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105화
제14장 고래싸움의 새우등(2)
어디선가 시계가 째깍째깍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시백은 입안이 바싹 타오르는 걸 느끼며 말했다.
“그…… 옷은 좀 챙겨 입는 게 어떠냐? 사람이 오는데. 나도 와이셔츠 속에 뭐라도 입어야겠다. 얘기가 길어질 테니 차도 준비하고 말이다.”
“아뇨.”
윤시아가 단호히 말을 끊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묘한 카리스마가 서려 있었다.
“아무것도 입지 마세요. 지금이 딱 좋아요. 잘 빠진 복근이 보기 좋은걸요, 왜? 아예 와이셔츠 단추도 잠그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세요. 저도 계속 이렇게 있을 거니까요.”
“아니, 그리 헐벗어서 어떻게 대화를 나누겠다고?”
“정말로 이런 방면에는 눈치가 꽝이네요. 선배.”
윤시아가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원서 언니는 제가 좋아하는 남자를 뺏었다구요. 알아요? 제 심장이 찢겨 나가는 기분이에요. 이런 상처를 입었는데 제가 얌전히 가만히 있으면 어디서 선배의 제자라고 명함도 못 내밀죠.”
윤시아가 방바닥에 앉더니 슬며시 이시백의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었다. 윤시아는 이시백을 빤히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똑같이.”
“…….”
“제가 느낀 상처를 똑같이 느끼게 해주겠어요. 그년이 선배를 낚아채기 한참 이전부터 저와 선배가 이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똑똑히 보여줄 거예요.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가 이미 ‘다른 여자와 함께하고 있다’는 걸 그 잘난 눈구녕에 각인시킬 거예요.”
윤시아가 와이셔츠 앞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유람선에서 이시백이 그녀를 꾀어내기 위해 허겁지겁 사들였던 약혼반지.
윤시아는 그중 하나를 자신의 약지에, 나머지 하나를 이시백의 약지에 천천히 끼워 넣었다.
이시백은 꼭 범의 아가리가 손가락을 깨무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 아니었느냐…… 반지.”
“엄청 마음에 안 들지만 전쟁터에서 무기를 탓할 여유는 없으니까요.”
윤시아가 삭막하게 이시백의 몸을 쓰윽 훑어보았다.
약혼자한테 반지를 끼워주는 연인의 눈동자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확 목에 키스 마크라도 새겨 둘까.”
이시백이 침을 삼켰다.
지금 눈앞에서 맹수처럼 눈동자를 빛내는 소녀는 바야흐로 한 명의 전사.
향금산 유곽의 기생들한테 모든 비법을 전수받고 ‘사랑은 전쟁’이라는 슬로건을 휘두른 채, 서서히 다가오는 적군을 격멸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숙련병이었다. 이시백은 자신의 나약함을 절감했다…….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이시백이 속으로 생각했다.
‘빠르다.’
하기사 원서 아가씨도 똑같은 건물의 아래층에 살고 있었다. 겨우 계단으로 한 층을 올라오면 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머리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시백은 너무나도 빠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되도록 이 사태를 뒤로 미루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자기가 죽은 다음까지.
윤시아가 현관문 리모컨을 꾹 눌렀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의 잠금이 해제되었다.
철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마침내 원서의 모습이 드러났다. 원서는 반쯤 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두 남녀의 모습을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했던 원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윤시아가 여전히 이시백의 허벅지에 머리를 올려둔 자세를 유지하면서 말했다.
“어서 오세요, 원서 언니. 시백 선배 방에 직접 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죠? 뭐, 다른 곳에서는 여러 번 만나 봤겠지만요.”
“…….”
“왜 현관에서 굳어 있고 그래요. 안쪽으로 좀 들어오세요. 양갓집 따님이라고 들었는데, 언니 집안에선 사람이랑 대화할 때 현관에 서서 하라고 가르쳤나 봐요? 멋진 가정교육이네요. 저는 부모가 없는 고아라서 미처 그런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는데.”
그제야 원서가 딱딱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윤시아의 판단은 무섭도록 정확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윤시아는 백 마디의 말을 쏟아내는 대신 단 한 번의 장면으로 ‘이시백이 자신의 남자’임을 보여주었다.
원서는 간신히 얼굴을 무표정하게 관리했으나, 이로 입술을 깨무는 것만큼은 자제하지 못했다.
“언니가 앉을 자리는 없고요. 그냥 대충 거기 서 계세요.”
“……자문사님께서는, 사람과 대화할 때 의자에 앉히지도 말라고 보육원에서 배우신 모양이군요.”
그것은 원서 나름대로 힘껏 반격한 것이리라.
하지만 윤시아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가볍게 공격을 흘려보냈다.
“아하, 아니요? 단지 임자 있는 남자를 제멋대로 건드린 갈보한테는 예의범절을 차릴 필요 따위 없다고 배웠을 뿐인걸요.”
“……읏.”
“제가 시백 선배의 성격을 그럭저럭 잘 알거든요. 연애에 있어서는 쌩초보이긴 해도, 자기가 먼저 앞장서서 다른 여자를 유혹하고 그럴 재간은 또 없어요. 예. 다른 사람이 먼저 강하게 밀어붙여야만 함락되는 남자죠.”
윤시아가 오른팔로 이시백의 다리를 휘감았다.
이시백은 윤시아를 내려다보지도, 그렇다고 원서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다만 묵묵하게 공중에 시선을 내려놓을 뿐이었다.
“어땠어요, 원서 언니? 제 경우에는 수영장이었는데. 개성에서 선배랑 같이 최고급 룸에 머무른 적이 있었어요. 선배가 하도 넘어오지 않길래 제가 적극적으로 어프로치 했죠. 언니는 어디에서 어떻게 선배를 꼬셨을지 저, 다소 흥미가 있어요.”
“…….”
“하지만 뭐, 저는 「두 번째 프러포즈」를 선배한테 먼저 받았으니까요. 너그러이 용서해 드릴게요.”
“두 번째 프러포즈……?”
“네, 혹시 모르셨어요? 연인이 사귈 때는 원래 프러포즈를 두 번 하는 법이잖아요. 한 번은 서로 눈이 맞아서 사귀기로 할 때.”
윤시아가 왼팔을 쓱 들어 올렸다.
약지에 낀 다이아몬드 반지가 눈부시게 반들거렸다.
“다른 한 번은, 영원히 함께하겠노라고 맹세할 때.”
“…….”
순간, 원서의 숨이 멈추었다.
그녀는 입술이 살짝 벌어진 것도 자각하지 못하고 멍하게 반지를 바라보았다.
괴로운 침묵이 흘렀다. 마치 고장 난 인형이 삐걱거리듯, 원서는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이시백의 약지가 그녀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아.”
원서의 입에서 무심코 흘러나온 그것은 깨달음이었을까 탄식이었을까.
거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원서가 어깨를 떨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나직하게 말했다.
“……죄송합니…… 다.”
“죄송해요?”
윤시아가 느긋한 어조로 대꾸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거예요? 제가 배워먹지 못한 여자애라서 정확히 얘기해 주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해서요.”
“제가 단장님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져서…….”
“원서 언니가 수치심도 모르고 선배를 유혹해서요?”
원서가 멈칫했다.
그녀는 피를 토하는 것처럼 괴롭게 말했다.
“……자문사님께 폐를 끼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헤에. 그래도 제대로 사과하실 줄 알잖아요. 주제도 모르고 들이대서 혹시나 죄송한 마음을 느낄 줄 모르는 철면피가 아닐까 걱정했는데. 덕분에 이야기가 빨라졌어요.”
윤시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면 원서 언니, 선배랑 그만 헤어져 주시겠어요?”
반면에 원서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얘기를 들어버린 사람처럼.
“예……?”
“왜 그러세요.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사과했으면 이제 당연히 행동으로 보여줘야죠. 설마 사과는 했지만 선배와 만나기는 계속 만나겠습니다라고 뻔뻔하게 나오려는 건 아니지요? 설마아.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 염치를 모르지는 않을 거라고 기대할게요.”
시아가 싱긋 웃었다.
“어차피 선배한테 원서 언니는 필요 없으니까요.”
원서가 고개를 숙였다.
다시금 방 안에 적막이 감돌았다.
미리 약속해 놓은 것과 이야기가 다르다 하고 이시백은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자기가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만은 어떻게든 이시백도 공기로 느꼈다.
이 자리에서 전권을 가진 사람은 윤시아였다. 이시백은 조금이라도 빨리 사태가 해결되기를 바라며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그건 틀렸습니다.”
원서가 입을 열었다.
“네? 뭐가 틀려요?”
“이시백 단장님한테는 제가 필요합니다.”
원서가 고개를 들어 윤시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약간의 물기에 잠긴 눈동자는 그러나 확신으로 빛나고 있었다.
윤시아가 피식 웃었다.
“언니가 선배한테 필요하다고요? 아하하. 조금 자의식과잉 같은데요.”
“아니요. 확실히, 자문사님은 단장님을 몸과 마음으로 지지하는 분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문사님은 결정적으로 단장님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윤시아의 얼굴도 차가워졌다.
“꽤 재미있는 주장이네요. 어디 떠들어 봐요.”
“단장님은 단순히 헌터들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아닙니다. 큰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평양을 제패한 것도, 이번 침몰 사건에 개입하여 김진하와 이시영을 끌어낸 것도, 전부 보통의 헌터라면 감히 생각하지도 못할 의도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자문사님은 그걸 이해하지 못합니다.”
“멋진 헛소리네요.”
윤시아가 비웃었다.
“선배가 그림을 그릴 때 누구한테 제일 먼저 상담한다고 생각하세요? 왜 유람선에 갈 때 당신이 아니라 저를 데려갔다고 생각하세요? 멋대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별로 좋은 버릇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원서 언니. 입에서 악취가 풍긴다구요.”
“예. 머리로는 자문사님도 이해하고 있겠지요.”
원서가 윤시아를 맹렬히 노려보았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아닙니다.”
“……하아?”
“자문사님은 그저 단장님이 무언가를 원하니까 거기에 맞추어서 행동할 뿐입니다. 몬스터의 남진에 대비하여 평양을 사수해야 한다는 목적도, 서울과 협력하여 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대의도, 더 나아가 헌터들을 이 땅의 정당한 일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상도, 전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원서가 목소리에 확신을 담았다.
“만일, 단장님이 지금이라도 모든 재산을 청산하고 외국의 안전한 지방으로 도피하자고 제안하면 자문사님은 어떻게 반응할 것입니까? 틀림없이 별다른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단장님을 따르겠지요. 그것이 자문사님의 한계입니다.”
“…….”
“자문사님은 결정적으로 단장님의 계획에 공감하지 못합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자문사님은 단장님이 뭐라 해도 아무런 의문도 없이 따르는 수하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해자가 아닙니다. 예.”
하고 원서가 말했다.
“그런 측면을 따지자면- 자문사님보다 제가 단장님을 더 깊이 이해한다고 말해야겠지요. 단장님께는 귀여운 동반자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해 주는 동료가 필요합니다. 제가 필요하지 않다는 자문사님의 판단은 틀렸습니다.”
두 여인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아까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팽팽하게 긴장된 공기가 흘렀다.
윤시아의 얼굴에서도 빈정거리는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거기에 드러난 것은 생생한 날것의 감정.
감히 자신의 영역을 부정해 온 상대방에 대한 적의밖에 남지 않았다.
“……조금 열 받았어요.”
윤시아가 중얼거렸다.
“적당히 골려주다가 풀어주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녀는 천천히 일어서더니 원서를 향해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 걸어갔다.
이윽고 서로의 코가 닿을 만큼 가까워진 상황에서 윤시아가 말했다.
“당신처럼 낯짝이 두꺼운 여자는 이번 기회에 확실히 찍어 눌러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