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97화
제13장 엘 클라시코(El Cl?sico) (4)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윤시아가 한 템포 늦게 반응했다.
제아무리 두뇌가 명석하기로 대적할 사람이 드물다 해도 어쩔 수 없겠지.
윤시아는 바깥에서 사람들이 쳐다본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소란이 일어나는 소리를 듣고 수영장으로 나온 사람이 대여섯 명 있었다-버럭 소리쳤다.
“바보예요!? 지금 선배가 어떤 처지에 처했는지 알기나 해요? 원서 그년이랑 떡치는 걸 겨우 30분 전인가 들킨 주제에 청혼? 청호오온? 프러포즈 같은 걸 한다고요?”
“그래.”
이시백이 입술을 질끈 물었다.
여기서부터는 이시백에게 완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여자와 진지하게 사귀어본 적도 지난 1년이 처음. 하물며 인생에서 누군가한테 청혼해 본 경험 따위는 전무했다.
언제나 전생의 경험에 의거하여, 전생에서 얻은 정보에 기반하여 행동과 전략을 짜던 이시백한테, 지금과 같은 상황은 무척이나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승부다.’
이시백은 직감했다.
이때야말로 승부수를 던져야만 하노라고.
‘시아는 나에게 머리와 몸뿐만이 아니라 미래 자체를 맡겼다. 향금산 유곽을 졸업한 것도, 백산의 자문사가 된 것도, 사람을 수십 명이나 죽인 것도, 전부 내 곁에 있기 위해서 저지른 짓들이다. 내가 자기를 버릴지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한 명의 애인이 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한테서 의미가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녀에게 무엇을 선물해 주어야 할까?
어떻게 해야 그녀의 불안감을 뿌리부터 없애버릴 수 있을까.
‘진심 어린 사죄로도 부족하다.’
한 번 일어난 일이 두 번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므로.
이미 불안감은 심장에 박혀버렸다. 설령 윤시아가 이시백의 사과를 받아 들여 준다 하더라도, 강박적인 두려움과 초조함이 남아서 그녀를 계속해서 괴롭히겠지.
‘이런 일이 발생하더라도 불안에 떨지 않도록 보장해줘야 한다.’
그래서 결혼이었다.
남편과 부인이 된다는 것은 강력한 약속을 맺는 것.
연인관계에서 단지 암묵적으로 통용되던 수많은 약속이 부부관계에선 훨씬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여자 친구와 헤어지는 것, 부인과 이혼하는 것, 둘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관계의 안정성이라는 측면에서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원서와 관계를 맺었다는 걸 부정하지 않겠다. 아니,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너를 좋아한다. 너를 버리겠다느니, 그런 생각은 맹세하건대 단 한 번도 품은 적이 없다. 그러니까 행동으로 보여주겠다.”
“프러포즈하는 도중에 자기가 바람피웠다는 사실을 당당히 인정하고 있어……!?”
윤시아가 경악했다.
이시백의 머릿속에서는 현재 청혼이 완전무결한 해결책으로 성립했으나 제삼자의 눈으로 바라보자면, 아니, 윤시아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다만 완전무결하게 쓰레기 같은 짓거리에 불과했다.
“보나마나 그 결혼반지도 어디 가게에 달려가서 충동 구매한 물건일 거면서!”
“3억 4천만 원짜리다. 충동구매이긴 해도 마음을 표시하기엔 모자람이 없어.”
“3억!?”
윤시아가 테라스를 붙잡고 갸아악 소리 질렀다.
“선배 미쳤어요!? 우리 용병단 재정 상황을 알면서도 고작 반지 하나 사는 데 3억을 쏟아부어요!? 그거면 길드를 통해서 비정규 단원 육십 명을 일주일 내내 고용해서 부려 먹을 수가 있는데! 항쟁을 일으켜서 아무 군소 용병단이나 밀어버릴 수 있다고요!”
“진짜 결혼식 때는 더 좋은 걸 사주마. 가게에 이것보다 비싼 게 없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요, 이 밥팅아!”
윤시아가 숨을 씩씩거렸다.
그녀는 이제 분노와 증오, 슬픔과 두려움, 거기에 기쁨까지 섞여서 도무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방 안에서 울며 ‘황해에 뛰어들어 자살해 버려야지’라고 진지하게 계획을 세웠건만.
지금은 그저 얼굴이 빨개져서, 어떤 말이든지 간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그, 그년은요. 원서 그년은 어쩌고요. 헤어질 거예요?”
“미안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뭐……?”
“시아야. 너와 결혼은 하겠지만 원서와 헤어지는 것도 나에게는 불가능하다.”
윤시아는 대략 머리가 띵했다.
의식이 혼란스러웠으며 숨이 가빠졌고, 눈앞의 풍경이 단체로 신기루에 걸려 버린 것처럼 넘실거렸다. 저건 또 무슨 개소리라는 말인가.
“자, 잠깐만요. 잠깐만요. 저 지금 선배의 주장이 겁나게 이해되지 않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뭐예요. 저랑 결혼하고도 원서 년이랑 계속해서 퍽킹하겠다 이 말이에요? 아니죠? 아무리 선배가 찐따라고 해도 설마 그런 헛소리를 진지하게 주장하는 건 아니죠?”
“나의 주장을 솔직하게 요약하자면- 네 말이 옳다.”
“야 이 개새끼야!?”
윤시아는 허벅지에 둘러맨 띠에서 단검을 꺼내 들어 냅다 던졌다. 단검은 정확히 이시백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다.
물론 이시백이 여유롭게 피해버린 탓에 공격은 실패했다. 그러나 윤시아가 진심으로 이시백을 죽이려 들었다는 사실만은 명백했다.
“지금! 사람한테 청혼을 하면서! 불륜을! 당당하게, 불륜을 저지르겠다고 선언해요!?”
윤시아는 자기가 숨겨둔 단검을 모조리 투척했다. 그때마다 이시백은 가볍게 몸을 놀려서 공격을 피했다.
윤시아는 단검이 전부 떨어지고 나서도 테라스에 있던 의자, 도자기, 화분을 들어 올려 끊임없이 파상공세를 이어나갔다.
당연하지만 이 요란스러운 난동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사람들이 두 남녀의 싸움을 구경했다.
“시아 네가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듯이 원서도 똑같이 소중하다.”
“하아!? 당장 그년을 공구리 쳐서 대동강에다 떨구어도 시원찮은 판에 뭐가 어쩌고 저째요!?”
“아무튼 간에 부인은 너다.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시아 너뿐이야. 어느 사교 모임에 나갈 때도, 부부 동반으로 초대받을 때도, 무조건 너와 가겠다. 원서와는 일주일에 한 번만 만나고 나머지 시간은 너에게 전부…….”
“개소리 집어치워-!”
시아가 마침내 테이블까지 들어 올려서 내동댕이쳤다.
“내가 미쳤지! 저런 작자한테 콩깍지가 씌어서 따라다닌 내 잘못이지! 됐어, 끝났어요! 우린 끝장이에요, 선배! 우리 용병단 내부 자료들 전부 들고 날라버릴 거예요. 차수현 대장한테 가서 선배의 약점을 죄다 까발릴 거라구요! 그리고 원서 그년을 죽여 버린 다음에 나도 죽어버릴 거야!”
그때 쿠웅 하고 유람선에 충격이 가해졌다.
이시백은 드디어 올 것이 왔음을 깨달았다. 수영장에 전해진 충격 자체는 보잘것없었다.
단순히 작은 여진에 휘말린 수준으로 바닥이 잠깐 진동했을 뿐이다. 그러나 배의 아래쪽에는 폭탄이 터져서 바닷물이 침수되고 있겠지.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1초라도 빨리 윤시아를 데려온 다음, 보스 김진하를 구출하여 이곳에서 빠져나가야만 했다.
분노하여 미쳐 날뛰는 윤시아를 잠재우는, 마법의 한마디가 필요했다.
“그딴 청혼은 줘도 안 받아요! 절 뭘로 생각하는 거예요! 죽어요, 선배! 얼른 자살해 버려요! 지옥에나 떨어져서 영원히 고통받으세요!”
평소의 이시백이라면 절대 입에 담지 않을 한마디가.
여태까지 윤시아가 이시백한테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한마디를.
이시백이 입에 담아서 외쳤다.
“사랑한다!”
윤시아가 뚝 멈추었다.
그녀는 양손으로 아레스 석고상을 들어 올린 자세 그대로 굳었다.
마치 외계인이 한국어로 유창하게 인사해 오는 장면을 목격해 버린 민간인처럼, 윤시아는 입을 떡 벌리고 수영장의 이시백을 내려다보았다.
“사랑한다, 시아야.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 단순히 이 난리를 빠져나가려고 청혼하는 게 아니야. 물론 그런 면도 있다.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너에게 청혼하는 것만큼은 진심이다.”
“……말도, 안 돼…….”
윤시아의 멈춰 있던 표정이 서서히 풀렸다.
그녀는 눈가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나왔다.
슬프거나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말도 안 돼……. 진짜로 말도 안 돼……. 선배 지금 저한테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하필이면, 정말 하필이면, 사랑한다는 말을 불륜이 들켜 버린 장소에서 내뱉어요……?”
“오늘 밤에 한정해서 몇 번이든 말해주겠다. 사랑한다.”
“끄아아아악!”
윤시아가 석고상을 내던지고 자신의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절규하는 소녀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거짓말이야! 이건 거짓말이야! 첫사랑에다 첫 연애, 첫 경험, 심지어 첫 프러포즈까지 받은 남자한테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하필이면 바람피운 걸 밝혀낸 날이라니! 안 돼! 내 인생이 이렇게 구려질 수는 없어! 내 추억이! 내 소중한 젊은 날의 청춘이이이! 취소해요! 당장 취소하세요, 선배!”
“사랑한다. 나와 결혼해다오.”
“이런 인생은 이제 싫어-!”
윤시아가 실로 가련하게 울부짖었다.
하다못해 청혼을 조금이라도 낭만적인 순간과 낭만적인 공간에서 받고자 한 그녀의 소박한 희망을 누가 탓하겠는가. 소녀의 꿈이 처절하게 파괴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유람선이 폭발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재차 선체에서 쿠웅 하고 충격파가 전달되었다. 두 번째 폭탄이 터진 것이었다.
이시백은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걸 알고 두 팔을 번쩍 펼쳤다.
“선택해라, 시아야. 이런 남자라도 결혼해서 같이 살 것인지. 아니면 네 말대로 너도 죽고 원서도 죽고 나도 죽는 결말을 선택할 것인지. 참고로 나는 너한테라면 언제든 죽어도 상관없다.”
“후자. 후자로 부탁드립니다. 후자가 아주, 아주 끌리는걸요! 어차피 버린 인생 조금 더 버린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는데요!”
“어서!”
이시백이 그녀를 다그쳤다.
적반하장에도 정도가 있었으나 이시백에겐 확신이 있었다. 윤시아가 절대로 자신을 죽이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당연했다.
왜냐하면, 이시백 또한 절대로 윤시아를 죽이지 못하니까.
“나를 죽일 건지 나와 결혼할 건지 선택해라. 죽일 거라면 계속 거기 테라스에 있어라. 네가 다음에 던지는 물건이 석고상이든 식칼이든 전부 맞아주마. 하지만 나와 결혼할 것이라면, 지금 당장 나한테로 뛰어내려라!”
“…….”
윤시아가 머리카락을 잡아 뜯었다.
끄윽, 끄윽 하고 목구멍에서 침이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노.
살의.
갈등.
그리고.
“……흐아아앙!”
자포자기.
윤시아가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원서 언니까지만이에요! 정말로, 원서 언니 한 명만 인정할 테니까요! 거기서 나래 언니나 현도 언니까지 따먹어버리면 선배도 죽고 나도 죽고 다 죽어버릴 거니까요!”
“약속하마.”
“선배, 진짜 싫어……!”
윤시아가 테라스 문턱을 밟고 아래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기세를 늦출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으므로, 천하의 이시백이라도 윤시아를 받아들고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을 헛디디고, 이시백은 시아를 가슴에 안아든 채 그만 수영장에 떨어지고 말았다.
물보라가 거세게 튀었다.
수심이 깊지 않았기에 두 사람이 허우적거릴 일은 없었다. 다만 이시백이고 윤시아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홀딱 젖어버렸다. 윤시아는 이시백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훌쩍거렸다.
“바보. 멍청이. 똥개…….”
“미안하다.”
“세상에서 제일 악랄하고, 나쁜 놈인 데다가……. 하여간 진짜 나빠요…….”
“미안하다.”
이시백이 윤시아의 뺨을 부드럽게 잡았다.
물기에 젖은 그녀의 눈동자가 한없이 나약하게 이시백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불가항력적인 일이야.”
“변명이 그게 뭐예요……?”
“언젠가 너도 이해해 줄 거다.”
이시백은 윤시아의 입술에 천천히 키스했다.
수영장이라서 그럴까. 소독약 냄새가 물씬 풍겼다.
불쾌하게 여겨야 마땅할 그 냄새가 어째서인지, 입술의 감촉이 더해졌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향기처럼 느껴졌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서 두 입술이 떨어졌다.
윤시아가 이시백의 가슴을 꽈악 잡으며 중얼거렸다.
“진짜로 더 사귀면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이시백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번째 키스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누가 먼저 입술을 맞추었는지, 알아보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