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달의 제국-91화 (91/142)

건달의 제국 91화

제12장 마지막 독재자(12)

무장한 경찰들이 리을령 소좌를 포위했다.

“리을령. 즉각 무장을 해제하세요.”

이번 작전을 담당한 차수현 팀장이 말했다.

경찰들이 무표정하게 소총을 겨누었다. 리을령 소좌의 머리와 가슴에 빨간 점들이 반사되었다.

경찰들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붉은 점이 새겨진 바로 그곳에 총알이 박히리라.

“리을령, 지금 즉시 무장을 해제하고 양팔을 위로 벌리세요.”

차수현 팀장이 다시 한 번 경고했다.

리을령 소좌가 자신을 향한 총부리들을 노려보았다.

“미안하지만 그건 못해 주겠는데, 개자식들아.”

“무장을 해제하지 않을 경우 사살하겠습니다.”

“어이고야. 짭새 새끼들 아니랄까 봐 협박도 졸라게 잘하세요. 무서워서 뒈져 버리겠네. 차라리 내 부모를 무덤에서 살려서 육시랄 내겠다고 협박하지 그러냐.”

리을령 소좌가 가래침을 뱉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살기등등하게 울려 퍼졌다.

“개새끼들아. 난 이미 목숨 한 번 베린 년이야. 협박을 하려면 제대로 하던가. 너희들이 우리 단원들을 빨갱이 정치사범으로 빵에 처넣고 싶겠지만 이미 나 말고는 전부 죽어버렸거든, 시발놈들아?”

“…….”

“유일한 증인인 나까지 죽이고 싶으면 어디 한번 죽여 봐. 너희 개새끼들 기르는 주인님이 참 좋아하시겠다. 앙?”

차수현 팀장이 부하에게 눈짓했다. 부하는 상관의 명령을 알아듣고 사방에 경찰 병력을 풀었다.

어떻게든 생존자를 찾아내려는 것이었다. 차수현 팀장은 부하를 보낸 다음 리을령 소좌에게 대꾸했다.

“리을령 단장. 정치사범은 아닌 놈도 빨갱이 딱지 붙이면 떡하니 나타납니다. 지금 본인이 유일한 생존자라 생각해서 막가파로 나오려나 본데, 우리는 그쪽에 아쉬울 거 없이 정황 증거들만 챙겨서 시나리오 짜내면 됩니다. 무장 해제하세요.”

“김일성의 마지막 후손도 죽어버렸고, 추종자들도 죄 죽어버렸고, 추종자들 우두머리도 죽어버렸고, 전부 싸그리 몰살했는데도 화제성이 있으시다? 너 누군지 몰라도 존나게 빡대가리구나.”

리을령 소좌가 코웃음을 쳤다.

입가에 걸린 미소에서 피비린내가 강렬하게 풍겼다.

“네 주인님이 원하는 건 이게 기사가 나서 시민들의 눈구멍을 최대한 길게 강간해 주는 걸 텐데, 악당 두목들이 전부 나가리 되었으면 신문사 기자들이 뭘 보고 글을 계속 써나갈 건데. 며칠 갈 거 같아? 일주일? 이 주일? 적어도 한 달은 넘게 가는 게 그쪽 주인님들 소망 아니야? 지금 이 누님이 호구로 보이니, 새파란 꼬맹아.”

리을령 소좌가 권총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겨누었다.

그녀는 얼굴이 비웃음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눈앞의 경찰들에 대한 비웃음.

경찰들을 파견한 정치가와 거기에 놀아나게 될 시민들에 대한 비웃음.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조 섞인 비웃음…….

“네 눈앞에 있는 년은 그냥 용병단장이 아니라 이 주일짜리 특보를 두 달짜리 특보로 만들어줄 년이야. 한 번만 더 무장을 해제하느니 뭐니 쓸데없는 말을 지껄여 봐. 네 주인님한테 모가지 날아가는 건 너야. 아, 저격수로 장난질 치지도 말고. 나 지금 이에 독 끼어 있다.”

차수현 팀장의 부하들한테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붉은 처녀 용병단의 단원들로 보이는 생존자들은 일단 이 근처에 없었다.

전원이 총으로 자살한 것 같다는 보고를 듣고 차수현 팀장이 혀를 쯧 찼다. 독해도 보통 독한 놈들이 아니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이시백 불러.”

리을령 소좌가 싸늘하게 말했다.

“당장, 내 눈앞에다, 이시백 그 새끼를 불러다 데려와.”

“이시백 단장은 우리 경찰의 중요한 핵심 협력자입니다. 테러리스트가 요구한다고 해서 간단하게 넘겨줄 만큼 우리가…….”

-타앙!

경찰들이 움찔했다.

리을령 소좌의 권총 총부리에서 희미한 연기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왼쪽 발바닥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것이었다. 총탄은 발등을 뚫었으며, 두꺼운 군화 아래로 핏물이 흘렀다.

리을령 소좌가 다시 권총을 자신의 옆머리에 갖다 대었다. 총알이 몸을 꿰뚫었는데도 그녀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저 아까 전보다 더 싸늘하게 더 또박또박 경고할 따름이었다.

“이시백을, 내 눈앞으로 데려와.”

“…….”

차수현 팀장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쥐어 잡았다. 왠지 작전이 너무 완벽하게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싶었다.

경찰 측 인명 손해는 단 한 명도 없었으며, 민간인 피해도 전무. ‘내 기구한 팔자에 이만큼 좋은 결말이 일어날 리 없지’ 하고 한숨을 쉬며, 차수현 팀장이 휴대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통화대기음이 잠깐 울리자마자 상대방은 전화를 받았다.

“어, 이시백 단장님. 죄송합니다. 작전이 거의 완벽하게 마무리가 되었는데…….”

-리을령 소좌로군요.

아직 아무런 운을 띄우지 않았건만 전화기 너머로 이시백이 단언했다.

언제 대화해도 신기하단 말이지, 하고 차수현 팀장이 생각했다. 차수현은 무신론자에다 괴력난신을 믿지 않았으나 가끔 이시백과 대화하다 보면 독심법이란 게 실존하지 않을까 고민했다.

“아니. 뭐, 그렇게 되었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붉은 처녀 용병단의 다른 용의자들은 전부 자살해 버린 모양입니다. 리을령 소좌 한 명 남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해서도 단장님을 보고 싶다고 요구하는군요…….”

-팀장님.

이 목소리였다. 차수현 팀장이 마음속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이시백이 무언가를 요구하려 들 때는 목소리의 톤이 바뀌었다. 묵직하고, 나지막하고, 마치 둔중한 북이 울릴 때 그러하듯, 듣는 사람의 귀가 아니라 심장에다 직접 목소리를 떼려 넣었다.

-본래 이번 작전이 완료될 때까지 저는 전면에 나서지 않기로 사전에 합의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저는 붉은 처녀 용병단뿐만이 아니라 모든 10인 위원회의 공적이 되었습니다. 모습을 드러내는 만큼 위험합니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계십니까.

“물론입니다, 단장님. 당연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우리 둘 사이에 면목이 없어질 경우는 없습니다. 약속에는 유동적일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를 설득하십시오. 제가 위험을 감당하면 무엇을 대가로 돌려주실지 말씀해 주시지요.

“리을령을 포획하는 데 이시백 단장님이 결정적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보고하겠습니다.”

-조금 모자라는군요, 팀장님. 게다가 포획하는 걸 은근슬쩍 전제로 붙이지 않았습니까. 웃돈을 얹혀 주지 않으면 얘기가 되지 않습니다.

“……이시백 단장님이 리을령을 포획한 다음, 저희 경찰이 인계를 받았다고 보고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이시백이 말했다.

-그것이 실제로 벌어질 일입니다.

잠시 뒤, 리을령 소좌와 경찰 병력이 대치하는 현장에 이시백이 도착했다.

어차피 백산 용병단 아지트의 지척이었다. 이시백은 언제나처럼 검은색 정장을 입고 걸어왔다.

양옆으로는 단장을 호위하듯이 순우경과 윤시아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중에서 순우경은 큼직한 포대를 들고 있었지만, 리을령 소좌의 시야에 잡히는 것은 오직 이시백뿐이었다.

“이시백.”

리을령의 눈동자가 핏기로 반들거렸다.

총상에서 출혈이 일어났음에도 리을령의 의식은 또렷하기 그지없었다.

복수심이. 의식이 흐릿해지기에는 너무나 강렬한 복수심이 그녀의 심장을 쥐어짜고 있었다.

이시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을령 단장님.”

“걸음걸이가 무척 당당하네. 그래, 백화가 죽을 때 어떤 소리를 냈어? 어떤 표정을 지었어? 침대에서 죽은 걸 보니 네 새끼한테 반항하지 않았겠지. 잠자고 있을 때, 아니면 이야기를 해서 안심시킨 다음에 총알을 날렸을 거야. 안 그래?”

리을령 소좌가 비릿하게 웃었다.

“인간쓰레기 새끼.”

“…….”

“내 앞까지 다가와. 네 머리에 총알을 쑤셔 박고 나도 뒈질 거니까.”

이시백이 지그시 리을령 소좌를 바라보았다.

검은색의 눈동자에서는 무심함 이외에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아니요. 당신은 그럴 수 없습니다, 소좌.”

“뭐?”

“당신은 저를 죽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리을령 소좌가 불쾌하여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순우경이 포대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지퍼를 쭉 내렸다. 리을령 소좌의 눈이 흔들렸다.

포대 안쪽에는 정백화의 시신이 들어 있었다. 아지트에 매달아둔 시체를, 이시백이 이곳에 오면서 가져온 것이었다.

“이 개자식이……. 뭘 하려고…….”

“정백화는 이미 죽었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오판이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습니다, 소좌.”

이시백이 품 안에서 권총을 꺼내었다. 그리고 리을령이 뭐라고 외치기도 전에 정백화의 시체를 향해 총탄을 날렸다.

탕! 하는 소리가 울리면서 총탄이 정백화의 복부를 헤집었다.

리을령의 입에서 절규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아아악! 무슨 짓을, 개새끼! 무슨 짓거리를 하는 거야! 아아, 아아악!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는 거야!”

“예시입니다, 소좌.”

이시백이 고개를 돌려 리을령을 쳐다보았다.

“사람은 죽었다고 해서 더 이상 모욕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체이기에, 시체일수록 가능한 모욕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여 버리겠어!”

리을령 소좌가 권총을 치켜세웠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고,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멎을 틈도 없이 계속해서 붉은 핏물을 흘려보냈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과 피, 분노로 얼룩져서 악귀처럼 구겨졌다.

이시백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만일 제가 죽으면 저의 부하들이 대신해서 시체를 욕보일 것입니다. 이번 사건이 일단락되기 전까지 정백화의 시체는 경찰이 아니라 제 아래에 놓여 있습니다. 경찰한테 넘기기까지 아직은 적어도 이틀은 남아 있습니다. 이틀 동안 시체가 어디까지 추해질 수 있는지, 소좌라면 충분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시백은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이번에 총탄은 정백화의 허벅지에 박혔다.

리을령 소좌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상대방을 모욕할 욕설도, 말도 증발했다.

오로지 절망 어린 울부짖음만이 어떠한 여과도 없이 그대로 폐부를 찢고 나왔다.

“아, 아아악! 아아! 아아아아!”

“권총을 내려놓으십시오. 정백화의 시체에 팔다리가 붙어 있기를 바란다면. 이 아이의 시신에 온갖 오물이 쏟아지기 싫다면. 머리를 잘라서 축구공처럼 가지고 놀고, 성기를 절단하여 입구멍에 집어넣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전부 절단되는 모습을 보기 싫다면- 소좌.”

이시백이 담담하게 명령했다.

“무릎을 꿇으십시오.”

“…….”

리을령 소좌는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파르르 떨었다.

시간이 흘렀다.

권총이 힘없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녀의 몸이 서서히 아래로 향했다.

그녀는 머리를 떨구었고, 무릎을 굽혔으며, 이윽고 땅바닥에 내려앉았다.

단지 바닥에 앉을 뿐이었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그녀가 추락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리을령이 전투의지를 상실하자 경찰들이 그녀를 덮쳤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몸을 제압하는데도 불구하고, 리을령은 마치 인형이 된 것처럼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리을령은 구속되어서 끌려갔다.

“…….”

이시백이 연초를 꺼내 입에 물었다.

차수현 팀장이 다가와서 조용히 말했다.

“이시백 단장님. ‘그런 약속’은 사전에 없었지 않습니까?”

“예, 없었지요.”

이시백이 담배 연기를 흘려보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리을령은 그걸 모르지 않습니까.”

“…….”

차수현 팀장은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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