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달의 제국-122화 (122/142)

건달의 제국 122화

제16장 ? Everybody Wants to Rule the World(6)

5

흑마의 괴물이 거칠게 투레질했다.

괴물은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고기’들이 아직까지도 버티는가.

―그르르르으…….

제일 위험해 보이는 녀석은 진즉에 처리했다.

녀석을 없애기 위해서 괴물은 비장의 한 수까지 꺼내 들었다.

하지만 고기들은 무너지지 않고 계속하여 저항했다. 날씨 조건마저 저것들한테 불리한데 말이다.

고기들은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을 듯 간당간당 묘기를 부려주었다. 그것이 한참이나 지속되는 것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의지를 불태우는 것도 한두 번이겠지.

이제는 도리어 괴물의 부하들이 의욕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그에에엑…….

―크릉, 흐르크.

희망이란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보다 코앞에서 증발해 버릴 때 더더욱 가혹해지게 마련.

항상 아슬아슬하게 돌파에 실패하면 그야 좌절감이 엄습해 올 수밖에 없었다.

오우거들은 더 이상 무작정 뛰어들지 않았다.

라이칸스로프도 조금 전에 비해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흑마는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전장의 공기가 변했음을.

―…….

아직까지는 변화의 정도가 크지 않았다.

다만,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괴물은 이해했다.

여기서 기세를 올리지 못하면 괴물의 부하들은 틀림없이 몸을 사리게 된다.

기실 부하들이라고 해봤자 본질적으로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

승리한다는 확신이 없는데도 흑마한테 충성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위험을 감수해야겠지.

―타각.

흑마가 앞발굽으로 땅을 가볍게 밟았다.

안전하게 후방에서 대기하는 것은 포기한다.

다소 공격을 받더라도 부하들을 이끌어주도록 하자.

결단이 서자 괴물은 주저 없이 실행에 옮겼다.

판단에서 행동까지 걸리는 시간이 극단적으로 짧은 것이 바로 이 괴물의 장점이었다.

흑마는 순식간에 속력을 올리면서 크게 울부짖었다.

―키아아아, 끼라아아아악!

그것은 부하들한테 보내는 일종의 신호였다.

가장 무서운 고기를 해치워 주었는데도 너희는 여전히 지지부진하고 있다. 답답해서 도저히 지켜보지 못하겠다. 내가 직접 나서마. 그러니 행여라도 물러설 생각 따위는 품지 마라.

괴물의 포효는 확실히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크라아아아하!

전선 곳곳에서 부하들이 괴물한테 호응했다.

부하들은 흑마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신뢰했다.

이까짓 고기들 따위는 괴물이 단번에 쓸어버릴 수 있었다.

하마터면 전의가 상실되어버릴 찰나, 흑마가 적절하게 개입한 덕택에 부하들은 다시금 의지를 북돋웠다.

흑마가 돌격을 감행했다.

―끼에, 그오, 키아아아악!

나를 보아라.

내가 얼마나 손쉽게 고기들을 도륙하는지 똑똑히 지켜봐라.

괴물은 돌풍을 일으키며 고기들이 이루고 있는 방벽으로 달려 나갔다.

6

“녀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대부님!”

어떤 헌터가 이시백에게 소리쳤다.

이시백은 헌터가 누구인지 몰랐다. 처음 보는 헌터였을 뿐더러 평양 출신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시백은 헌터가 가리키는 ‘녀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바로 파악했다.

얼굴에 묻은 빗방울을 닦아내면서 이시백이 전방을 쳐다보았다.

“드디어 오는가……!”

전차만큼 거대한 흑마가 전열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시백이 괴물을 바라보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2초가 흘렀을 뿐인데도, 녀석은 이미 바람처럼 빠르게 돌진하고 있었다.

괴물에게는 최고 속력을 내는 데 단지 네다섯 발자국이면 충분한 것 같았다. 가히 공포스러운 속도였다.

이시백이 무전기에 대고 소리쳤다.

“S급이 다가오고 있다! 반복한다, S급이 다가오고 있다! 전 부대원, 각별히 전방을 주시하라!”

이시백은 말을 내뱉자마자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전방을 주시해서 뭘 어쩌라는 것인가.

가만히 노려보고 있으면 S급 몬스터가 저절로 얌전해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이따위 명령은 차마 명령이라고 칭하기에도 부끄러웠다!

그런 느낌에 사로잡히자마자 이시백은, 마치 예전부터 작전을 궁리해 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뒷말을 이어나갔다.

“S급 몬스터의 최대 강점은 바로 속력이다! 녀석은 가공스러운 속력으로 이쪽의 전열에 단숨에 구멍을 내어버릴 속셈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해서, 녀석이 마음대로 날뛰지 못하도록 붙잡아두기만 하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다가온다!”

이시백의 목소리는 굵직했으며 더없이 단호했다.

헌터들은 명령을 들으면서 행여라도 지금 총대장이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아무렇게나 떠들어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 목소리에는 모든 의심을 불식시키는 힘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보스 이시영이 불의의 일격을 당한 것은 저 영악한 놈이 본모습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본모습이 드러난 이상, 녀석을 퇴치하는 방법 또한 명확해졌다. 전군에 명령한다! 놈이 돌파를 시도하는 순간을 노려서 한꺼번에 덮쳐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녀석이 제 속력을 내지 못하도록 막아라!”

이것이 정말로 올바른 파훼법인지 이시백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시백에게는 헌터들을 이끌어갈 의무가 있었다. 의무는 의심을 받는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되는 법.

이시백은 총대장으로서, 모든 헌터를 통솔하는 대부로서 확고한 신뢰를 보여주어야만 했다.

“알겠는가! 녀석의 속력만 잡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전쟁은 우리가 승리한다! 역사상 최초로, 우리는 S급 몬스터를 토벌한 사냥꾼이 된다. 승리를 잡아라, 제군! 기적을 보여주어라! 괴물들한테 누가 이 땅의 주인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헌터들이 함성을 질렀다.

이시백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흑마를 쳐다보았다.

‘올 테면 와보아라!’

이윽고 흑마가 돌진해 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흑마는 이시백으로부터 제법 떨어진 곳을 타격지점으로 삼았다.

괴물의 돌격을 막아 세우기 위해 제2부대 헌터들이 장창을 쭈욱 내밀었다.

헌터들은 두려움에 잠기면서도 가느다란 장창에 모든 희망을 맡겼다.

제1부대의 헌터들은 장창방진 양옆에서 끊임없이 총탄을 쏴 갈겼다.

―끼아아아아아!

헌터들의 저항을 비웃는 것일까.

흑마가 쇳소리 비슷한 울음소리를 토했다.

고슴도치 가시처럼 장창들이 빼곡하게 밀집해 있었건만, 흑마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장창방진을 향해 뛰어들었다.

괴물에겐 정교한 전법도 값비싼 무구도 필요하지 않았다. 괴물의 몸뚱어리 자체가 흉기였다.

바람의 속도로 달려오는 전차 크기의 괴물이란, 인간의 장창 따위는 한낱 이쑤시개로 치부해 버려도 될 만큼 압도적이었다.

마침내, 흑마가 헌터들과 충돌했다.

쿠웅!

무언가가 부닥치면서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충돌과 동시에 열댓 명의 헌터들이 공중에 치솟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여섯 구의 헌터들이.

그들은 허공에 떠올랐을 무렵 이미 목숨을 잃은 상태였으며, 제각기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지가 기괴하게 꺾여 있었다.

“크하아아악!”

“이, 이, 히이이이이!?”

헌터들이 비명을 질렀다.

여태까지 A급 몬스터들도 잘만 막아온 정예병들이 자그마치 스무 명 가까이 죽어버렸다.

붉은색의 고깃덩어리가 사방에 흩어졌다. 핏물이 터졌고 내장이 흘러내렸다.

단 한 차례의 돌격.

고작 한 번의 공격으로, 전열 한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린 것이었다.

“막아라!”

이시백이 고함을 질렀다.

대부분의 헌터와 다르게, 이시백은 S급 몬스터의 위력에 경직되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두려움에 잠겨 떨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것들이 이시백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시백은 북방 전체의 미래를 맡고 있었다. 헌터 스무 명쯤이야 얼마든지 희생해도 좋았다!

“녀석은 돌격이 끝난 직후에 가장 약해진다! 가장 속도가 약해지는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 제군들, 두려워하지 말고 녀석에게 달려들어라! S급의 발목을 붙잡아라!”

헌터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재차 몸을 움직였다.

총대장의 명령이 옳았다. 흑마의 돌격은 분명히 무지막지했지만, 일단 돌격이 끝난 시점에서는 그 무지막지한 속력을 상실했다.

지금이야말로 S급 몬스터를 붙잡아둘 때였다.

―끼엑, 크오오오옥!

하지만 딱 한 발자국 늦었다.

헌터들이 우르르 달려들어서 포위망을 완성하기 전에, 간발의 차로 흑마는 전열을 빠져나갔다.

흑마가 도망치자 A급 몬스터들이 빈자리를 메우듯이 쳐들어왔다. 헌터들은 분통을 삼키면서 몬스터들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다, 다시 온다――!”

그리고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흑마는 저 멀리 뒤편으로 물러서더니, 조금 전에 그러했듯이 전열의 한 지점을 향해 쇄도했다.

괴물을 막기 위해서 또 다른 헌터들이 장창을 들이밀었다. 그 같은 헌터들의 분투를 괴물은 간단하게 짓밟았다.

“막아라! 지금 막아라!”

이시백이 처절하게 소리쳤다.

방금의 돌격으로 정예 헌터 열세 명이 다진 고기로 변해 버렸다.

S급 몬스터가 전선에 합류한 지 불과 2분.

이 짧은 시간 동안 서른 명이 넘는 헌터들이 죽었다. 크고 작은 부상자까지 포함하면 무려 쉰 명에 이르렀다.

2분에 쉰 명.

단순히 계산하자면, 앞으로 20분 이내에 오백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해 버린다.

도저히 원정군이 감당할 수 있는 피해 규모가 아니었다.

“지금 막지 못하면 우리가 역으로 당한다!”

“이게, 어렵습니다, 대부님!”

한 헌터가 대답했다.

“돌격할 때만큼은 아니지만 되돌아갈 때도 저 새끼, 진짜 빠릅니다! 쉽게 잡을 수가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헌터의 지적이 맞아떨어졌다.

정예 헌터들이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하여 S급 몬스터를 막아 세우려 했으나 이번에도 간발의 차로 놓쳐 버렸다.

괴물은 이쪽이 포위망을 펼치는 데 필요한 시간마저 계산하는 듯했다. 절묘하게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안 된다.’

이시백이 생각했다.

‘이대로 무식하게 들이밀어서는 언젠가 우리가 전멸당할 뿐이다.’

카라반 트럭들에는 강철와이어가 준비되어 있었다.

땅바닥에 와이어를 설치하여 흑마를 넘어뜨리는 전법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시백은 즉시 그 전법을 철회했다.

와이어를 가져오는 데 걸리는 시간, 전장에 설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문제였고, 무엇보다도 소나기에 의해 눅눅해질 대로 눅눅해진 땅바닥에 장해물을 깔아봤자 S급 몬스터에 의해 가뿐히 쓸려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원서 부대장!”

정답은 한 가지뿐.

위기의 상황에서 제일 믿음직스러운 사람은 언제나 그녀였다.

이시백은 와이어 따위에 목숨을 거느니 차라리 자신의 영원한 용병단장인 그녀한테 모든 판돈을 걸어보기로 했다.

무전기 너머에서 원서가 곧장 대답했다.

―예, 단장님!

“이대로는 방도가 없다. 내가 병력을 이끌고 직접 녀석과 대면한다! 그걸 자네가 도와주어야겠다!”

―직접 대면한다니……!? 지나치게 위험합니다!

원서가 다급하게 총대장의 무모한 행동을 말리려 들었다.

그러나 그녀보다 앞서서 이시백이 명령했다.

“어차피 말라 죽느냐 한 번에 죽느냐, 두 가지 방식의 차이에 불과하다. 원서 부대장, 녀석이 전열에 파고들어 속도가 줄어든 틈을 노려서 나는 놈한테 달려들 것이다. 그때 자네가 녀석의 속도를 떨어뜨려 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어떻게…….

“녀석의 눈깔에 특제 총환을 박아주도록.”

원서가 순간 침묵했다.

이리저리 빠르게 움직이는 괴물에게 총알을, 그것도 괴물의 눈동자에 정확히 총탄을 명중시키라는 명령이었다.

제아무리 원서가 반도에서 제일 가는 저격수라 할지라도 한없이 어려운 난이도이리라.

다만, 만약에 성공한다면.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몬스터도 눈동자가 약점에 해당했다.

A급 소재로 만들어낸 탄환이라면 흑마의 눈동자에 타격을 입히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터.

난이도가 말도 안 되게 어려웠으나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알겠습니다, 단장님.

그 순간.

원서는 북방의 미래가 다름 아니라 자기 손에 달렸음을 깨달았다.

또한 그 책임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직감 역시 강하게 엄습했다.

원서는 자기도 모르게 저격 총을 강하게 쥐었다.

―단장님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훌륭하다.”

이시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과 똑같았다. 결국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와서 전쟁을 끝내는 역할은 이시백과 원서, 두 사람한테 돌아왔다.

단지 전생에서 이시백은 원서를 위해, 원서는 이시백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두 사람은 똑같은 전쟁터에 서서, 똑같이 적을 마주하고 있었다.

“기회는 두 번에서 세 번이다. 그 이상 전열이 돌파당해 버리면 우리가 무너져 버린다. 맞출 수 있겠는가.”

“아니요. 반드시 맞추겠습니다.”

약간은 엇나간 것처럼 들리는 말.

하지만 이시백은 원서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충분히 알아들었다.

맞출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었다. 반드시 맞추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원서에게 필요한 것은 질문이 아니라 명령이었으며, 그녀가 이시백한테 바라는 것 역시 하나의 명령이었다.

고로, 군말은 불필요.

재차 전열을 향해 달려오는 흑마의 괴물을 노려보며 이시백이 말했다.

“좋다. 원서. 나의 등을 너에게 맡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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