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102화
제13장 엘 클라시코(El Cl?sico) (9)
“김진하 보스님, 이번 회합에 참석하기 전에 저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이시백이 말했다.
일단 김진하의 부하들이 총부리를 내리긴 했어도, 언제든 다시 조준할 수 있도록 손에서 권총을 놓지 않았다.
한 발짝만 잘못 내디뎌도 이 아슬아슬한 대치 상황은 찢어지고 말겠지. 이시백은 외발로 징검다리를 건너는 기분이었다.
“저에게 연락해 온 사람은…… 신원을 밝히기 힘들어도, 경찰의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자네가 짭새들과 우정을 깊이 나눈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네.”
김진하가 이죽거렸다.
“새삼스럽게 내 앞에서 우정을 과시할 필요는 없네만.”
“그 친구가 저에게 경고했습니다. 회합이 열리더라도 이번만큼은 참석하지 말라고. 제가 왜 참석하지 말라는 거라며 이유를 물어도 묵묵부답이더군요.”
김진하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손에 상처 입은 동료들을 치료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지만, 그들조차 이시백의 발언에는 고개를 휙 돌렸다. 수십 쌍의 안광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짭새 새끼들이 미리 알고 있었다고?”
“이게 전부 그 자식들이 벌인 짓거리냐!”
파티장 한쪽 구석이 요란스러워졌다.
김진하가 천천히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부하 단원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다시 조용해진 공기 속에서 김진하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이시백 단장. 자네의 말이 사실이라면 경찰이 이번 사건에 개입했다는 말인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보스님.”
“다르게 생각한다라?”
“예.”
이시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경찰들이 공사를 들어왔다면 적어도 제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 주었을 것입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언제든 그들과 협력할 수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유람선 내부에 믿음직스러운 빨대가 한 명 있는 것과 없는 것, 어느 쪽을 경찰이 선호할지는 명약관화합니다.”
김진하와 그 부하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시백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었다. 아직 미심쩍은 눈길로 쳐다보는 것이 멈추진 않았으나, 적어도 권총 자루를 붙잡은 손에서 힘이 꽤나 많이 빠졌다.
“그런데도 경찰은 저에게 사정을 일절 설명해 주지 않았습니다. 단지 회합에 참석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뿐입니다. 즉, 경찰들이 아니라 다른 세력이 작업을 쳤을 공산이 높습니다.”
“……점점 더 자네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어지는군.”
김진하가 불쾌한 낯빛으로 얘기했다.
“짭새들은 오늘 유람선이 침몰할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데 짭새가 범인이 아니라면 대체 어떤 놈들이 공사를 들어올 수 있겠는가?”
“경찰이 미리 정보를 입수할 수는 있어도 감히 개입할 수 없는 세력. 두 가지 조건을 정확하게 만족하는 조직이 이 반도의 땅에 딱 한 곳 존재합니다. ……바로 군부입니다, 보스님.”
“군부!”
김진하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헌터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처럼 분노나 적의로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헌터의 세계, 뒷골목의 세계에 군부가 개입했다는 주장에 그들은 당혹했다.
오직 이시영만이 무표정하게 이시백을 쳐다볼 따름이었다.
“무언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 단장?”
김진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선 어느새 상대를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증발했다.
“헌터를 관리하는 것은 이미 수십 년도 전부터 경찰의 업무였다. 군바리들이 직접 헌터들의 이권에 끼어든 적은 전례가 없어. 그놈들의 임무는 바다 위에서 몬스터를 잡는 것이겠지. 왜 멀쩡한 짜바리를 두고 굳이 군바리가 우리를 조지려 들겠는가.”
“우리가 단순한 헌터라면, 보스님의 말이 옳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일개 헌터가 아닙니다.”
김진하의 이마 주름살이 깊게 파였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단순한 헌터라면 평상시처럼 경찰한테 관리를 명령하면 됩니다. 하지만 빨갱이 끄나풀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뭐……?”
김진하와 그 부하들은 아연해졌다.
헌터로서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그들이었지만 살다 살다 빨갱이 소리를 들어본 적은 처음이리라.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것도 당연했다.
“이 단장, 지금 나와 장난을 치자는 소리로 들리는데.”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마시고 정치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보스. 평양에서 실제로 빨갱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것도 시시껄렁한 빨갱이가 아니라 김일성의 후손입니다.”
이시백이 진중한 어조를 그대로 밀고 나아갔다.
“빨갱이들이 헌터라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뒤쪽에서 진지하게 국가전복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이건 중앙 정부로서 절대 좌시할 수 없는 위협이었습니다. 정치권 일각에서 ‘헌터들을 이대로 방치해도 정말 괜찮은가’ 하고 걱정의 목소리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
“평소대로라면 경찰들한테 일을 맡겨도 되겠습니다만. 경찰들은 지난 15년 동안 김일성의 후손이 존재했는지, 그 간단한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비록 어떻게든 평양의 빨갱이 세력을 일소했다고 하나, 15년의 무지가 덮어지지는 않습니다. ……정치권 내부에서 경찰들의 불성실함과 무능함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있었을 것이라고, 저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이시백의 추론으로 이루어진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이시백은 자기 생각에 어느 정도 확신을 품고 있었다.
첫 번째 증거.
‘이 땅의 정부는 실제로 헌터들을 청소하려 들고 있다.’
중앙 정부가 심상치 않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
전생의 역사에서도 평양을 비롯하여 반도의 북방은 모조리 버려졌다.
과거 북한이라는 세력이 점유했기 때문이겠지만, 북방은 중앙정부에서 내리는 지시를 곧잘 무시했다.
아예 남방과 북방을 다른 지역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런 상황에서 북방이 반란분자의 근거지라는 증거물이 튀어나왔다.
남방의 권력자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좌시하기 어렵겠지. 중앙 정부의 권위가 심각하게 위협당한 것이었다.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반란의 위험을 제거해야만 했다…….
설령 몬스터들이 침공하여 북방의 인간들이 떼로 몰살당할지언정.
그런 위험성이 있을지라도, 남방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라면 북방의 헌터들을 ‘청소’할 필요가 있었다.
애당초 남방의 권력자는 북방이 어떻게 되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권력자뿐만이 아니라 남방의 일반인들도 비슷했다. 도리어 빨갱이들이 사라지게 되었다며 기뻐할지 몰랐다.
어차피 제대로 된 시민조차 되지 못한 사회의 쓰레기들, 어차피 빨갱이들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 버리는 것이었다.
인간은 일단 타인이라고 판단한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냉혹해지게 마련이었다…….
-한 번 물러선 자는 영원히 물러서고.
-한 번 물러서지 않은 자는 영원히 물러서지 않습니다.
비록 전생에서, 유현도가 피를 토하며 울부짖었다 한들.
-평양 시민과 평양을 내버려 두고 도망치는 것은 비단 한반도의 일부분을 포기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뢰의 파멸이자 국가의 붕괴입니다!
유현도가 자신의 목숨을 장렬하게 희생하면서까지 반도의 인간들이 다시 화합할 것을 부탁하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룩하자며 간청했다 할지라도.
-저는 아직 여러분께 신뢰로 맺어진 관계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갈가리 찢겨 나간 한반도에 다시 만인의 계약에 근거한 국가가 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시민 여러분. 저는 내일의 신뢰를 위하여 오늘의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그것은 메아리 없는 외침이었으며, 기약 없는 이상론에 불과했다.
실제로 반도의 북방은 버려지고 말았다. 권력자의 필요에 의해서. 사람들의 무관심과 계산에 의해서.
미래를 알고 있는 이시백이기에 비로소, 중앙 정부가 계획적으로 헌터들의 침몰을 꾀했다는 사실을 지금 시점에서 추리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증거.
‘동태상은 군인 출신이다.’
중앙 정부가 유력한 헌터들을 모두 숙청해 버린 이후.
정부에서 새로이 선택한 ‘파트너’는 하필 군부 출신인 동태상이었다.
헌터들을 관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경찰의 관할인데도 불구하고, 중앙정부에선 굳이 군인이었던 동태상을 뒷세계의 관리자로 임명했다.
이시백은 이것이 단순한 우연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중앙 정부에선 헌터들의 약소화를 노리고 있다. 그렇지만, 군부와 경찰 사이에 작은 알력이 있어.’
경찰은 본래 자기네 관할인 뒷세계를 빼앗겨서 불만을 품었을 터.
반면에 군부는, 김일성의 후손이라는 거물을 놓쳐 버린 경찰을 업신여길 것이다.
아주 자그마한 틈새.
중앙정부의 통솔에 묶여 있긴 해도 틀림없이 서로 다른 조직들.
‘거기에 활로가 있다.’
그걸 위해서 이시백은 지난 반년에 걸쳐서 그림을 짰다.
유현도와 원서의 도움을 받아가며 세밀하게 시나리오를 기획했다.
이곳에서 서울 보스 김진하와 인천 보스 이시영을 설득하는 것이야말로 시나리오의 첫 번째 걸음.
이시백이 입을 열었다.
“몬스터를 사냥하라고 내버려 둔 헌터가 이제는 국가전복까지 꾀하고 있습니다. 반란분자는 더 이상 일개 헌터가 아닙니다, 보스. 경찰이 아니라 군부가 동원되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
김진하가 말했다.
“평양에는 몇 번 제외하고 발을 들여 본 적도 없어. 나뿐만이 아니라 오늘 회합에 참석한 대부분의 두목들이 그러하다. 대구의 박포신이, 광주의 유운표가 대체 빨갱이라 의혹 받을 일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어떤 경로이든 비즈니스 라인들이 평양과 연결되어 있긴 했습니다. 중앙 정부의 감시가 비교적 심한 경상도나 전라도에선, 자체적으로 밀주나 마약을 생산하는 대신 대체로 북방에서 수입해 왔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
“보스께서도 평양의 10인 위원회와 모종의 인맥을 갖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 자그마한 연결점만으로도 중앙 정부에선 일단 의심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설령 전국의 두목들이 빨갱이가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우리에게 경고를 건넬 수 있으니까.”
김진하가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과연. 그런가. 중앙 정부에선 우리들이 지금보다도 허리를 더더욱 낮게 숙이는 것을 바라는 것이로군. 빨갱이 사태는 평양의 이야기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걸 계기로 삼아, 중앙 정부에선 헌터들에 대한 압력을 전국적으로 확대할 생각인 게야. ……이것이 자네의 주장이 맞는가, 이 단장.”
“그렇습니다.”
“부산의 여우 새끼들이 잘도 우리를 갖고 노는군…….”
김진하가 불쾌하게 뇌까렸다.
반도에서 제일 발전한 도시를 세 곳 뽑으라면 부산, 서울, 평양이었다.
중앙 정부의 총본산인 부산을 제패한 헌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서울을 총괄하는 용병단장이야말로 반도 제일의 마피아였다.
비록 김진하는 세력이 지나치게 거대하여 휘하 부하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진 못했다.
부단장의 숫자가 자그마치 여섯 명에 이른다는 점에서, 김진하의 용병단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진하는 반도에서 가장 강대한 용병단장인 것이었다.
그런 자신을 중앙 정부에서 마음대로 가지고 놀려고 들었다. 적이 불쾌할 수밖에 없으리라. 김진하의 심정은 얼굴에 그대로 묻어나왔다.
“이건 위기인 동시에 기회입니다, 보스.”
“기회라고?”
“지금 중앙 정부는 경찰의 처지를 전혀 배려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좋든 싫든 상관없이, 우리 용병단들은 모두 경찰과 이런저런 인맥을 맺었습니다. 우리한테 뇌물을 받아먹는 경찰도 수두룩합니다. 경찰들 입장에서는 수십 년에 걸쳐서 겨우 만들어놓은 ‘빨대’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음.”
김진하가 작게 턱을 끄덕였다.
50대 후반. 한 남자의 정치력이 가장 어둡게 빛나는 나이에 이른 김진하는, 눈앞의 젊은이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곧바로 알아들었다. 그렇지만 일부러 젊은이에게 말할 기회를 넘겨주었다.
“헌터가 사라져도 마약과 술, 창녀, 도박에 대한 수요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힘들게 우리들을 처리해 봤자, 다시 새로운 용병단이 나타나서 업계를 장악할 것입니다. 그러면 경찰들은 새로운 용병단에 또 빨대를 꽂기 위해서 고생해야 합니다.”
“정치가와 군부의 논리 때문에 경찰들이 독박을 뒤집어쓰는 것인가…….”
“예. 물론 빨갱이를 척살한다는 논리 앞에서 당장 경찰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다들 불만을 품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이시백과 김진하가 눈길을 주고받았다.
적대심은 희박해진 지 오래였다.
서울을 총괄하는 마피아와 평양을 총괄하는 마피아.
반도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두 명의 남자는, 지금 미래에 닥쳐올 재앙을 함께 직시하고 있었다.
“정부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우리들부터 단단히 협력할 필요가 있겠군, 이 단장.”
“서울과 평양의 협력은 필수적입니다.”
“하는 김에 인천까지 끼워 넣으면 금상첨화이고?”
“서울과 평양 그리고 인천. 세 도시의 용병단이 협력한다면 이미 반도의 절반이 동맹을 맺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으음.”
김진하가 침음을 삼켰다.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주위의 단원들은 불안한 얼굴로 김진하만 바라보았다. 이제 김진하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바뀌었다.
그가 협력을 거부한다면 이시백과 이시영에게 총알이 쏟아질 것이요, 그가 협력에 찬성한다면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동맹이 체결될 것이다…….
그리고.
“이 단장. 나는 자네를 신뢰하지 않는다.”
김진하의 눈동자가 이시백을 응시했다.
“……그러나 자네의 말은 거부하기 힘든 설득력을 갖고 있다. 우선 자네와 동행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지. 우리가 정말로 협력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지금부터 자네가 보여주는 태도에 의해 결정될 것일세.”
일시적인 동맹 내지는 동행.
이시백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참담한 미래를 막아 세우기 위해서는, 우선 그걸로 충분했다.
“제 말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스.”
그렇기에 이시백은 진심으로 허리를 숙였다.
“결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인천과 서울.
체스판에 필요한 말들이 비로소 갖추어졌다.
목숨을 걸고 파티장에 뛰어든 보상으로써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이제 공사에 들어갈 차례였다.
반도 전체를 대상으로 한 대공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