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달의 제국-114화 (114/142)

건달의 제국 114화

제15장 ? 하늘과 땅 사이(6)

9

“그럼 백산 용병단의 발표를 이쯤에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이시백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기자 회견은 결국 16시간이나 이어졌다. 가볍게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웠겠지.

마침내 질의응답이 끝났을 무렵, 회견실에는 단지 좀비 쉰 마리가 널브러져 있을 따름이었다.

사방에서 기자들의 신음이 끊이지 않았다.

“나 이번에 돌아가면 반드시 휴가 낼 거야…….”

“커피를 너무 마셨더니 심장이…… 우우욱.”

어디선가 꾸질꾸질한 냄새가 피어났다. 땀냄새와 입냄새가 혼돈의 칵테일을 이루어서 회견실을 낡은 지옥으로 만들고 있었다.

기자들은 책상에 얼굴을 처박고 마치 귀신을 보는 듯한 눈초리로 이시백을 쳐다보았다.

“정말로, 왜 저 사람만 멀쩡한 거냐고…….”

이쯤 되면 감탄스러운 일을 뛰어넘어 불가사의한 일에 근접했다.

물론 회견 중간 중간에 이시백은 손수건을 꺼내서 눈가를 닦곤 했다.

하지만 16시간 내내 서 있다니? 더군다나 이시백은 생수 이외에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하루 동안 굶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방금 기자 회견실에 입장한 것처럼 자세와 표정이 굳건했다.

기자들이 보내오는 시선들을 묵묵히 떨쳐 내며, 이시백은 회견실에서 걸어 나갔다.

이시백이 나오자마자 통로에서 그를 맞이하는 여자가 두 명 있었다.

“수고하셨어요, 선배.”

먼저 윤시아.

윤시아는 이시백이 회견을 진행할 때 줄곧 이곳 통로에서 기다렸다.

이시백이 16시간 동안 고생한 것과 마찬가지로 윤시아 역시 똑같은 시간을 버텼다.

의자에 앉아서 잠깐 졸기도 했지만, 그건 소녀의 나이를 고려하자면 귀여운 애교에 지나지 않으리라.

윤시아가 방긋 웃으면서 수건을 건네주었다.

“자아, 여기요. 얼굴부터 씻으세요.”

“……내가 화장한 게 마음에 안 들더냐?”

“네. 무슨 기생오라비처럼 변해서 전 별로였어요. 어차피 선배의 매력 포인트는 선이 굵직굵직한 거라서 맨얼굴일 때 제일 잘 생겼어요. 쓸데없이 화장해 봤자 멋이 사라진다구요.”

“으음.”

이시백이 안색이 어두워졌다.

‘다음부터는 현도가 강권해도 화장을 하지 말아야겠군.’

참고로 윤시아의 의견은 지극히 주관적이었다.

유현도가 주도한 이시백의 메이크업은 매우 훌륭했고, 텔레비전을 지켜보는 시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윤시아의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사실을 지적할 만큼 간덩이가 부은 사람은, 안타깝게도 평양에 존재하지 않았다…….

“저는 좋았습니다. 단장님.”

원서가 말했다. 그녀는 윤시아보다 약간 떨어져 있었다.

이시백은 윤시아가 건네준 물수건으로 한번 화장기를 씻어내고, 원서가 건넨 수건으로 다시 한 번 얼굴을 말끔히 닦았다.

“단장님께선 목소리가 워낙에 나직하니 말입니다. 이미지에 균형을 잡으려면 얼굴선은 가늘게 가져가는 편이 좋습니다. 멋진 기자 회견이었습니다, 단장님.”

“누가 첩 아니랄까 봐 알랑방귀부터 뀌는 거 봐요.”

윤시아가 원서를 흘겨보았다.

“적당히 해요, 적당히. 암만 봐도 선배의 매력을 없애는 분장이었는데 뭘 무조건 칭찬하고 있어요. 원서 언니, 드디어 좁쌀만 한 눈알이 망가졌어요? 아하. 이제 보니까 언니는 선배의 맨얼굴이 화장했을 때보다 매력이 없다고 말하는 거였군요.”

“터무니없는 모함입니다. 저는 방송의 경우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자문사님이야말로 허구한 날 자신의 취향을 밀어붙여서…….”

“자기 취향을 강요하는 건 언니겠죠. 저번에도 완전 말도 안 되는 코디를 선배한테 해버렸으면서.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나비넥타이가 선배랑 어울릴 것 같아요?”

“여전히 오만하군요. 단장님께는 자문사님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두 여인이 조용히 말싸움을 시작했다.

이런 광경을 눈앞에 두고도 이시백은 태연했다.

예전이었다면 사랑하는 두 여자의 충돌에 가슴이 싸해졌으리라.

그러나 인간이란 동물은 성장하게 마련. 이시백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이 아수라장에 익숙해졌다.

수건에 얼굴을 부비적거린 다음, 이시백이 느긋하게 말했다.

B22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고?”

“아, 보스 이시영이 곧 도착한다고 전갈을 보내왔어요. 앞으로 1시간 안에 도착할 것 같은데요.”

“……그걸 먼저 말해주어야지, 둘이서 말싸움이나 하고 있으면 어떡하느냐.”

이시백은 어이가 없어서 핀잔을 주었다.

윤시아와 원서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어진 것이겠지. 그나마 윤시아가 변명을 시도해 보았다.

“선배 많이 피곤하잖아요.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이시영이랑 만나도 괜찮으니까요. 상대방도 빤히 이쪽이 회견한 거 알고 있을 테니 이해해줄 테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이시영은 한 도시의 보스인데도 불구하고 흔쾌히 이번 토벌에 참가할 것을 선언해주었다. 당연히 내가 직접 나서서 마중해야 마땅하다.”

윤시아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진짜요? 지금 선배 하룻밤 꼬박 새운 데다가 목소리까지 조금 쉬었다구요? 세 시간 정도만이라도 쉬었다가 손님을 대접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저는 생각하는데요.”

“이시영이 우리한테 전적으로 협력해준다고 해서 이시영의 부하들까지 그럴까. 인천에서 터줏대감 노릇하던 양반들이 일개 헌터처럼 바리바리 짐 싸서 여기까지 기어왔으니 불만이 대단할 터다. 그런데 정작 자기네를 초대한 장본인이 털끝만큼도 모습을 안 보인다?”

이시백이 고개를 저었다.

“기본적인 예의가 아니다. 이시영의 부하들이 분노를 터뜨려도 이쪽에서 달리 할 말이 없지. 사소한 일로 불화가 생겨버리면 S급 몬스터 토벌에 나섰을 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편안히 눈을 붙이고 휴식 따위를 취할 때가 아니다.”

“그건, 뭐. 그렇지만요.”

윤시아가 떫은 얼굴로 턱을 끄덕였다.

“그럼 아지트에 우리 애들 전부 집합시키라고 명령해 둘까요?”

“도시 바깥까지 마중하러 간다. 물론 단원들은 전부 소집하도록.”

“으엑…… 좀 과례(過禮) 아니에요?”

“절대 아니다.”

이시백이 단언했다.

“이시영과 그녀의 부하들은 목숨을 걸고 사냥에 나서주는 것이다. 여기에 과례라고 부를 만한 부분이 어디 있겠느냐. 평양이 규모 면에서 인천보다 거대하다 해도 이시영의 패거리는 반도에서 유일무이한 S급 헌터의 지휘를 받는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명심해라, 시아야.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긍지로 여기는 부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아무리 겉으로 웃어주고 친근하게 대해주어도, 결국 그 사람의 긍지를 무시하거나 경멸하면 관계는 삐꺽거릴 수밖에 없어.”

여기까지 말하는 데 부하로서 더 이상 말릴 도리가 없었다.

윤시아는 얌전히 휴대전화기를 꺼내들어 모든 단원들한테 소집령을 하달했다.

백산 용병단은 이제 일백오십 명에 이르는 정식 단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아직 간부는 이시백, 윤시아, 원서, 순우경, 유현도, 장나래, 이렇게 여섯 명밖에 없었지만.

아지트에서 대기하고 있던 순우경이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단원들을 바리바리 긁어모아 서둘러 평양의 남문(南門)에 당도했다.

이시백은 직접 단원들을 지휘하여 이시영 패거리를 맞이할 준비를 끝마쳤다.

16시간에 이르도록 회견을 진행하고도 지친 기색이 전혀 없어, 단원들은 이시백을 보면서 저절로 감탄했다.

“10분 안에 도착한대요, 선배.”

“음.”

이시백이 정면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남쪽에는 평양평야가 널찍하게 펼쳐졌고, 그 한가운데를 시커먼 평양-개성 고속도로가 달리고 있었다.

본래 아무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군데군데 구멍이 파이고 틈이 갈라진 도로였으나, 이시백이 집권한 이후 새로 아스팔트를 깔아서 깨끗하게 단장되었다.

고속도로 저편에서 희미한 트럭 무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네요.”

윤시아가 중얼거렸다.

거대한 트럭이 몸을 드러내나 싶었더니, 그 뒤로도, 또다시 뒤로도, 끊임없이 육중한 트럭들이 이어졌다.

열여덟 대에 이르는 트럭들은 전부 이시백이 개성에서 구매했던 차량과 비슷한 카라반 트럭이었다.

이시백의 차량보다야 덜 호화로웠지만, 오히려 무미건조하게 회색으로 칠해진 트럭들의 행렬은 묵직한 위압감을 내풍겼다.

“……숫자를 보니까 그냥 부하들 일부만 데려온 것 같지가 않은걸요.”

“아예 용병단 전체를 옮겨온 모양이군.”

차량들이 도시의 성문 앞에 천천히 멈추었다.

트럭들이 몰고 온 잔먼지가 조용히 흩날리는 가운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숨 막히는 정적이 잠깐 주위를 훑고 지나쳤다. 한 트럭에서 문이 딸깍 하고 열렸다. 그 소리가 침묵을 무너뜨렸다.

폴싹.

몸집이 작은 여자가 차량에서 뛰어내렸다.

잘못 보면 소녀로 착각해 버릴 만큼 작은 여자는 가뿐히 땅바닥에 착지했다.

그녀는 상습적으로 마약을 복용한 사람이 그러하듯 눈 밑이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

이시영.

반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용병단장이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그녀는 이시백을 발견하고 망설임 없이 발을 움직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머지 열일곱 대의 트럭들에서도 문이 벌컥벌컥 열렸다.

개미굴에서 개미가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이백 명의 헌터가 우르르 튀어나왔다.

헌터들은 대열을 정비하여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보스, 이시영을 뒤따랐다.

순식간에 이시영을 중심으로 질서정연한 전열이 완성되었다.

‘역시 훈련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군.’

저들은 모두 이시영을 따라서 두 번의 S급 몬스터 토벌에 참여한 경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어중이떠중이 헌터들, 그러니까 뒷골목에 숨어들어 마약이나 팔아 해치우는 종자와는 뿌리부터 달랐다.

진정한 의미에서 헌터라고 부를 만한 정예들이었다.

어쩌면 헌터보다는 ‘용병’이라 칭하는 편이 올바르겠지. 국가 조직에 소속되지 않았다는 점만 제외하면 군인들이나 다름없었다.

백산 용병단도 높은 등급의 헌터들만을 정식 단원으로 삼았으나, 실력에서나 경력에서나 이시영의 군단에는 결코 미치지 못했다.

“…….”

“…….”

황야 한복판에서 이시백과 이시영이 마주했다.

이시영은 여느 때처럼 무표정했다. 이시백도 낯빛이 무덤덤하기로는 누구한테 꿀리지 않았어도 이시영은 정말로 표정이 부재했다.

다만 약물에 찌든 눈가 너머로, 눈동자만은 어딘지 차갑게 윤기를 내고 있었다.

이시영이 작은 입술을 움직였다.

“회견.”

“음?”

“회견, 방금 끝나지 않았어? 굳이 마중하러 나올 필요는 없었는데.”

뜻밖에도 이쪽의 처지를 이해해 주는 발언이 나왔다.

이시백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제부터 생사를 함께 나눌 동료이지 않은가. 조금 피곤하다고 해서 동료를 대접하는 데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 배려해 주어서 고맙네.”

“사실은 내 부하들이 불만을 품을까 봐 두려웠던 거지?”

“…….”

또였다.

이시영은 또다시 이쪽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이시백은 불편한 감정을 슬그머니 드러냈다.

“틀린 지적은 아니다만 두렵다고 표현하는 게 조금 그렇군. 저번에도 말했잖나.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남자가 아니다.”

“괜찮아. 겁쟁이는 인간의 가장 올바른 형태야. 무언가에 솔직히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을, 나는 가장 존중해.”

여전히 사람 말을 듣지 않는군.

이시백이 한숨을 내쉬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단원들이 전부 머무를 수 있도록 우리가 숙소를 준비해 두었다. 카지노 호텔 하나를 통째로 비워놓았으니 충분히 휴식할 수 있을 거다. 얼른 움직이도록 하지. 자네와 논의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

이시영이 물끄러미 이시백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때였다. 이시영이 양손으로 이시백의 손을 붙잡더니, 마치 애완고양이가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그대로 자신의 뺨에 부비적거린 것이었다.

이 갑작스러운 행동에는 이시백마저 굳어버렸다.

“뭣…….”

이시백이 깜짝 놀라서 팔을 빼려고 했다. 그렇지만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작은 체구의 어디에서 악력이 나왔는지, 이시영은 강하게 그의 팔을 쥐어잡고 있었다.

이시백은 물론이고 백산 용병단의 헌터들, 이시영의 부하들도 경악에 잠겨 입을 떠억 벌렸다.

10초쯤 흘렀을까. 이시백의 손등에 마음껏 얼굴을 비비고서, 이시영이 천천히 얼굴을 들어올렸다.

“동맹의 표시.”

“…….”

그녀는 묘하게 만족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동맹의 표시라니, 자네…….”

“말보다는 행동이 더 신뢰가 가.”

“아니, 행동도 행동 나름이지 않은가.”

이시영은 이시백의 반론을 무시하고 터벅터벅 걸어갔다.

아마 이 4차원 여자에게는 방금 그것이 친근함을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본래라면 평양과 인천 간에 듬직한 동맹이 성사되었다고 기뻐해야 마땅하리라.

하지만 이시백은 전혀 기뻐할 수가 없었다.

“…….”

“…….”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윤시아와 원서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언뜻 봐도 ‘이게 어찌 된 노릇인지 해명해 주세요’ 하고 무언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이시백이 한숨을 쉬었다.

“……오늘도 제대로 쉬기는 글렀는가.”

이날, 이시영이 이끄는 헌터 200명과 김진하가 보낸 헌터 200명이 평양에 합류했다.

그리고 이들을 총대장으로서 이끌게 된 이시백은 두 애인에게 구박당하여 집무실 소파에서 잠을 취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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