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135화
제18장 웨딩마치(5)
5
“두 분의 결혼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자그마한 결혼식이 끝나고.
이시백과 윤시아는 금수산태양궁전의 접견실에 앉아 있었다.
접견실 바깥 복도에는 수십 명의 마피아가 줄줄이 섰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용병단장들이었다.
접견실에 들어가 신랑과 신부한테 인사를 올리기 위해, 그들은 한 사람씩 차례를 기다렸다.
“이런 좋은 날에 선물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제 작은 성의입니다.”
“빈손으로 오셔도 우리 평양에선 단장을 얼마든지 환영할 것입니다.”
이시백이 부드럽게 인사를 받아들였다.
경주, 대구, 광주, 수원 등등, 주요한 도시들에서 수많은 용병단장이 올려왔다.
마치 누가 더 희귀한 선물을 건네주느냐에 따라 해당 용병단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듯, 용병단장들은 유명한 해외 예술 작품이나 보석과 같은 물건들을 바리바리 싸왔다.
이 같은 풍경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별것 아닌 선물입니다만―”
“사모님의 아름다운 자태에 어울릴까 싶어서.”
“부디 앞으로도 우리 사리원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시간이 지날수록 접견실 한편에 짐들이 수북이 쌓여갔다.
서로가 서로한테 부담 없이 뇌물을 주고받을 수 있는 날이란 언제나 소중했다.
설령 정부 기관이 이곳을 감시하고 있다 하더라도 결혼식 예물을 갖고서 용병단을 잡아들일 수는 없었다.
아니, 아예 하객 중에 용병단장뿐만이 아니라 각 부처의 정치인과 관료가 섞였다.
금수산태양궁전에는 오늘 반도의 뇌물이 총집합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뇌물이 산더미처럼 쌓일수록 윤시아의 표정은 점점 썩었다.
“……이거 언제 끝나요?”
처음에는 조각상이라느니 회화 작품이라느니, 무언가 대단히 고급스러운 물건들이 차곡차곡 입장하는 광경에 윤시아도 기뻐했다.
정말 재벌집 사모님이라도 된 것처럼 ‘흐음, 호오, 하아’ 하고 표정을 시시각각 바꾸면서 작품들을 감상했다.
당연하게도 윤시아는 고급스러운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잭슨 폴록의 그림을 눈앞에 두고 윤시아는 슬슬 사모님을 흉내 내는 데 질린 것 같았다.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우쒸, 결혼 첫날에 뭐 사람이 이렇게 많이 찾아와요. 저희 신혼부부라고요, 신혼부부. 알콩달콩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국가적으로 보장된 커플이라구요. 대충 그냥 심부름꾼 보내서 퉁치면 될 것을 왜 굳이 평양까지 박박 기어와서.”
“반도에서 제일 귀한 마눌님 중 한 명이 되었는데 이 정도 수고로움은 감당해야지.”
이시백이 넥타이를 헐렁하게 풀었다.
사실 이시백도 결혼 날에 지금처럼 정치적인 접견을 갖는 것이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뇌물을 다 합치면 수백, 수천억이 가뿐히 넘어가겠지만 오늘만큼은 돈보다 배우자한테 신경을 쏟아주고 싶었다.
“하아, 우리 신혼여행도 바로 못 떠나잖아요.”
“곧 있으면 특종 뉴스들이 연달아 터질 테니 말이다. 레겐보겐 사건만 흘러나와도 시민들이 난리를 칠 거다. 그런 시기에 우리가 자리를 비우는 것은 좋지 않다.”
“저, 벌써 신혼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아요…….”
윤시아가 의자에 앉은 채로 슬라임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잠깐 신랑신부한테 주어진 휴식시간을 최대한 만끽하겠다는 듯, 윤시아는 구두를 슬그머니 벗어던졌다.
새하얀 스타킹이 드러났다. 부드러운 윤곽선이 발가락 끝에서 시작하여 허벅지까지 이어졌다.
이시백은 얼음물을 마시면서 무심코 윤시아의 다리를 훔쳐보았다.
“흐응?”
남편의 시선을 눈치챈 것일까.
윤시아가 고양이처럼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혹시 발딱 섰어요, 선배?”
“…….”
이시백은 표정이 짜게 식었다.
그는 윤시아의 거의 모든 것을 사랑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찔러오는 습성만큼은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애정에도 때와 장소란 게 있지 않겠는가. 궁전 한복판에서 발딱 섰느냐니 상스럽기 그지없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시아야. 너도 이제 영부인이다. 조금은 체면이란 걸 지니는 편이 어떠냐.”
“제가 발랑 까진 여자애인 걸 평양의 백만 시민이 다 알고 있는데요. 이제 와서 얌전한 귀부인처럼 얼굴 싹 깔아봤자 오히려 욕만 거하게 먹어요, 선배. 사람이 돈을 먹더니 성격이 바뀌었다니 뭐라느니.”
윤시아가 일어섰다.
그녀는 이시백의 무릎에 엉덩이를 깔더니 히죽 미소를 지었다.
“기생은 기생답게 놀아야죠. 상류층 놀이는 선배 혼자 하세요. 전 천박하게 돌아다니면서 평양 시민들 지지나 얻고 다닐 테니까요.”
“손님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견습이 기생은 무슨 기생…….”
“무슨 소리예요. 전 평생 한 분의 손님한테 묶였는걸요?”
윤시아가 양팔로 교태롭게 이시백의 상반신을 휘감았다.
오른팔은 벌써 그의 와이셔츠와 외투 틈새로 쓰윽 기어들었다.
이시백은 얇은 셔츠 너머로 그녀의 손바닥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시백은 작게 한숨이 나왔지만, 그 한숨이 도리어 일종의 자포자기로 성립하고 말았다.
“……아직 복도에서 기다리는 손님이 스무 명이다.”
“이왕 기다리는 거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내버려 둬요. 어차피 제일 중요한 손님들은 진즉에 다 만났잖아요. 기껏해야 촌동네 용병단장들밖에 안 남았을 텐데, 뭐 어때요.”
“영부인이 된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벌써 권력을 부리느냐.”
“으이구, 이 구제불능의 둔탱이 서방아.”
윤시아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결혼 초반부터 소박맞기 싫으면 얌전히 입술이나 내밀어요.”
“너 또 그렇게 키스로 끝낼 것처럼 말하다가 끝까지…….”
이시백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윤시아는 상대방의 무릎에 올라탄 자세 그대로 이시백에게 키스했다.
가벼운 입맞춤이 아니었다.
두 사람 이외에 아무도 없어 조용한 접견실에 약간 거친 숨소리가 잔잔하게 내려앉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두 사람의 얼굴이 서서히 떨어졌다.
이시백은 잔소리를 한마디라도 퍼부어주려고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윤시아의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보자, 신기하게도 책망을 주려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아하하.”
윤시아가 미소를 지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억지로 키스를 감행했던 여자는 어디로 실종되었는지, 거기에는 부끄럽게 뺨을 밝히는 새색시가 한 명 있을 따름이었다.
“서방님.”
윤시아가 불쑥 속삭였다.
이시백이 눈꺼풀을 깜빡거리자 윤시아가 다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서방님?”
“……그래.”
“헤헤, 서방님.”
이시백이 대답한 것이 기뻤을까.
윤시아는 와락 이시백을 껴안았다.
와이셔츠 틈새로 밀어 넣었던 손길에 비교하면 훨씬 더 어수룩한 몸짓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시백은 그녀의 서투른 동작이 오히려 막강한 파괴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시백도 자연스럽게 윤시아를 안아주었다. 두 사람은 의자에 함께 앉아서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서방니이임―”
“그래.”
“아하핫. 서방님은 제 서방님인가요?”
“오냐, 네 서방님이다.”
이시백이 쓴웃음을 지으며 윤시아의 등을 쓰다듬었다.
윤시아는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처럼 이시백한테 온몸을 푹 기대었다.
“서방님, 저도 여보라고 한 번 불러주세요.”
“……꼭 호칭에 얽매일 필요가 있겠느냐.”
“아뇨. 그런데 한 번쯤은 들어보고 싶거든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선배한테, 선배의 입으로, 여보라고 한 번쯤은 들어보고 싶어요. 네, 서방님? 한 번만요. 딱 한 번만 여보라고 불러주세요―”
윤시아가 이시백의 품에 안겨 슬쩍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그 주변으로 애교 어린 빛무리가 반짝반짝 돌아다녔다.
남자가 결혼하게 된다면 반드시 요구받게 되는 제안이 지금 이시백한테도 내려온 것이었다.
“…….”
그리고 이시백은 난생처음으로.
정말 난생처음으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유람선 한복판에서 윤시아한테 고백할 때조차 이시백은 별다르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애정과 관련된 창피함이란 이시백에게 있어 머나먼 외우주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일단 머릿속에 ‘여보’라는 두 글자가 떠오르자, 이시백은 온몸이 수축되는 기분에 휩싸였으며, 몸이 구겨지고 또 구겨져서 마침내 볼링공만 한 덩어리로 줄어들 것만 같았다.
윤시아가 조금 더 바싹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가 입을 열자, 행복한 숨결이 새어 나왔다.
“안 될까요?”
“…….”
차라리 S급 몬스터를 한 마리 더 상대하는 쪽이 마음 편하련만.
이시백이 입술을 달싹였다. 몇 번이나 혓바닥을 움직이려고 시도했지만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시백은 상대방이 기다리다 지쳐서 포기해 버리는 것을 내심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윤시아는 침착하게, 그러면서도 애정을 잃지 않은 눈동자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여…….”
먼저 백기를 든 사람은 이시백이었다.
이시백이 침을 꿀꺽 삼키면서 한 글자를 토해냈다.
“여…….”
“…….”
“……여보.”
잠시 침묵이 흘러갔다.
이 어색하면서도 따뜻한 공기 속에서 윤시아가 활짝 웃었다.
그녀는 행복에 겨워 질식할 것처럼 부르르 떨더니, 다시 자신의 남편을 강하게 껴안았다.
어찌나 세게 안았는지 그만 두 사람이 올라탄 의자가 미끄러질 뻔했다.
“네, 서방니이이이임!”
“……숨 막힌다. 적당히 안아라.”
“제가 서방님의 여보예요! 에헤헤. 그렇고말고요. 우리 서방님은 어쩜 이렇게 잘생겼을까! 샤프한 눈썹 하며 오똑한 콧대에다 굵은 턱 선까지! 정수리에서는 좋은 냄새가 나고 뺨은 부드럽고 어깨는 단단하고! 우리 서방님은 왜 이렇게 완벽해요? 네?”
난리가 났군.
이시백이 마음속으로 길게 탄식했다.
윤시아가 이렇게 폭주해 버리면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그녀는 콩깍지가 씐 수준으로 따지자면 30㎝ 두께의 콩깍지가 씌어버린 여자였다.
이시백은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윤시아는 나흘에 한 번 꼴로 이시백이 얼마나 완벽한 남자인가를 유현도한테 일장연설로 열변하곤 했다.
이런 장광설을 듣고 유현도는 자연스레 이시백에 대한 이성적 애정을 없애버렸는데, 자기는 죽다 깨어나도 윤시아만큼 이시백을 좋아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윤시아가 이시백의 가슴에 뺨을 부비부비거렸다.
“서방님, 한 번만요. 딱 한 번만 더 여보라고 불러주세요!”
“절대로 안 된다.”
“제발요! 서방님이 한 번만 여보라고 불러주면 저 진짜 앞으로 일주일 내내 서비스할게요! 서방님이 좋아하는 옷을 아예 일렬종대로 늘여놓고 하루마다 골라 입을게요! 아니, 그냥 원서 언니랑 이 주일에 세 번 만날 수 있게 허락해 드릴게요! 이거 완전 딜! 대박 세일!”
이것이 여자의 집념이라는 말인가.
철천지원수로서 증오하는 원서한테 만남을 허락할 만큼, 그리도 여보라는 호칭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일까.
이시백은 슬슬 윤시아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싫다.”
“꺄아아아! 선배 부끄러워하는 것 좀 봐! 세상에 오늘이 제가 결혼한 날이긴 결혼한 날인가 보네요! 이런 희귀한 광경을 연속으로 다 보고! 선배, 너무 귀여워요. 반칙적으로 사랑스러워요! 선배 같은 남자가 지구상에 존재해도 정말로 괜찮은 걸까요!”
부탁이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윤시아는 더더욱 불타올랐다.
결국 이시백은 윤시아의 기세에 밀려 끈적끈적하게 애정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복도에 용병단장들을 세워두고 신혼부부는 이마에, 뺨에, 목에 입술을 맞추었다.
대체로 이시백은 자기 자신이 잡아먹히는 것 같노라고 느꼈다.
터억.
그때 노크도 없이 접견실 문이 활짝 열렸다.
이시백과 윤시아가 시선을 돌려 쳐다보자, 이시영이 멀뚱히 문가에 서 있었다.
이시영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표정하게 말했다.
“평양댁, 바깥에 소리 다 들려.”
“…….”
“여기는 방음이 잘 안 되어 있네.”
이시백과 윤시아의 표정이 동시에 나란히 굳었다.
당연하지만 두 사람은 설마 밖에 소리가 새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가만히 내버려 둘 수도 있었는데, 이대로 본판에 들어가면 신음이 전부 들려버리니까. 평양댁의 사생활을 지켜주고 싶어서 말해줬어. 다른 방에 들어가서 즐기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개인적으로는 별관 화장실을 추천.”
“…….”
“그럼.”
자기가 할 말은 다 끝났다는 태도로 이시영이 방문을 닫았다.
싸늘한 정적이 접견실에 가라앉았다.
윤시아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서는 얌전히 자기 의자로 돌아갔다.
이시백 또한 평소의 냉엄한 표정을 되찾기 위해 쓸데없이 헛기침했다.
“……다음 손님을 모시도록 할까.”
“……네, 선배.”
아직은 미숙한 신혼부부가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