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140화
에필로그 - 대부(大父) (2)
‘큰일 났다.’
이시백이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당연히도 윤시아였다.
머릿속에 떠오른 윤시아는 싱글벙글거리면서 단검을 쥐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그녀의 작은 입술이 움직이면서――.
‘원서 언니까지만이에요?’
‘원서 언니 한 명만 인정할 테니까요.’
‘거기서 한 명 더 따먹어버리면 선배도 죽고 나도 죽고 다 죽여 버릴 거니까요.’
‘아예 콱 불알을 으깨 버릴 거예요.’
……이시백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위험했다. 농담이 아니었다.
자신의 아내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동반 자살을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행동력을 갖추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우유를 한 잔 마셨더니 사실 컵 안에 독이 발라져 있었더라, 같은 시나리오도 충분히 가능했다.
‘거절해야만 한다.’
이시백의 본능이 경종을 시끄럽게 울렸다.
안 그래도 자기 혼자 평양에 남겨졌다고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닌 윤시아였다.
만에 하나 이런 상황에서 이시영과 모종의 사건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솔직히 답이 없었다.
윤시아가 원서의 정신을 분자 단위로 깨부수던 광경을 아직 이시백은 생생하게 기억했으며, 이시영한테도 똑같은 짓을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전혀 없었다…….
이시백이 입을 열었다.
“이시영.”
“왜, 오라비?”
어느새 호칭이 바뀌었다.
평양댁에서 오라비로 변경되었다.
호칭의 친밀감이 갑작스레 상승했다.
이시백은 목덜미에 땀띠가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너의 마음은 기쁘지만 나는 유부남이다. 더군다나 이제 결혼한 지 4개월이 지나지 않았다. 신랑한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너한테도 좋지 않다.”
“나, 사실 유부남 취향.”
“…….”
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취향인가.
무표정한 얼굴 너머에 숨겨진 성적 취향의 무저갱에 이시백은 잠시간 침묵했다.
그렇지만 이시백은 포기하지 않았다. 저래 봬도 이시영은 상식적인 교양과 이성을 지녔다. 착실하게 설득하면 반드시 알아줄 터.
“무엇보다도 나는 이미 원서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 비록 시아가 공인하긴 했어도 사실상 첩실을 둔 것이나 마찬가지야. 알겠는가. 나는 여성 편력이 깨끗한 사람이 절대로 아니다. 이런 남자와 엮여봤자 너만 불행해진다.”
“불륜남도 괜찮아. 취향 적격.”
“…….”
이시백이 가볍게 충격을 받았다.
아무래도 눈앞의 소녀는 생각보다 무시무시한 입맛을 지닌 것 같았다.
유부남에 불륜남이 취향인 21살 여자라니, 이토록 기괴스러운 존재를 이시백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필이면 그런 존재가 자신의 의동생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이시백은 문화적 혼란에 휩싸였다.
그리하여 이시백은 마지막 반론을 펼쳤다.
“너와 나는 남매의 연을 맺었다. 설령 의남매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남매가 남매를 사랑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두 사람을 보고 뭐라고 욕하겠느냐. 부디 마음을 접어다오.”
“오빠라는 것도 좋아. 오히려 오빠라서 좋아.”
“…….”
이시영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해 왔다.
의동생의 상상을 초월한 발언에 이시백은 현기증을 느꼈다.
이렇게 된 이상, 조금 과격하게 이시영의 고백을 물리칠 수밖에 없었다.
설혹 이시영이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되더라도 말이다.
이시백은 이미 원서와 바람을 피웠다가 한 번 파국을 맞이할 뻔했던 경험이 있었고, 같은 실수를 다시 반복할 생각이 전무했다.
이시백이 운을 떼려는 순간을 딱 맞추어서 이시영이 고개를 돌렸다. 다시금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평양댁,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나는 딱히 평양댁의 애인이 되고 싶은 건 아니야.”
“음?”
“나는 평양댁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
이시영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는 거리에 있기를 원해. 굳이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도 만나게 되는 거리에 있기를 원해. 나는 김진하한테 평양댁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어. 언제라도 평양댁을 지킬 수 있는 거리에 내가 있기를 원해.”
“…….”
“그러니까 서울에는 내려가지 않을 거야. 물론, 나는 평양댁에 얹혀사는 처지. 평양댁이 명령을 내린다면 억지로라도 따를게.”
두 사람이 물끄러미 시선을 교환했다.
검은색 눈동자가 투명하게 이시백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시백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았다.
“……우리 둘은 가족이다. 서로가 서로한테 세상에서 단 한 명밖에 없는 남매다. 그렇게 소중한 가족을 다른 곳으로 떠나보내다니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이시영은 결코 거짓말을 입에 담지 않는 성격.
즉, ‘딱히 당신의 애인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니다’라는 발언도 거짓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이시영은 이시백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방금 이시백은 아내를 제외하고 자신의 유일무이한 가족에게 떠나라고 통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야 이시영 입장에서는 격렬히 거부할 만했다.
그녀에게 이시백은 간신히 찾아낸 가족 아니었던가.
비록 피로 이어지지 않았을지 몰라도 이름으로 두 사람은 맺어졌다.
“미안하다.”
이시백이 이시영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내가 미처 거기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저 서울과 인천을 선물하면 네가 기뻐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배려심이 부족한 제안이었어.”
“응, 서울 같은 건 상관없어.”
이시영이 말했다.
“그런 건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야, 평양댁.”
“……맞는 말이다.”
이시백은 북방의 패자가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자신한테 있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서, 다만 수단의 일환으로 북방을 차지했을 뿐이다.
원서와 윤시아가 목적이었다. 평양과 개성은 수단이었다.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는 바로 그 순간 이시백은 타락하고 말겠지.
소중한 사람을 희생하면서까지 북방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건 이시백이 권력의 하수인이 되었다는 얘기다.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수십 년 동안, 이시백은 무엇이 목적이었고 무엇이 수단이었는지 끊임없이 상기하면서 살아가야만 한다…….
“사과의 의미로 선물을 하나 해주마.”
그리고 이시영도, 부정할 도리 없이, 이시백의 목적 중 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시백에게는 북방 전체보다 윤시아, 원서, 이시영, 세 사람이 훨씬 더 소중한 것이었다.
“아무 소원이나 한 가지 말해봐라.”
“어떤 거든 들어줄 거야?”
“원한다면 총리의 목이라도 가져와 주마.”
이시백은 진심이었다.
이시영이 고개를 자그맣게 도리질 쳤다.
“그럼 노래를 불러줘.”
“노래?”
“응, 평양댁이 부르는 노래를 들어보고 싶어.”
약간 난이도가 높은 주문이었다.
이시백은 시를 읊는 데 취미가 있긴 했지만 정작 노래를 부르는 것에는 영 서툴렀다.
목소리가 원체 딱딱해서 노래에 어울리지 않았을뿐더러 그런 풍류를 즐기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이시백은 가사를 외는 노래조차 하나 없었다.
하지만 총리의 멱을 따오는 것보다야 쉽지 않겠는가.
이시백이 이시영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빗었다.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그건 이시백이 최대한 타협해서 꺼내 든 노래였다.
김소월 시인이 지은 시에다가 음악을 입혀서 만든 자장가.
이시백의 톤 낮은 목소리가 리무진 차량 안에 울렸다.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이시영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고작 네 개의 행으로 이루어진 자장가를 이시백은 되풀이하고 되풀이하였다.
다만 처음 부를 때보다 두 번째로 부를 때, 두 번째로 부를 때보다 세 번째로 부를 때 노랫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노랫소리가 작아질수록 차 안은 조용해졌다.
이시영이 새근새근 규칙적으로 내쉬는 숨결 소리가 점점 더 공기에 퍼졌다.
마침내 이시영이 완전히 잠들었다.
이시백은 그녀가 잠든 후에도 한참이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만져 주었다.
두 사람이 탄 리무진은 수십 대의 차량에 보호를 받으며 북쪽으로. 의정부를 거쳐 평양으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섰다.
그때 이시백이 운전사한테 말했다.
“의정부를 지나고 평양으로 꺾지 마라.”
“예? 그러면 어디로 갈까요, 대부님?”
“잠깐 철원에 들르자꾸나.”
운전사는 잠시 당황했다.
철원은 평양-개성 고속도로에서 동떨어진 길을 타야만 도착했다.
철원을 들를 경우, 평양에 도착하는 데까지 하루가 꼬박 걸려 버릴지 몰랐다.
더군다나 이시백이 철원에 들르는 것은 예정에도 없었다.
“아주 잠시 들릴 뿐이니 걱정하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그럼 다른 차량들에 연락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시백이 가자면 가는 것이었다.
잠시 뒤, 차량들은 의정부를 통과하면서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 도로를 탔다.
이시백은 느릿느릿하게 이시영을 쓰다듬으면서 두 눈을 감았다.
철원.
그 너머에는 고산(高山)이 있었다.
이시백이 처음으로 원서를 만난 장소.
그와 그녀가 처음으로 마주친 장소.
이시백은,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2
철원 서구 와수리는 시골 중에서 시골이었다.
근방에 몬스터 서식지들이 널려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특이한 구석이 없었다.
단지 이 특징으로 인하여 일확천금을 노리는 D급 헌터 혹은 C급 헌터가 제법 많이 모였다.
헌터들을 손님으로 삼는 각종 유흥업소 및 숙박업소가 발달하였는데, 그것도 어디까지나 시골 기준에서 발달했다는 것이지, 평양에서 온갖 호화로운 경치를 다 구경해 본 백산 용병단원들 입장에선 허름한 깡촌에 불과했다.
“도착했습니다, 대부님.”
그런 동네에 별안간 수십 대의 리무진이 줄줄이 들어섰다.
하급 헌터들은 저들끼리 수군거리면서 리무진 행렬을 지켜보았다.
이시백은 창문 너머로 구경꾼들을 쓰윽 훑어보고 그중에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춘 헌터가 한 명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산책하고 다녀오겠다.”
“예, 그럼 곧바로 호위들을 불러서…….”
“되었다. 20분 안에 돌아올 거니 바싹 붙어서 호위할 필요가 없어.”
운전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호위대장한테 연락하겠습니다.”
“멀리서 호위하라고 일러라. 순우경이라면 알아서 이해할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시백은 이시영을 조심스럽게 좌석에 눕힌 다음, 되도록 소음을 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리무진을 빠져나갔다.
제법 서늘한 공기가 이시백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수십 년 만에 맡아보는 그 삭막한 공기가 폐에 들이찼다.
‘여기는 변한 게 없군.’
이시백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의 10년 만에 찾아온 동네이건만 거리의 풍경이 기억과 똑같았다.
이시백은 무척이나 익숙한 발걸음으로 어디론가 걸어갔다.
리무진 행렬을 구경하던 헌터들이 저도 모르게 이시백한테 길을 비켜주었다.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인물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꼈으리라.
―딸랑.
이시백이 향한 곳은 초라한 칵테일 바였다.
아직 대낮이라서 그런 걸까. 가게 안에는 손님이 없었다.
나이가 지긋하게 든 바텐더만이 무언가 불만스러운 눈길로 불청객을 쳐다보았다.
바텐더가 더러운 물수건으로 유리잔을 닦으면서 쏘아붙였다.
“내 가게에 오기에는 너무 고급스러운 양복을 입었는데.”
“양복만 고급스러울 뿐이지 안쪽은 썩어 문드러졌다.”
이시백이 좌석에 앉으면서 말했다.
“내 양복이 내 위장을 대신해서 술을 마셔주지 않을 거라면, 어떤 옷을 입었든지 상관없을 거다.”
“흥.”
바텐더가 코끝을 울렸다.
“주문은?”
“롱티 있나.”
“내 가게에선 그런 물건 안 다뤄.”
그렇겠지.
이시백이 고개를 끄덕이고 탁자에 5만 원짜리 지폐를 올렸다.
“맨해튼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