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113화
제15장 ? 하늘과 땅 사이(5)
7
평양 시청에 마련된 회견실.
기자들은 얼굴 가죽이 좀비처럼 퀭하게 변질되었다.
눈 밑이 기미로 시커멓게 물들었고, 머리카락이 기름기로 떡을 졌다.
“어이, 나랑 교대하면서 쪽잠이라도 자는 거 어때?”
“어차피 조금만 더 있으면 끝날 것 같은데 버티지 뭐.”
피로에 쩌든 목소리가 회견실 곳곳에서 미약하게 흘러나왔다.
이따금 기자들은 슬쩍 단상을 쳐다보았는데, 그럴 때마다 입을 벌리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선 여전히 이시백이 우뚝 서 있었다.
“저건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구먼, 괴물.”
“벌써 몇 시간째야? 열한 시간은 되지 않았나……?”
“어째 가만히 앉아 있는 우리보다 저 사람이 더 멀쩡해 보이냐.”
열두 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시백은 단 한 번도 앉지 않았다.
힘들어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기자들은 쉴 새 없이 타자기를 두들기고 메모를 휘갈기고 카메라를 신경 쓰느라 녹초가 되었건만, 정작 수십, 수백 가지의 질문에 대답한 이시백은 굳건하기만 했다.
“정말 우리가 떠나기 전에는 계속 저럴 모양인데.”
“대단하네. 빈말이 아니라 진짜 대단해…….”
근성 하나를 따지자면 누구한테도 꿀리지 않는 직업이 기자였다.
그러나 기자 회견을 3시간, 6시간, 심지어 11시간 넘게 버티는 사람은 생전 처음 보았다.
전례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저 파격적이었다.
더군다나 태도가 변하지 않았다. 이시백은 줄곧 착실하게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얼마나 허황된 질문을 던져도 이시백의 안색에서 비웃음이 피어오르는 일은 없었다.
얼마나 적나라한 질문을 던져도 이시백의 입가가 싸늘하게 굳는 일은 없었다.
다만 진지하게. 일일이 진심을 담아 질문에 정면으로 맞섰다.
“저 뚝심 하나로 정치인 해먹어도 잘하겠어.”
“벌써 부산이 소란스럽다는 소리도 있더라. 하기야 텔레비전에서 24시간 내내 얼굴을 비치는데 얘기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겠지만…….”
이시백의 발표는 서서히 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S급 몬스터가 반도에서 발견되었다, 헌터들이 자력으로 S급 몬스터를 사냥하겠다.
벌써 이것만 다루어도 열흘은 우려먹을 기삿거리에 해당했다. 그렇지만 시민들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처럼 사실적인 정보가 아니었다.
바로 이시백의 태도였다.
“아예 지금 생방송으로 돌리고 있는 곳도 있대.”
“우리 같은 방송사는 꿈에도 꾸지 못할 일이군.”
기자들과 10시간 동안 성실히 회견에 임하는 자세.
그러한 태도 자체에 시민들은 어떠한 진실성과 같은 것을 감지하여 흥분한 것이었다.
기자들, 특히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회부 기자들은 물론 이시백의 진실성을 간단히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시백의 굳건한 의지만큼은 기자들에게도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어차피 정치에서 중요한 건 진실이냐 진실이 아니냐가 아니야.’
‘진실처럼 보이면 장땡이지. 그리고…….’
‘그런 쇼맨십을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고 유지해 내는 정신력과 체력. 그게 핵심이다.’
마치 필리버스터를 위하여 정치인이 수 시간 동안 연설을 해내듯이.
대중들은 언제나 추상적인 이념에 감탄하기 이전에 구체적인 인간한테 감복하기를 원했으며, 이시백은 그러한 대중의 심리를 훌륭하게 만족시켰다.
인간을 감탄시키는 것은 결국 인간이었다.
하나의 정치적인 철칙이 지금 기자회견실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게다가 본인도 애인도 전부 보육원 출신이라면서.”
“가족관계까지 깨끗하니 웬만해서 흠 잡힐 구석이 없군…….”
“이러다 정말로 평양 시장이나 그런 지위에 올라갈지도 모르겠어.”
이미 텔레비전에선 <이시백 용병단장의 생애>와 같은 영상을 짤막하게 제작하여 내보내고 있었다.
돈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낚아채는 방송사들의 소행이었다. 정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대중의 관심이 이시백이라는 개인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젊은 개혁자.
고아원 출신.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모습.
그야말로 대중이 열광할 만한 요소는 전부 갖추었다.
‘어차피 헌터 나부랭이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는 불평불만도 제법 많이 나왔지만 일단 사람들은 대체로 이시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회견에 지친 기자들이 시청 로비로 나와서 잠시간 휴식을 즐겼다.
로비에는 텔레비전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화면에서 계속하여 이시백 단장의 얼굴을 방송했다.
이럴 때 기자들은 새삼스럽게 신기한 감정을 느끼고 키득거렸다.
겨우 몇 발자국 떨어진 장소가 전국에 방송된다는 것은 꽤 재미난 일이었다.
“진짜 어느 곳이든 여기만 틀어대고 있네.”
“뭐, 이젠 S급 몬스터 토벌에 성공하느냐 마느냐에 이시백 단장의 천운이 달렸겠지.”
“이시영이 참가한다고 해도 솔직히 모 아니면 도의 성격이 짙으니까. 글쎄, 실패하면 실패하는 나름대로 이야깃거리가 생겨서 우리한테는 좋은 일…… 어어?”
그때였다.
이리저리 리모컨을 돌리던 기자의 손이 멈추었다.
동료가 이상한 반응을 보이자 나머지 기자들도 자연스레 텔레비전을 쳐다보았다.
다른 방송사와 마찬가지로 지금 채널에서도 이시백 단장을 다루고 있었다.
다만.
―그러니까 이 이시백 단장이라는 남자가, 평양에서 국가전복세력을 잡아내기 이전부터 줄곧 사람들 몰래 활약을 해왔다는 얘기입니까?
―예, 전국의 시민 여러분들께서는 약 1년 전에 벌어진 개성 장기밀매 사건을 기억하실 겁니다. 부산의 광역수사대가 직접 나섰을 정도로 파장이 거대했는데요. 저희가 단독으로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이 사건도 이시백 단장이 폭로했다는 겁니다.
기자들의 낯빛에서 피곤함이 싹 달아났다.
텔레비전에는 진행자 한 명과 전문 기자 한 명이 나와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전문 기자는 다른 사람들이 어디서 들어보지도 못한 정보를 잔뜩 가져와서 의기양양하게 풀어놓았다.
―정확하게는 폭로가 아니라 일종의 잠입 수사죠. 잠입 수사.
―잠입 수사요?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시백 단장의 행적을 보면요. 이게 평범하지가 않거든요. 의정부에서 마약 조직을 내부에서 폭로한 것도 그렇고, 개성에서 인신매매조직을 내부에서 폭로한 것도 그렇고. 지난번에 평양의 국가전복세력을 소탕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시백 단장이 내부에서 증거를 잡아준 덕분이거든요? 똑같은 행동이 3번이나 반복되었어요. 그럼 이건 볼 것도 없이 매우 목적성이 강한 거죠.
시청 로비에서 휴식하고 있던 기자들이 일제히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젠장할. 내 이럴 줄 알았지.”
“끄으응…….”
기자들이 신음하는 까닭은 간단했다. 이시백 단장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인물이더라, 이런 건 기자들에게 결코 충격을 안겨주지 않았다.
문제는 자신들이 모르는 정보를 어떤 방송사에서 먼저 입수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럴 경우에는 십중팔구 정보에서 뒤처진 기자들이 독박을 뒤집어쓰게 되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부르르르.
―띠리링, 띠리.
기자들이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기들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휴대전화기의 화면에는 저마다 상관들의 이름이 떠올랐다.
기자들이 한숨을 쉬면서 통화를 받았다. 직후, 전화기 너머에서 노성이 폭발하였다.
―야, 이윤식이! 너 현장에 있으면서 도대체 일하고 있는 거야 놀고 있는 거야!?
“선배. 아, 그걸 저만 못 잡았습니까. 보나마나 어디 두꺼운 파이프 가진 사람이 우연히 특종 얻어서 떠벌리는 것 같은데 제가 무슨 재주로 그걸…….”
―그럼 다른 곳에서 특종 잡아 내보내는데 예 잘하셨습니다, 계속 내보내십쇼 하고 반응할 거야? 이거 정신머리가 글러 먹은 놈일세. 당장 달려가서 뭐든 잡아와!
졸지에 기자들 전원한테 상부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졌다.
기자들은 이를 갈면서 도로 회견실에 들어갔다. 대충 정리하고 회견을 끝낼 생각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난리가 일어나 버렸다.
기자들은 아까 방송에서 들은 내용의 진의부터 확인하고자 했다.
“이시백 단장님. 방금 단장님이 개성에서 인신매매조직을, 의정부에서 마약 조직을 소탕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이게 사실입니까?”
“…….”
이시백이 물끄러미 기자를 바라보았다.
밤을 새웠는데도 이시백의 눈동자에서는 매서운 기색이 줄어들지 않았다.
단지 이례적으로, 여태까지 전혀 변화가 없었던 이시백의 표정에서 아주 잠깐이지만 희미한 미소와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 잠깐이기도 했거니와 미소 자체가 미약했기에 기자들마저 알아채지 못했지만, 이시백은 분명히 웃었다.
“결정적인 공헌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것이 확실하지가 않군요. 보다 정확하게 표현해서 대답을 드리자면, 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시백은 그 정보를 언론사에 뿌리지 않았다.
개성은 몰라도 의정부의 사건은 공식적인 기록에도 남지 않았다.
마약조직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언론사에 정보를 흘릴 만한 인물은 단 한 명…….
“제가 예전에 마약 조직과 인신매매조직에 잠입하여 내부의 사정을 폭로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시백은 자신의 설득이 먹혀들었음을 알았다.
그건 향후 정부와 치를 전쟁에서 이시백이 막강한 패 하나를 쥐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이시백의 과거 행적은 곧바로 텔레비전을 타고 다시 한 번 전국의 시민들에게 전달되었다.
8
―차 대장. 이런 정보를 정말 아무런 대가 없이 건네주어도 되겠나?
“걱정하지 마십쇼. 행여나 나중에 대가를 요구하지 않을 테니.”
어두운 방안.
차수현이 휴대전화기를 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제 신원만 철저히 비밀로 감춰 주십시오. 비밀 보장만 되면 앞으로도 언제든지 특종을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하하. 물론 우리야 가만히 있다가 대박을 잡은 셈이니 그 정도야 당연히 지켜줘야지. 걱정하지 말게. 차대장이랑 내가 알고 지낸 지 햇수로 10년이 넘지 않았나. 나를 믿어주게.
“감사합니다. 그럼…….”
차수현 대장이 통화를 끊었다.
차수현이 담배에 불을 붙여 한숨 들이마셨다. 연기가 입안을 감싸고 폐를 훑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아직 머리가 술기운에 취해서 알딸딸했으나, 차수현은 자기가 방금 내린 결정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막연하게 확신했다.
차수현이 멍하게 텔레비전을 쳐다보았다. 그는 벌써 11시간째 잠들지 않고 텔레비전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화면 속의 이시백이 그러하듯, 차수현은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캔맥주를 마구 들이켤 때보다 지금이 더 생기에 넘쳤다.
―결정적인 공헌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것이 확실하지가 않군요. 보다 정확하게 표현해서 대답을 드리자면, 예. 제가 예전에 마약 조직과 인신매매 조직에 잠입하여 내부의 사정을 폭로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 순간 차수현은 보았다.
이시백 단장이 아주 자그맣게 미소를 지은 광경을, 놓치지 않고 목격했다.
그러자 차수현이 별안간 미친 사람처럼 큰소리로 웃어댔다.
“하하, 으하하하! 아하하하……!”
그런가, 하고 차수현이 생각했다.
저 질문을 듣자마자 즉시 정보를 팔아재낀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니라 나임을 깨달았는가.
저 미소는 기자들에게 보내는 미소가 아니었다. 아마도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차수현한테 보낸 신호였다.
자신에게 협력해 줘서 고맙다고, 이제부터 잘해보자고 몰래 건네는 포즈였다.
“이시백 단장.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이지……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군요.”
차수현이 유쾌하게 웃었다.
앞으로 세상은 변할 것이었다.
그 변화가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 아직 차수현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변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그리고 변화의 한복판에는 차수현 본인 또한 끼어 있으리라…….
이시백은 이날 단지 대중의 마음만 얻은 것이 아니었다.
정부와 군부를 향해 선전포고를 날리기 전, 가장 중요한 인물을 섭외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