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107화
제14장 ? 고래싸움의 새우등(4)
3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
이시백이 전생이라 부르고.
이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시점의 일이었다.
“…….”
검은 장발의 여인이 무표정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백산 용병단의 단장인 원서. 삼십 대의 젊은 나이로 서울 강북을 제패한 이 여걸은, 홀로 집무실에 앉아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바로 두 시간 전, 동태상이 이끄는 헌터들이 이쪽의 근거지들을 급습했다.
포위망은 시시각각 좁혀왔다. 위급한 상황이라고 판단해야 마땅하겠지.
용병단원들은 어떻게든 불길을 잠재우려고 여기저기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그러나 원서는 어딘지 모르게 직감하고 있었다.
“……나를 버림패로 써버리겠다, 이거네.”
현재 경찰 측 간부들과 일절 연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래 원서는 경찰이 뒷세계에 개입하기 위해 심어둔 이른바 프락치였다.
그들 입장에서 원서는 수십 년에 걸쳐서 키워낸 비장의 한수.
경찰이야말로 원서를 소중하게 다루고, 그녀가 쓸데없이 소모되는 걸 누구보다 염려했다.
그래야지 정상, 이건만.
“결국 동태상이랑 나, 둘 중에서 동태상을 선택한 걸까.”
원서가 희미하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낌새는 예전부터 있었다. 순우경을 이용해서 동태상을 숙청하려는 계획이 파탄 났을 때부터, ‘어쩌면 경찰이 나를 버리려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고 원서는 짐작했다.
마침내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동태상이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이쪽을 공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원서한테 어떠한 경고도 날려주지 않았다.
연락조차 두절되었다. 이 땅의 경찰과 정부는 그녀를 버렸다.
“…….”
차라리 속이 시원해졌다.
그것이 원서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원서는 슬슬 이 나라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에 지쳤다.
자그마치 15년.
강산이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을 시간 동안, 원서는 정말 아무한테도 정체를 밝히지 않고 프락치 노릇을 수행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과연 이 땅에 충성을 바칠 가치가 있는지 그녀는 회의할 수밖에 없었다.
인신매매.
장기밀매.
납치와 감금.
폭력과 약탈.
모든 악행이 일상으로 굳어져 버린 이 땅에서, 중앙 정부와 경찰은 이제 그것들을 근절하려는 시도마저 포기한 것 같았다.
오히려 몬스터의 남진을 감당하지 못해 서울 이북을 모조리 방치하려 들었다.
‘죽는 건 두렵지 않아.’
평양의 유현도 또한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그다음 차례로 서울의 원서가 선택되면, 그녀는 오히려 영광이라 생각했다.
만일 뒷세계에 10년쯤 더 머무르게 될 경우엔 원서 역시 동태상처럼 타락할지 몰랐다.
목적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자로 전락해 버릴 가능성이 충분히 높았다.
거기까지 더럽혀지기 전에 죽음을.
심장 한편에 아직 자그마한 애국심이 남아 있을 때 최후를.
이제 와서는 그것만이 원서의 유일한 소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딱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시백이.’
원서는 낯빛이 어두워졌다.
듬직한 호위대장을 떠올리자 심장이 꾹 조였다.
‘시백이는 어떻게 하지.’
이시백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원서는 책에서 읽은 구절이 자꾸만 어렴풋하게, 다소 변형된 형태로 연상되었다.
내가 잠시나마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오직 그 남자 때문이었다…….
원서가 자기 자신을 믿는 것보다 더 굳건하게 이시백은 그녀를 믿어주었다.
원서가 그녀의 신념을 지지하는 것 이상으로, 이시백은 그 이상을 지지해주었다.
인간은 하나의 부실한 건축물과 같아 수십 년이 지나면 이윽고 풍화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어느 날, 누군가 한 사람이 예고도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와서 그곳에 살기 시작한다면―그곳을 돌봐주고, 집으로 여겨주고, 보살펴 주기 시작한다면―인간은 10년을 뛰어넘고 20년을 뛰어넘어 계속해서 버틸 수도 있었다.
어느 날 이시백이라는 남자가 원서의 안에 발걸음을 들였으며.
그날 이후로 원서의 마음속에서는 조용하지만 편안한 음악과 같은 발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하나의 건축물이 될 수 있는 인간이었다는 것에 감사를.
그 건물에 들어와서 머무르는 인간을, 어쩌다 삶에서 마주쳤다는 것에 다시 감사를.
이제 곧 마흔 살이 되어 가는 무렵, 이따금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그녀가 미약하나마 미소를 짓는다면 오로지 이시백 덕분이리라.
원서가 생각했다.
‘시백이는 꼭 살리고 싶어.’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를 살릴 수 있을까.
누구보다도 자신한테 충성스러운 그 남자를 어떻게 떼어 낼 수 있을까.
고민이 이어지던 순간, 원서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아니, 아니야.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돼!”
정말로 간단한 이야기였다.
지금 원서가 이시백을 살리고 싶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시백 역시 원서를 살리고자 온갖 계책과 방안을 떠올리고 있을 터였다. 그것을 이용하면 그만이지 않겠는가.
원서가 흥분하여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조금 있다가 열릴 간부회의에서, 시백이는 틀림없이 자기가 단독으로 포위망을 돌파해 보겠다고 제안할 거야. 자신한테 동태상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그래야 단장인 내가 안전해지니까!’
원서가 얼른 금고에 다가갔다.
그녀는 금고 자물쇠를 열면서 생각에 몰두했다.
‘시백이는 호위대장이니까. 자연스럽게 자기가 시선을 잡아끌 수 있다고 확신하겠지. 그렇지만, 그건 내가 경찰의 프락치라는 사실을, 그리고 장태성이가 나를 감시하는 프락치의 프락치라는 사실을 모르니까 가능한 소리야……!’
경찰이 원서를 버리기로 결정한 이상, 장태성도 그녀를 말살하는 데 한몫 거들 게 분명했다.
애당초 장태성은 원서에게 충성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원서가 폭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경찰들이 그녀한테 걸어둔 개목걸이였다.
‘시백이의 생각을 역으로 이용하자.’
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장태성을 계속 데리고 있는 거야. 그러면 경찰들은 장태성을 통해서 내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 파악하겠지. 경찰의 정보는 그대로 동태상한테 넘어갈 거고. 결과적으로, 시백이가 아니라 나한테 시선이 집중돼.’
요컨대 역발상.
이시백은 자기가 미끼가 되어 적군의 시선을 붙잡아둔다고 생각하리라.
그렇지만 원서는 정반대로 자기 자신이 미끼가 되어버릴 속셈이었다.
배신자 장태성 때문에, 동태상의 시선은 절대 이시백한테 쏠리지 않는다.
이시백이 미끼 역할에 불과하다는 것을 동태상은 처음부터 파악할 수 있다.
이시백에겐 그다지 많은 병력이 할애되지 않겠지.
‘그럼 어쩌면 시백이만은 살 수 있을지도 몰라.’
투웅 하고 금고문이 열렸다.
원서는 금고 안쪽에서 붉은색 구슬을 꺼내었다.
S급 몬스터한테 마지막 일격을 먹인 대가로 주어진 보물.
거의 국보로 취급해도 손색이 없을 그 귀중품을, 원서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이시백에게 건네주기로 마음먹었다.
‘이것만 있으면 어디로 도망쳐도 귀하게 대접받을 거야.’
원서가 미소를 지었다.
이후로는 그녀의 생각대로 모든 것이 흘러갔다.
간부회의 도중에 이시백은 결사대를 자처했고, 원서는 그를 조용히 불러들였다.
“솔직하게 불어. 이번 기회에 그냥 죽으려는 거지?”
“단장님, 저는 단장님의 호위입니다. 제가 어떻게 마음대로 목숨을 버립니까.”
이시백이 묵직하게 대답했다.
언제나 한결같은 남자라고, 원서는 생각했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따뜻한 감정을 느끼며 이시백한테 붉은색 구슬을 쥐여 주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눈빛으로 이시백이 쳐다보았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잡은 S급 몬스터의 심장이야. 거의 세계유산급 보물이지. 어디서 함부로 잃어버리기만 해봐. 아주 조직의 쓴맛을 보여줄 테니.”
이시백이 깜짝 놀랐다.
“이 귀한 걸 왜 저한테 주십니까!”
“내가 왜 아깝게 그걸 너한테 줘. 잠깐 맡기는 거지. 나중에 제대로 돌려줘라.”
“단장님, 그렇지만…….”
“그렇지만? 너 갑자기 말의 뉘앙스가 수상해진다.”
이 남자와 대화하는 것은 아마도 지금이 마지막.
언제나 무표정한 이시백을 놀려먹는 것도, 딱딱한 어깨에 조심스레 머리를 맡기는 것도, 그가 만드는 칵테일을 즐기는 순간도, 아마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지.
원서는 마지막까지 당당한 용병단장으로 그의 기억에 남고 싶었다.
“살아서 돌아올 자신이 넘친다면서. 그런데 혀가 왜 이리 길어. 잠깐만 빌려갔다가 나한테 도로 상납하면 될 거 아니야. 이시백, 설마 지금 내 앞에서 거짓말 하는 거냐?”
“……절대 아닙니다.”
“그럼 문제가 심플하네.”
그렇기에 원서는 웃었다.
자신이 지을 수 있는 표정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잘 다녀와. 행여나 비싼 물건에 흠집 내진 말고.”
그 미소에 할 말을 잃은 것일까.
이시백은 묵묵히 원서를 응시하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겠습니다. ……반드시, 단장님께 돌아오겠습니다.”
“그래.”
원서는 마지막으로 이시백의 손을 잡아보았다.
상처투성이에다 투박한 살갗이었지만, 원서에겐 그의 손이 가장 부드럽게 느껴졌다.
부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손안에 그의 감촉이 남아 있기를 바라면서, 원서가 말했다.
“……나중에 둘이서, 술이나 한잔 마시자.”
그리하여 원서는 이시백을 떠나보냈다.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부단장인 장태성은 원서를 배신했으며, 포위망에서 탈출하는 도중에 원서는 동태상의 본대에 붙잡혔다.
포로로 붙잡힌 원서는 열 시간이 넘도록 고문에 시달렸다. 참혹하고 무자비한 고문이었다.
원서가 그걸 끝까지 견뎌낸 것은 오직 이시백이 충분히 멀리 도주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자네도 참 징그럽군.”
동태상이 고문대에 묶인 원서를 내려다보았다.
“적당히 자네가 국가를 배신했다고 자백하게나. 순순히 죄를 인정하면 여생을 평안히 감옥에서 보내도록 배려해 줄 수 있다네. 괜히 자존심을 챙기느니 조금이라도 이승에 머무는 것이 현명하지 않은가.”
“…….”
원서가 희미하게 웃었다.
“……당신은 인간이 아니야, 동태상.”
“음?”
“당신뿐만이 아니라 장태성도. 유현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정치가들도. 전부…… 전부 다, 인간이 아니야. 단지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괴물들이지.”
동태상이 어깨를 으쓱였다.
“무척 주관적인 주장을 펼치는군. 그래. 어쩌면 자네의 말이 옳을지 모르겠네. 하나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인간이 아닌 셈이 되지 않는가?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인간성을 버려야겠지.”
“아니.”
원서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동태상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세상에는 인간들이 남아 있어.”
“…….”
“평양을 지키려고 했던 유현도는 인간이었어. 당신을 없애려고 한 순우경도 인간이었어. 비록 많이 죽었지만,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인간들이 남아 있어.”
원서는 자신의 최후가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유언을 남기는 지금 이 순간, 원서는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확신을 담을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녀는 인간으로서 죽는 것이었다.
“결국에는 그들이 승리할 거야.”
“이거. 터무니없는 인간찬가로군.”
동태상이 웃었다.
“이런 시대에 자네와 같은 여자가 설마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였을 줄이야. 아시아를 책임지던 중국도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미국의 국력도 무한대는 아니지. 앞으로 세계가 얼마나 더 길게 버티리라고 보는가. 백 년? 이백 년? 어느 쪽이든 천 년은 넘지 못한다. 그런 세상에서 인간의 승리를 요청하는 자네의 모습은…… 무엇이라 표현할까. 그래. 조금 가엽구만.”
“그게 아니야.”
원서가 고개를 저었다.
“몬스터가 있든 없든, 어차피 인간은 언젠가 사라져. 사라진다는 것이 패배를 의미하지는 않아. 어떻게 사라지느냐가 승리와 패배를 결정하는 거야.”
“……나와 선문답을 나누자는 것인가, 원서 단장?”
원서가 미소를 지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언제까지고 패배한 삶을 살 수밖에 없겠지.”
“…….”
“나는 당신을 동정해, 동태상. 정말로. 마음속 깊이…….”
동태상이 싸늘하게 원서를 노려보았다.
그는 뒤돌아서서 고문실을 나가며 부하들한테 명령했다.
“죽여도 좋다. 끝까지 고통을 안겨주도록.”
“예, 단장님.”
고문 기술자들이 원서에게 다가왔다.
그들의 저열한 얼굴을 바라보고 원서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적어도 최후에는 자기가 사랑했던 남자를 떠올리고 싶었기에.
‘시백아…….’
부디.
어디선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원서는 그렇게 차가운 고문실에서 숨을 거두었다.
‘……시백 씨.’
만약 삶이 다시 한 번 허락된다면.
이번엔 그 남자를 다른 방식으로 불러보고 싶다고.
그녀는 마지막에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