 모습들에 현성은 움찔했다.
카를의 실제 이름은 이하종으로, 현성과 동갑이며 이름답게 동양적인 외모의 대학생이었다. 그런데 저기 있는 것은 푸른색 눈동자가 빛나는 은발 백인이 아닌가. 주변 사람들 역시 백인의 짐이니 황색 원숭이니 하는 어휘를 즐겨 사용할 것처럼 생겨먹었다.
현성이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사제들이 다가왔다.
카를과 그 주변 사람들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시장하시겠지요?”
웬 사제가 웃으며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사제들은 이 자리에 탁자를 여럿 깔아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놓을 음식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탁자가 음식으로 쫙 덮였다. 고소한 냄새가 회랑에 풍기기 시작한 가운데 어느 사제가 말했다.
“발할라에서의 투쟁 끝에 들이키는 꿀술에 미치지는 못할 터입니다만 애써 만찬을 준비해놓았습니다. 일단 즐겨주시기를!”
그와 동시에 연회를 선언했다.
육류 위주의 연회였으며 그 요리들은 대개 살아있을 적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돼지 통구이, 역시 통째로 구운 지빠귀 요리, 날개를 철사로 고정하고 굽는 동안 머리에 찬물을 붓는 등의 노력으로 그 원형을 완벽하게 유지시킨 공작 구이······.
술은 ‘고대의 영웅들’에게 대접하기 위함인지 맥주나 포도주가 아닌 꿀술이었는데, 이 또한 무턱대고 마시기에 적합한 술이 아니었다.
이처럼 선뜻 손대기 어려운 요리들 앞에서 영웅들은 얼어붙었다.
사실 중화요리가 나온들 손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지마는. 황당한 이 상황에 대령된 음식들인 것이다. 누구인들 식욕이 날 리 없었다.
결국 연회는 호기로운 영웅들의 만찬은커녕 장례식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였다. 아무도 요리에 손을 대지 않고 의자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사제들은 당황하여 물어왔다.
“대접에 탐탁찮은 부분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손님들이 기껏 나온 음식들에 손도 대지 않는다니. 불만표시로 이보다 더한 게 있을까.
그때 카를이 주변 사람들에게 속삭였다.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식에 마약이라도 탔으면 어쩌려고요?”
마약? 지금 이게 정교한 세뇌 작업의 일환이라 여기는 것인가? 이 기묘한 상황은 갑자기 다른 세계에 왔다는 착각을 주기 위한 연극이고?
나름 일리 있노라고 현성이 생각하는 차, 카를이 말했다.
“설령 그렇다 한들 먹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저들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어요.”
“씹할······.”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모두들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을 꺼낸 카를조차 당장 먹지 않고 있는 판이었다.
현성은 친구의 의견을 믿기로 했다.
손을 뻗어 꿩 구이 그리고 과일 몇 개를 접시에 담았다.
접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가운데 울려 퍼졌다.
모두,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수도사들의 시선까지 현성에게 집중되었다. 속이 아려오는 것을 느끼며 현성은 꿩 날개를 북 찢었다. 그러고는 입 안에 가져가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시선이 부담스러워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지만 껍질까지 다 씹어 삼켰다.
고기 탓인지 심정 탓인지, 목이 텁텁했다. 마실 것이 필요하다 느낀 순간, 수도사 하나가 술병을 들고 다가왔다.
“이 미천한 것이 롤랑 경께 술을 따라드리는 영광을 얻어도 될는지요?”
술병에서는 독한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소주 반 병 마시고 나면 토하기 일쑤인 현성에게는 부담스러웠으나 거절할 수 없었다. 그보다 수도사의 기대하는 눈치가 더욱 부담스러웠기에.
결국 현성은 술잔을 내밀었고 수도사는 얼른 그것을 채워주었다.
용기를 내어 잔을 들었다.
독한 알코올이 목을 넘어가는 순간, 괜히 마셨나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정말 마약이 들었어도 문제요 마약이 들지 않았는데 취해버려도 문제다. 취한 모습은 마약에 당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니까. 그리 될 경우 불안감만 가중시킬 것이다.
잔을 반쯤 비운 후, 서둘러 접시에 기름진 고기를 가득 담았다. 알코올 흡수를 늦추려면 기름 진 음식을 많이 먹어야 할 테니까.
빠르게 고기를 배에 채워 넣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사제들이 만족스러운 듯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도 현성은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기를 한 점 한 점 뜯어먹을 뿐이었다.
카를이 입을 열었다.
“드십시다.”
그제야 모두들 서로의 눈치를 보더니 이내 먹기 시작했다.
< 소환전(召喚殿) - [2]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