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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의 제국-123화 (123/142)

건달의 제국 123화

제16장 ? Everybody Wants to Rule the World(7)

과거에 원서가 이시백한테 등을 맡겼듯이.

지금 이 순간, 이시백은 원서에게 자신의 등을 맡기고, 전력으로 달려갔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원래부터 도박성이 짙은 토벌 작전이었다.

반도의 시민들은 이시백한테 박수와 갈채를 보내주었으나, 정말로 원정이 성공할 것 같으냐는 물음에는 아무래도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군부에 이르러서는 이시백이 실패할 것이라고 아예 장담했다.

하물며 기습적인 소낙비로 인하여 날씨까지 몬스터를 편들어주었다.

제아무리 이시백이 행운의 여신한테 사랑받는다 할지라도 이날만큼은 천운일랑 조금도 갖지 못했다.

최악의 조건.

최악의 상황.

천지가 진흙탕으로 뒤덮인 전장의 한복판에서, 이시백은 다시금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설령 내가 죽더라도 평양에 있는 현도가, 시아가 뒤를 이어준다. 두 사람이라면 북방을 통제할 수 있을 터. 아니, 어쩌면 나보다도 훌륭하게 다스릴지 모른다……!’

각오는 충분했다.

이시백이 깃발을 흔들었으며, 우연하게도, 그 깃발이 신호처럼 작동했다.

투우사가 흔들어 재끼는 붉은색 천 자락에 수소가 광분하듯 꼭 그처럼 흑마의 괴물이 거세게 달려든 것이었다.

흑마는 뒤늦게나마 누가 이 전쟁을 지난하게 만들고 있으며, 또한 누가 헌터들의 전열을 수호하는지 깨달은 듯했다.

녀석은 정확히 이시백을 노리고 다가왔다.

흑마가 이시백을 똑바로 노려보았고, 이시백 또한 그 시선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와라!’

시간의 흐름이 느릿해졌다.

이시백은 모든 신경을 괴물에게 집중했다.

근육의 떨림, 빗물이 몸에 부닥치면서 작게 울리는 소리, 자기가 내뱉는 호흡의 미세한 진동.

이시백은 모든 것을 감지했다.

어디 그것뿐일까.

타각.

땅바닥을 가뿐히 짓밟은 흑마의 말발굽.

저편에서 괴물이 내쉬는 숨결까지――.

그 무더운 수증기 같은 날숨조차 이시백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한없이 느려진 시간의 흐름을 온몸으로 휘두른 채 이시백이 소리쳤다.

“창을 앞으로!”

총대장의 명령에 정예 헌터 마흔 명이 한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창을 앞으로!”

장창들이 전방을 날카롭게 겨누었다.

창날들은 소나기마저 단호하게 갈랐다.

빗물이 떨어지면서 장창에 투신하였다.

이윽고 하나의 물방울은 서늘한 쇠창에 갈라져 아홉 개의 물방울이 되어 흩어졌다.

“고정!”

이시백이 지시했다.

그러자 헌터들이 화답했다.

“고정!”

헌터들은 오른발로 창대의 밑 끄트머리를 꾸욱 고정했다.

이 같은 장창진이 S급 몬스터에게 소용없다는 사실은 이미 증명되었다.

그럼에도 헌터들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명령에 복종했다.

“발포!”

“발포!”

왜냐하면, 그들은 총대장인 이시백을 신뢰했기에.

이시백이 이시영과 원서를 믿어 의심치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장창과 장창으로 이루어진 대열은 그 자체가 원정군 일천 명의 신뢰로 이루어진 성벽과 같았다.

이시백과 헌터들, 인간의 제일 견고한 방패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목청이 터지도록 소리쳤다.

“죽음을!”

“죽음으으을!”

그들이 만들어낸 유대의 성벽을 향해, 흑마가 돌진해 왔다.

환청에 불과할지도 몰랐으나 이시백에게는 말발굽 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1초, 혹은 2초, 어쩌면 그것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간격에 두고, 흑마의 괴물은 앞발을 내밀었다.

그때마다 발굽 소리가 진동했으며.

그때마다 괴물이 점점 더 이쪽으로 접근했다.

타각…… 따가닥…… 타가닥……!

일곱 발자국이 남았다고, 이시백은 생각했다.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일곱 발자국은 여섯 발자국까지 줄어들었다.

이시백이 두 눈을 부릅떴다.

‘다섯 발자국!’

이시백은 더 이상 깃발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 또한 다른 헌터들과 똑같이 깃발을 쭈욱 내밀었다.

깃발에는 창날이 달려 있었다.

백산을 상징하는 물건답게 창날은 AAA급 몬스터의 소재로 만들어졌다.

중요한 순간에는 얼마든지 무기로 사용할 수 있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지금이 그 중요한 순간이었다.

‘네 발자국!’

흑마의 괴물이 지척에 이르렀다.

강철로 이루어진 흑마의 피부도.

여인의 몸을 쏙 빼닮은 괴물의 본체도.

……녀석의 새까맣게 빛나는 안광마저.

‘세 발자국!’

이시백은 전부 보았다.

북방의 인류를 대표하는 남자와 북방의 몬스터를 이끄는 괴물.

두 개체가 서로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두 발자국!’

그리고.

‘한 발자국……!’

드디어.

거대한 충격음이 하늘과 땅 사이를 찢어발겼다.

장창방진이 흑마에 의해 난도질당하는 소리를 정작 이시백은 듣지 못하였다.

마흔 명의 헌터 중에서 스무 명이 허공에 치솟았고 그중에 이시백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이시백의 의식은 단지 하얗게 물들었다.

순백의 노이즈.

이미 수명이 다하여 꺼져 버린 수은등이 최후에 이르러, 잠시 동안 아주 뿌옇게 잔광(殘光)을 남기듯이.

자신이 기절하기 직전의 상태에 처했다는 사실을 이시백은 간신히 깨달았다.

‘결국.’

‘저놈한테 치였는가.’

이제 곧 숨이 끊어져 죽고 말겠지.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게 도리어 위험했다.

신체의 어느 부분이 아픈지 통각을 느끼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만큼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는 뜻이리라.

―……, ……!

무전기에서 누군가가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시백의 귀에는 닿지 못했다.

의식이 급속하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시백에게 가능했던 움직임이라고는, 벌써 절반쯤 가늘게 잠겨 버린 시야 너머로 비추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밖에 없었다.

이때 이시백이 본 것은 괴물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여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른손.

자기 자신의 오른손이 시야에 비추었다.

‘……?’

굳은살 투성인데다 투박한 손.

그것만으로는 특이하다 여길 부분이 전혀 없겠지.

하지만 단 한 가지, 오른손이 ‘주먹’을 쥐고 있었다는 것이 이시백으로 하여금 마지막 집중력을 불태우게 만들었다.

그렇다.

이시백은 아직까지도 깃발의 창대를 꾸욱 쥐고 있었다.

‘…….’

그 순간.

당장에라도 사라질 것만 같았던 이시백의 의식이 돌연 뚜렷해졌다.

한줄기 목소리가, 의식의 새하얀 공간에서 고요하지만 무섭게 울려 퍼졌다.

‘쥐고 있다.’

목소리는 재차 울림으로써 의식의 빈 공간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깃발을 놓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명확했다.

첫 번째, 이시백의 신체가 깃발을 놓쳐 버릴 만큼 손상되지 않았다는 것.

두 번째, 이시백의 의지가 창대를 포기해 버릴 만큼 꺾이지 않았다는 것.

그리하여.

‘아직 조금 더, 싸울 수 있다!‘

이시백은 찰나의 순간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아직 자신이 ‘공중’에 떠올라 있음을 알아챘다.

괴물이 장창방진에 틀어박으면서 일으킨 충격파에 의하여 이시백은 날아올랐으며 여전히 그 상태 그대로 부유하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은 조금 후에 떨어지리라.

‘무사히 착지한다.’

이시백이 허공의 한가운데에서 최대한 자세를 바로잡았다.

땅바닥에 내리고서 이시백은 곧장 괴물에게 달려들 속셈이었다.

‘녀석도, 내가 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건 예상하지 못했을 터!’

현재 이시백 주변에는 함께 싸워줄 병력이 전무했다.

사실상 이시백 홀로 S급 몬스터를 향해 돌격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도 이시백은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땅을 내디뎠으며, 오른손으로 놓치지 않고 있던 창대를 왼손까지 동원하여 강하게 쥐어 잡은 채, 앞으로, 전력을 다해서 앞으로 뛰어나갔다.

흑마는 이시백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그가 쇄도하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역시 눈치채지 못했다……!’

기실, 이시백은 땅바닥에 발바닥이 닿은 순간부터 격렬한 고통에 휩싸였다.

사지가 떨어지지 않았을 뿐이지 온몸의 뼈마디와 내장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근육이 파열되었고 뼈가 부러졌다.

그렇지만 이시백은 자신이 공격하는 것을 숨기기 위해, 괴물에게 눈치 채이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의지로 신음을 참았다.

입에서 숨결이 새어나가는 것조차 인내했다.

‘똑똑하게 맛보도록 해라, 괴물!’

어찌나 이를 꽉 깨물었는지 치아 틈새에서 피가 튀었다.

이시백은 창대를 치켜들어 흑마의 널찍한 옆구리에 찔러 넣었다.

그제야 흑마는 무언가가 뒤쪽에서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서둘러 말머리를 돌리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이시백이 찌른 창날은 딱딱하기 그지없는 괴물의 껍질을 찢어내고 푹 들어갔다.

‘이것이 사냥당하는 놈의 고통이다!’

괴물은 창에 찔렸고.

전투가 시작하고 처음으로 고통에 잠긴 비명을 토해냈다.

7

그것은 제삼자의 눈으로 지켜보자면 기적과 같은 광경이었다.

총대장 이시백이 괴물에게 치여 공중 높이 솟아올랐을 때, 헌터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시영이 쓰러졌고 이제 이시백까지 무너졌다.

반면에 몬스터 군단은 아직까지 건재했으며 결정적으로 S급 몬스터가 멀쩡했다.

여기서 더 싸움을 이어나가기란 어렵다고, 전쟁터에 남은 전원이 생각했다.

“단장님……!”

멀리서 저격 총을 겨누고 있던 원서가 나직하게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끝없는 절망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감히 자신의 유일무이한 이해자를 없애버린 괴물을 향해서 원서는 증오를 쏟아부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죽이겠다며, 원서는 이를 으드득 깨물며 저격 총을 조준했다.

바로 그때 원서를 비롯하여 모든 헌터는 목격한 것이었다.

괴물과 충돌하여 공중에 떠오른 이시백이 너무도 가뿐하게 착지하는 모습을.

“아?”

이시백은 낙법을 펼치자마자 창대를 내세워서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누군가가 흘린 피로 인하여 백산 용병단의 깃발은 빨간 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군데군데 퇴색하지 않은 순백색을 휘날리며, 창날은 정확히 흑마의 옆구리를 찔렀다.

―끼에에에에에엑!

끔찍한 비명이 천지를 흔들었다.

이시백의 공격은 괴물에게도 완전하게 예상외였다.

불의의 일격을 허용해 버린 괴물은 물론이요, 이시백의 아군인 헌터들마저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믿지 못했다.

더욱 가공스러운 장면은 이다음에 펼쳐졌다.

괴물은 창날에 꿰뚫렸지만 그래 봤자 단 한 번의 공격에 불과했다.

즉시 말머리를 비틀어서 앞발굽으로 이시백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이시백은 한참 전부터 괴물의 움직임을 예상한 것처럼 옆으로 몸을 굴렀다.

흑마의 앞발은 아슬아슬하게 이시백을 비껴 지나갔다.

이시백은 다시 창대를 휘둘러서 이번에는 흑마의 본체를 찔렀다.

―끼악, 끼라아아아악!

괴물이 고통에 몸부림을 쳤다.

어쩌면 이시백이 괴물의 공격을 피한 것은 전적으로 우연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괴물이 장창방진을 들이박았을 때 생겨난 충격파에서 조금 벗어난 것도, 괴물이 앞발을 휘둘렀을 때 간신히 옆으로 피한 것도, 모조리 한낱 행운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행운이 4초의 유예를 만들어냈다.

고작 4초에 불과했지만.

―원서!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결정적인 3초였다.

―지금이다! 쏴라!

이시백이 무전기를 통해서 소리 질렀으며.

원서는 숨을 꾹 들이마시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아앙!

총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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