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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의 제국-126화 (126/142)

건달의 제국 126화

제17장 ? 원더풀 데이즈(1)

1

소나기는 금세 그쳤다.

시간으로 따져서 기껏해야 두 시간쯤 내렸을까.

그러나 첫 빗방울이 땅에 부닥쳤을 때와 마지막 빗방울이 땅에 떨어진 지금을 비교하자면, 불과 두 시간 사이에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역사상 최초로 헌터들이 S급 몬스터를 단독으로 제압한 것이었다.

―끄라아아아.

―키륵, 케르륵…….

우두머리를 잃었기 때문일까.

몬스터 군단의 대열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A급 몬스터인 오우거조차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쳤다.

“새끼들이 도망친다! 도망치고 있다고!”

“살아남았다! 크으으, 병신 같은 놈들아! 우리가 살아남았어!”

헌터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시종일관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던 전선이 순식간에 앞으로 치고 나갔다.

전선 곳곳에서 생존에 대한 환희가 울려 퍼졌으며, 헌터들은 기쁨을 전의로 바꾸어서 언제 지쳤느냐는 듯 힘차게 창칼을 휘둘렀다.

그렇다.

인간들은 승리했다.

영웅적인 승리를 자아낸 장본인 두 사람이 나직하게 얘기했다.

“몸 상태는 괜찮은가.”

“응, 괜찮아. 뼈가 아홉 개 부러졌지만 문제는 없어.”

이시백과 이시영.

두 사람은 괴물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시백이 상대방을 바라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소리가 잘 안 들리는군. 괴물의 음파가 생각보다 강력했던 모양이다.”

이시영이 그러자 양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수화였다.

하지만 이시백은 수화를 알아보지 못하고 더더욱 눈썹을 찡그렸다.

“조금만 기다려 주지 않겠나. 이거, 청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상당히 불편하군.”

“평양댁은 어린애만 좋아하는 변태라는 소문이 있던데 진짜야?”

“미안하다. 아직도 얘기가 안 들린다.”

“정말로 안 들리는 모양이네.”

이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1분 정도가 흐르자 이시백은 서서히 청각을 되찾았다.

왼쪽 귀의 청력은 영구히 잃어버렸으나 오른쪽 귀는 그럭저럭 잘 작동했다.

이시백은 청각이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상대방의 안부를 되물었다.

“기다려 줘서 고맙다. 어떤가, 이시영. 몸 상태는 괜찮은가?”

“괜찮아. 뼈가 아홉 개 정도 부러졌지만 상관없어.”

“……보통 뼈가 아홉 개나 부러진 걸 괜찮다고 표현하진 않는다.”

“나는 보통이 아니니까.”

“천연덕스럽게 잘도 말하는군.”

이시백이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이시영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몇 걸음 바싹 다가왔다.

그녀는 품속에서 상자를 꺼내더니 다시 그 속에서 주사기를 끄집어냈다.

“그건 뭐냐?”

“진통제 효과가 있는 마약이야. 치료제로 곧잘 쓰이는 물건이니까 안심해.”

“나는 지금 진통제가 딱히 필요하지 않다만.”

“거짓말.”

이시영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걸음걸이가 묘하게 엇박자야. 팔을 들어 올리는 동작이 부자연스러워. 허리가 안 좋은 각도로 굽어져 있어. 겉으로만 봐도 평양댁은 지금 뼈가 스물네 개는 부러졌어. 당장 병원에 실려 가지 않으면 남은 인생을 휠체어에서 보내야 할 거야.”

이시백이 눈을 껌뻑거렸다.

“정말인가?”

“나, 지금까지 뼈 부러진 적이 수백 번. 웬만한 부상은 눈어림으로 전부 보여. 평양댁이 지금 비교적 고통을 적게 느끼는 원인은 뇌에서 자동으로 분비된 진통제 덕분이야. 조금만 더 있으면 평양댁은 50년 일찍 지옥을 경험하게 될걸.”

“…….”

이시백이 얌전히 팔뚝을 내밀었다.

이시영은 능숙하게 이시백의 팔뚝에 주사기 바늘을 꽂았다.

쭈욱 하고 진통제라는 이름의 마약이 투입되었다.

“주사기 한 개에 삼백만 원짜리 최고급품이야.”

“이거 무서워서 자네한테는 치료도 함부로 받지 못하겠군. 의뢰비에 넉넉히 보너스를 얹혀줄 테니 살살 봐주게나.”

“으응. 이건 서비스.”

서비스라니.

이시백이 다소 놀랐다.

항상 무표정이라서 알기 어려웠지만, 저래 봬도 이시영은 무척이나 돈 계산이 철저했다.

그 증거로 이시영은 자신의 용병단에 자문사를 두지 않았다.

자기가 직접 자문사 역할까지 맡아가며 용병단의 재정을 담당했다.

이번 원정군에서 이시영은 고용비로 정확히 442억 1,350만 7,250원을 받았다.

440억 원에 이르는 의뢰금이 무지막지했으나 여기서 놀랄 부분은 금액의 규모가 아니라 금액의 철저함이었다.

이시영은 10원 단위까지 정교하게 계산하여 돈을 뜯어낸 것이었다.

공짜야말로 이시영이 가장 혐오하는 낱말이겠지.

이시백은 반쯤 친밀감을 담아서 빈정거렸다.

“오늘이 날은 무슨 날인가 보군. 천하의 이시영 단장이 공짜로 뭔가를 선물하다니. S급 몬스터를 쓰러뜨린 것보다 개인적으로는 이쪽이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

이시영이 주사기 바늘을 빼내고 빤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모기 날갯짓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녹음기.”

“흠?”

“녹음기부터 꺼, 평양댁.”

맥락이 없는 요구였지만 이시백은 일단 순응했다.

아마도 녹음기에 들어가서는 곤란한 무언가를 얘기하려는 것이리라.

이시백은 상의에 부착되어 있는 녹음기를 꺼뜨린 다음,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아, 전원도 껐다. 무슨 일인가.”

“이건 공식적으로 녹음되지 않는 말이야.”

이시영이 말했다.

“내가 평양으로 올라오기 전에 김진하한테서 연락이 왔어.”

“보스 김진하가?”

“응, 내용은 간단. 군인들이 김진하와 내 목숨을 노린다는 것.”

이시백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S급 몬스터를 토벌했다는 사실로 인한 안도감과 성취감은 순식간에 증발했다.

“군부에서 인천과 서울에 눈독을 들였는가.”

“아마도. 군인들은 평양댁이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평양댁이 죽고, 나도 함께 죽고, 거기에다 김진하까지 모종의 일로 죽어버리면, 반도의 절반이 혼란에 휩싸여.”

“……정부로서는 혼란을 최대한 빨리 진압할 필요가 있다. 과연. 이번 토벌이 실패로 돌아가는 즉시 정부에선 대대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할 생각이었군.”

이시백이 탄식했다.

군부에서 헌터들을 사사건건 방해하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여기까지 노골적으로 헌터들을 제압하려 들 줄은 몰랐다.

레겐보겐 유람선이야 불행한 사고로 위장할 수 있다지만, 서울 보스만을 노려서 사살하면 ‘경찰이나 군부가 움직인 것 아닌가’ 하고 의심과 의혹의 목소리가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

“계엄령을 선포하는 동시에 군부대를 풀어서 서울과 인천, 평양을 단번에 제압한다. 그렇게 되면 합법적으로 각 도시에 잠들어 있는 불법자금을 압수할 수 있다. 아울러, 이번 혼란은 무리하게 원정군을 꾸린 헌터들 잘못이라며 책임을 떠넘기는 것도 가능한가…….”

이시백이 한숨을 쉬었다.

역시 중앙 정부의 여우들은 평범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가만히 앉아서 이익을 뽑아내는지 매우 잘 알았다.

“너구리같은 놈들.”

이시백이 한 차례 진절머리를 쳤다.

“그래서 보스 김진하는 어떻게 했는가? 안전한 곳으로 도피해서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 김진하는 도망치지 않았어.”

“뭐?”

이시영이 이시백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김진하가 말했어. 어차피 군부에서 작정한 이상 도망칠 곳도 마땅치 않다고. 그렇다면 차라리 새로운 시대를 위해 자신이 모든 걸 껴안고 죽겠다고.”

“…….”

“깨끗한 시대에서 살아가기엔 자기 같은 남자는 너무 더러운 먼지를 많이 묻히며 살아왔다. 그게 김진하가 평양댁한테 전해 달라고 부탁했던 말이야. 나한테는 평양댁을 잘 보좌해 달라고 부탁했어.”

“그렇다면, 보스 김진하는…….”

“지금쯤 죽었을 거야.”

이시영이 무심하게 단언했다.

“난 김진하의 정보를 듣고 자금을 모두 이동시켰어. 군인들이 내 아지트에 침입해도 거기엔 아무것도 없어. 그렇게 된 거야.”

“……왜 나한테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나.”

“평양댁의 어깨는 이미 충분히 무거우니까.”

이시영이 가볍게 이시백의 오른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바닥은 작았지만, 어째서인지 이시백은 자신의 오른손은 물론이요 팔뚝까지 전부 상대방한테 감싸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틀라스가 화성까지 짊어질 필요는 없어. 평양댁은 노력했어.”

“노력, 했다고……?”

“응.”

이시영이 양손으로 이시백의 오른손을 덮었다.

서늘한 온도가 손바닥에서 손바닥으로 전달되었다.

“수고했어, 평양댁.”

“…….”

단 한마디.

꾸밈도 치장도 없는 한마디가 이시백의 심장을 자그맣게 울렸다.

이시백은 자신의 가슴에 조금씩, 따뜻하고 미지근한 물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런가.”

좀처럼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진통제 때문이라고, 약기운 때문이라고 치부하고 싶었지만-

이시백은 도저히 부정하지 못했다.

이시영의 말 한마디에 심장이 진동했다는 사실을.

“나는, 노력했는가.”

“응.”

“자네한테 그런 얘기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여기까지 오고 말았는가.”

전생에서는 감히 올려다볼 수도 없었던 존재가 S급 헌터인 이시영이었다.

이시백은 그런 사람한테 진심 어린 칭찬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래, 이시백은 처음으로 누군가한테 인정받는 기쁨을 느꼈다.

“당신이 버텨줘서 나는 몸을 추스를 수 있었어. 당신이 5분이나 견뎌줘서, 나는 몸에 오물을 바르고 S급 몬스터의 뒤를 잡을 수 있었어.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평양댁, 당신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S급 몬스터를 자력으로 퇴치한 헌터로 남을 거야. 주사기는 평양댁의 노력에 대한 선물. 편안히 받아.”

이시백이 침묵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이시백은 입을 열 수 있었다.

“……자그마치 삼백만 원짜리 선물이로군. 이거야, 원. 부담스러워서 받는 것이 미안해질 정도다. 감사를 표하도록 하지.”

그건 일종의 비아냥이었다.

이시백은 자기가 감동했다는 것을 숨기고자 일부러 틱틱거렸다.

그는 무엇이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부류에 속했으나 왠지 모르게 이시영한테만큼은 솔직해지는 것이 불편했다.

무언가를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것과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달랐다.

이시백은 그 두 개의 차이점을 알지 못했으며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

이시영이 물끄러미 이시백을 올려다보았다.

“삼백만 원어치 선물은 별것 아닌 거 같아? 평양댁이 가진 재산에 비하면 이런 선물은 볼품이 없어서 감사하게 받을 이유가 없는 거야? 의외로 거만. 평양댁이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

“아니, 그런 게 아니다.”

예상보다 훨씬 진지한 반응에 이시백이 당황했다.

“단순히 해본 말이다.”

“나는 진심으로 선물을 줬는데 왜 평양댁은 그걸 그냥 깔봐? 평양댁에 비하면 나는 아무런 이유 없이 무시해도 괜찮은 사람인 거야? 의외로 오만. 평양댁이 그런 인간인 줄 몰랐어.”

“그게 아니라…….”

이시백이 변명하려고 입을 놀렸지만 혓바닥이 잘 돌아가지 않았다.

정말로 몸 안에서 약기운이 퍼진 것이었다.

이시영은 항상 팔뚝에 니코틴 패치를 다섯 장이나 붙이고 사는 여자인 만큼, 온갖 약물에 내성이 굉장히 강했다.

그런 이시영이 주사기로 들고 다니는 약물이었다.

마약이라곤 기껏해야 라블린시아 연초밖에 피우지 않는 이시백한테 이 약물은 지나치게 강렬했다.

덕분에 이시백은 횡설수설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자네를 무시하려는 생각은, 정말, 조금도 없었다. 믿어 달라. 보스 이시영. 정말이다.”

이시영이 또다시 이시백을 빤히 바라보았다.

“응, 인정할게. 평양의 주인한테 삼백만 원은 약간 부족하기도 해.”

“나는 자네를 모욕할 의도가 아니었고…….”

“그러니까 다른 것도 선물할게.”

다른 선물?

이시백이 몽롱해진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시야의 가장자리가 하얗게 물들어 오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의식이 끊어질 것 같은 순간.

꾸욱.

이시영이 이시백의 오른팔을 잡아당겼다.

이시백은 그대로 이시영의 품 안에 안겼다.

손바닥이 서늘했던 것에 비해서, 기분 탓인지 몰라도, 이시영의 품속은 무척 따뜻했다.

“자장가도 불러줄게.”

“……자장, 가……?”

“나 노래 잘 불러.”

이시백은 의식이 끊기는 와중에도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평양의 대부한테 자장가를 불러주겠노라고 뻔뻔하게 얘기하다니.

“아직 S급이 한 마리 더…….”

“걱정하지 마. 푹 자고 일어나면 전부 해결되어 있을 거야.”

이시영이 그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있으니까 안심해, 평양댁.”

“…….”

이상하게도 이시백은 안심이 되었다.

눈꺼풀이 스르륵 잠겼다.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은 청각 저 너머로, 그리운 자장노래가 들려왔다.

그 가사를 알아듣지 못한 채 이시백은 부드럽게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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