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달의 제국-129화 (129/142)

건달의 제국 129화

제17장 원더풀 데이즈(4)

이시백은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상대방의 미소가 너무나 투명한 것이었다.

한없이 깨끗한 물소리를 들었을 때 무심코 이쪽의 사고마저 물결에 휘말려 흘러버리듯,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오가던 생각이 깔끔하게 지워졌다.

“……나는 영웅 같은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시백은 그저 혓바닥이 움직이는 대로 말했다.

뇌를 한 바퀴 거치지 않고 말들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저 나는 누군가의 소원을 대신 이루었을 뿐이다. 텔레비전 속의 내가 지껄이는 말 한마디 한마디 중에서 나의 본심에서 우러나온 단어는 한 개도 없다.”

왜 이런 말을 해야 하는지.

그것도 왜 하필 이시영한테 말해야 하는지.

이시백은 전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단지 마음에 따라 입술을 움직였다.

이시영은 그런 이시백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북방의 안전 따위에는 아무런 흥미도 없다. 이 나라가 망하든 말든 내 소관이 아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시민으로 취급받든 말든, 그것 역시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응.”

이시영이 나지막하게 얘기했다.

그녀는 군청색 그림자에 반쯤 묻혀 있었다.

“유람선에서 평양댁이 말했잖아.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평양댁은 단지 그 사람을 위해 노력했을 뿐이지? 알고 있어.”

“…….”

“평양댁은 분명히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 않고 그 사람을 위했을 거야. 평양댁은 겁도 많고 부끄러움도 많으니까. 그 사람한테 자신의 진심을 말해주지도 않았겠지.”

말 그대로였다.

이시백은 누구한테도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예컨대, 원서는 설마 그녀한테서 이시백이 신념을 빌려왔다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원서뿐만이 아니라 윤시아, 유현도, 순우경, 장나래,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시백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발적으로 행동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평양댁은 순수하게 그 사람만을 위해 삶을 바쳤어. 아마도 평양댁은 그 사람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겠지만.”

이시영은 그걸 지적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평양댁의 자세야말로 아름답다고 생각해.”

“…….”

“다른 누군가를 위해 맹목적이게 될 수 있다니. 부러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전부 끝났다는 것처럼.

이시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그러했듯 이시백은 이번에도 그녀가 하는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왠지 모르게 이대로 이시영을 병실에 버려둔 채 혼자서 광장에 나가서는 안 되겠다는 예감이 강력하게 들었다.

“이시영.”

이시백이 휠체어를 움직여 침대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름이 불렸는데도 이시영은 여전히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시백이 허리를 숙여서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아주 어릴 적, 나에게는 한 살 터울의 친동생이 있었다고 한다. 머리가 굵기도 전에 다른 고아원으로 가서 나는 그 아이를 기억하지 못한다. 사진 한 장 가져보지 못했지. 만약에 그 아이가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면 딱 너와 같은 나이가 되었을 거다.”

이시백이 이시영의 오른손을 잡았다.

양손 검을 쥐어 잡고 이쑤시개처럼 휘둘렀던 손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이시영의 오른손은 작았다.

다만 근육과 뼈가 기이하게 뒤틀려서 울퉁불퉁한 감촉이 느껴졌다.

“내 동생이 되어다오, 이시영.”

잠자코 창밖을 바라보던 이시영이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눈길이 똑같은 높이에서 마주쳤다.

이시영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동생……?”

“S급 몬스터들이라는 위협이 정리되었다. 경찰과 협력하면 군부의 무릎을 꿇리는 것도 어렵지 않다. 북방은, 우리 헌터들은 외부의 적을 없애는 데 성공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내부의 위협밖에 없다.”

앞으로 이시백은 평양은 물론이요 여러 도시를 관할하게 되리라.

직접 제어하지 않을지라도 평양에서 어떤 정책을 밀어붙이느냐에 따라 북방 전체가 좌지우지될 것이다.

즉, 백산 용병단은 휘하에 무수한 헌터들을 거느린다.

집단이 거대해질수록 내부에서 분열할 가능성 또한 높아진다.

특히나 이시백과 이시영이 서로 대립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다.

“이시영, 너는 전형적인 몬스터 사냥꾼이다. 반면에 나는 몬스터 사냥꾼이 아니라 인간 사냥꾼으로 성공한 남자다. 비즈니스를 중시하는 헌터들은 나를 선호할 것이고, 순수한 사냥을 중시하는 헌터들은 너를 따르겠지. 우리는 정확히 헌터들을 반반씩 양분하게 된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근거지마저 상반되었다.

평양은 북방을 대표하는 도시.

북한 계열의 주민과 조선족 계열의 주민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시영이 다스렸던 인천은 중부를 대표하는 도시이며, 한국 계열의 주민과 화교 계열의 주민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이시백과 이시영이 서로 갈라지는 이유 따위는 수없이 널렸다.

“우리가 아무리 서로를 배제하고 싶지 않다 하더라도 세상사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 쌍방에 대한 오해가 겹치고 겹쳐서 불운한 결말이 일어나는 것은 흔하다……. 나는 그런 불상사를 원천봉쇄하고자 한다.”

“의형제의 술잔을 나누자는 거야?”

“그래, 정확하게는 의남매의 술잔이 되겠다마는.”

용병단과 용병단이 의형제의 관계를 맺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마피아, 조폭, 야쿠자와 다를 바 없는 헌터들은 본래 서로를 ‘형님’이라든지 ‘누님’이라든지 즐겨 불렀다.

이런 관습을 보다 확실하게 공표함으로써 이른바 의형제를 맺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중국 삼합회의 의형제 의식에서 전래하였다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일본 야쿠자의 사카즈키고토(盃事)에서 전래하였다고 말하지만, 구태여 전통을 찾을 필요도 없이 의식은 매우 간단했다.

두 용병단에 소속된 단원들이 모두 모인다. 그리고 용병단장 두 명이 술잔을 돌려 마시면 끝이다.

이시백이 창밖을 가리켰다.

“바로 저 광장에서 우리 둘이 의남매가 되는 것이다.”

“광장에서…….”

“전 세계에서 수천만 명이 평양의 광장을 지켜보고 있다. 그곳에서 의식을 치른다고 생각해 보아라. 우리는 수천만 명을 증인으로 삼아 의남매로 맺어진다. 만에 하나, 네가 나를 배신하거나 내가 너를 배신할 경우, 수천만 명의 증인에게 배신자는 지탄받을 것이다. 하늘이 두려워서라도 감히 배신은 상상조차 못하겠지.”

이시백의 의도는 명확했다.

수많은 증인을 사용하여 영원한 혈맹을 성사시킬 속셈이었다.

이제 두 사람은 S급 몬스터들을 토벌한 영웅이 되었다.

의남매 의식이 거행되면 틀림없이 전 세계에서 두 사람을 축복하리라.

그리고 사람들은, 이 아름다운 동맹이 추잡한 배신에 의해 더럽혀지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

이시영이 물끄러미 이시백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태어날 때부터 그늘을 품은 것 같았다.

이시백은 그녀가 이번에도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겉보기에 그럴듯한 명분이 아니라 진정한 이유를 들려 달라 부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의 침묵은 그녀의 마지막 배려였다.

그렇다면, 하고.

이시백은 자신의 적나라한 진심을 말했다.

“너를 지켜주겠다.”

“나를……?”

“그렇다. 인간들은 괴물에게 죽고, 괴물은 영웅에게 죽으며, 영웅은 다시 인간들에게 죽는다. 이시영, 사람들은 분명히 너의 업적과 재능을 시기하여 마침내 너를 죽이려 들 것이다.”

이시백이 조금 더 강하게 이시영의 오른손을 잡았다.

전생에서 이시영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몬스터가 아니라 동족인 인간이었다.

S급 몬스터를 두 번이나 토벌한 헌터조차도 죽여 버릴 만큼 전생의 뒷세계는 악독했다.

“하지만 내가 있는 이상, 아무도 너를 해칠 수 없다.”

인간들의 악의와 적의로부터 눈앞의 아이를 지켜내자, 라고.

이시백은 이 순간에 결심했다.

“나는 몬스터로부터 너를 지켜줄 수 없다. 오히려 너에게 보호를 받아야 할 처지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너를 노리는 인간들만큼은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다. 약속하마. 설령 수천 명, 수만 명, 수십만 명이 너를 죽이려 든다 할지라도 반드시 내가 지켜주겠다.”

그리고 이시백은.

이시영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자신의 품에 앉혔다.

마치 공주님을 안아든 것 같은 자세가 되었다.

“평양댁.”

“시끄럽다. 이의는 받지 않는다. 아니면 무엇인가.”

이시백이 눈썹을 잔뜩 찌푸려서 이시영을 내려다보았다.

품 안에 안긴 이시영은 무척이나 이시백과 가까웠다.

“의남매 의식을 거절하고 결국 나와 적대할 것인가. 그것도 좋다. 백산 용병단은 강하다. 인간고기를 써는 데 한정해서 우리 용병단은 세계 최강이다. 너의 용병단 따위는 순식간에 전멸시킬 자신이 있다.”

“…….”

이시영은 그를 빤히 바라보더니.

“으응, 아니야.”

고개를 얌전하게 도리질 쳤다.

그녀는 이시백의 품속에 다람쥐처럼 몸을 푹 파묻었다.

이후, 이시백은 거의 억지로 일을 진행시켰다.

어떻게든 두 사람이 함께 움직일 수 있도록 조치하라고 의사와 간호사한테 시켰다.

이시백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유현도와 순우경, 그리고 장나래가 급히 달려왔건만, 이시백은 그들을 반기기는커녕 대뜸 명령부터 내렸다.

“이제부터 광장에서 이시영과 의남매 의식을 치를 것이니 서둘러 준비해라.”

“아니, 형씨. 나흘 동안 시체처럼 누워 있다가 이제 일어났으면서 의식은 뭔 의식이요?”

순우경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뒤편에 서 있는 유현도와 장나래의 표정도 다르지 않았다.

“군말이 필요 없다. 설명할 시간도 아까우니 어서 준비나 해라.”

“웜마, 이럴 때 우리의 자문사는 어디로 도망치고 코빼기도 안 보인다냐.”

“시아와 원서도 이미 동의한 사안이다. 순우경, 너는 단원들을 총동원하여 광장에 단상을 설치하라. 전 세계에 생중계될 것이니 행여라도 실수가 없게 조심하도록.”

“……내가 여기서 명령에 수긍해야 하는 거요, 말아야 하는 거요?”

순우경이 지극히 난감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연하지만 순우경한테 대답해 주는 사람은 전무했다.

“유현도, 너는 방송사들을 불러 모아서 지금부터 1시간 뒤에 평양과 인천 간에 매우 중요한 의식을 거행할 거라고 귀띔해라. 너무 많은 것을 알려주지는 마라.”

“네, 네엣.”

“장나래, 이시영의 헌터들을 광장까지 안내해라. 미처 양복을 준비하지 못한 헌터들이 있으면 우리 쪽 예산을 써서 장만해 주고. 이제부터 형제가 될 사람들인 만큼 대접하는 데 한 치의 모자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알겠는가.”

“예, 단장님.”

이시백이 세 사람을 노려보았다.

“명령을 들었으면 어서 움직여야지 뭣들 하느냐. 시작하라!”

그리하여 백산 용병단의 간부들이 전광석화처럼 재빨리 움직였다.

존경하는 단장님이 깨어났다는 소식에 기뻐할 틈도 없이, 백산의 헌터들은 허겁지겁 광장을 정리해야만 했다.

경찰들까지 동원하여 광장에 빈 공간을 장만했다.

중장비가 오가면서 광장 한가운데 큼직한 단상을 설치했다.

갑작스러운 공사에 시민들은 당황했으나, 이시백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정보가 흘러나오자 즉시 흥분하였다.

아직 병원의 문은 열리지도 않았지만 시민들은 이시백의 이름을 연호하며 열광했다.

―이시백! 이시백! 이시백! 이시백…….

어느 순간부터 십만에 이르는 인파가 한 목소리 한 박자로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함성은 광장을 거세게 울렸으며, 도시의 상공에 강렬히 퍼졌고, 콘크리트 벽을 뛰어넘어 이시백과 이시영의 귀까지 당도했다.

준비가 완료되었다.

이시백은 회색 양복을 입었다. 이시영 또한 정장을 차려입었다.

두 사람은 모두 신체 이곳저곳에 붕대를 묶고 있었다. 덕분에 정장의 틈새로 붕대가 엿보였다.

휠체어를 타고 나가라는 의사의 권고에 이시백은,

“거만하게 보이므로 각하한다.”

하고 거절했다.

하다못해 목발이라도 짚으라는 권고에는,

“이시영 단장이 지탱해 줄 테니 필요 없다.”

라고 거절했다.

결국에 의사도 윤시아도 원서도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윤시아는 ‘저 양반의 쇠고집을 대체 누가 말려요?’ 하고 한숨을 쉬었다.

일단 이시백이 무언가를 결심하면 아무도 제지하지 못했다.

아무렴 일개 헌터 주제에 S급 몬스터를 두 마리나 사냥하자고 천명한 남자 아니겠는가.

이시백이 이시영의 손을 잡고 말했다.

“걸어갈까.”

“응.”

이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아직 상처가 전혀 낫지 않은 몸으로 힘겹게 발을 내디뎠다.

이시백은 자신보다 보폭이 작은 이시영을 배려하여 최대한 천천히 움직였다.

어차피 빨리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말이다.

보폭이 다르고 키가 다르며, 살아온 경험이 다르며 지켜본 풍경이 다른 두 사람은, 그러나 천천히 함께 움직였다.

이윽고 병원의 대문이 활짝 열리자.

―와아아아아아아아!

―이시백! 이시백! 이시백! 이시백!

―이시영! 이시영! 이시영…….

환호성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두 사람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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