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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의 제국-90화 (90/142)

건달의 제국 90화

제12장 마지막 독재자(11)

“헬기, 라니…….”

리을령 소좌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말문이 막힌 까닭은 예상외의 사태에 당황해서가 아니었다.

시커멓게 공중을 휘젓는 열 개의 프로펠러를 보자마자, 리을령 소좌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투명하게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그것도 단 1초 만에.

다만.

“소, 소좌 동무! 명령을 내려주십쇼!”

그 판단이 너무도 명백한 결론을 나타냈기에.

지금 가진 병력과 화기의 수준으로는 어떤 기묘한 전술과 어떤 교묘한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절대’로 열 대의 무장헬기를 이겨낼 수 없노라고 결론을 내렸기에, 리을령 소좌는 식도가 턱 막힌 것이었다.

프로펠러 꼭대기에 달린, 꼭 외계인의 눈알처럼 생긴 정찰장비(MMS)가 마치 붉은 처녀 용병단의 단원들이 새카맣게 모여 있는 지상을 오시하는 것 같았다.

리을령 소좌는 무전기를 들어 올린 채 그대로 멍하게 무장헬기의 행진을 쳐다보았다.

두두두, 두두두, 두두.

프로펠러들이 발산하는 소음이 리을령 소좌의 귓가를 가득 메웠다. 그것들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반대로 부하들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명령을 하달해 달라며 애원하는 울부짖음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소좌 동무!”

“어떻게…… 아니야, 말도 안 돼. 설마…….”

리을령 소좌의 어깨에서 힘이 쭈욱 빠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노와 증오로 꾹 붙들고 있던 무전기가 손아귀에서 힘없이 미끄러졌다.

무전기가 땅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모습을, 붉은 처녀 용병단의 간부들이 경악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단원 전원에게, 명령을 하달한다!”

호위대장이 이를 으득거리고 팔을 치켜들었다.

“후퇴하라! 각 단원, 분대별로 산개하여 후퇴하라!”

“월권행위요, 동무! 소좌 동무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거늘!”

“책임은 모두 내가 지겠소! 어서 후퇴하시오!”

호위대장이 무언가를 끊어내는 듯한 어조로 소리쳤다.

어째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아무리 위급한 상황에서라도 이성을 잃지 않았던 소좌 동무께서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셨다.

아니, 애당초 병력을 전부 백산 용병단의 아지트에 집중시키라는 지시부터 이상했다.

호위대장은 후회했다.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진즉에 깨달아야만 했다…….

두두두, 두, 두두.

이제 프로펠러 소리는 붉은 처녀 용병단의 바로 머리 위에서 들리는 듯 근접했다.

용병단원들에게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리하여 단원들이 차량에 다시 올라타서 도망치려는 순간, 무장헬기의 기총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히아아악!”

“도, 도망…… 흐, 크아아악!”

하늘로부터 용서 없는 죽음의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차량에 올라탄 단원들은 판단이 잘못되었다. 기총들은 우선 덩치가 큼직한 차량들부터 노렸다.

아직 시동조차 걸리지 않은 자동차들은 무장헬기에게 있어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에 불과했다.

순식간에 차량들은 벌집이 되었고, 그중 몇 개는 지옥불을 내뿜으며 장렬하게 폭발했다.

“건물! 건물로 들어가, 새끼들아!”

“분대를 유지하면, 끄하아아악!”

“소좌 동무! 소좌 동무!”

그건 전쟁이 아니라 칠면조 사냥이었다.

백산의 아지트 전면에 집결해 있던 단원들은 미처 뿔뿔이 흩어지기도 전에 기관총의 세례를 몸통으로 받았다.

사방에 핏물이 튀기었고, 육편이 공중에 흩날렸다. 하얗고 붉은 고깃덩어리와 같은 것이 콘크리트 바닥에 쏟아졌다.

그중 어떤 단원은 자기 나름대로 생존 본능을 발휘하여 시체 밑으로 엉금엉금 기어들어갔다.

‘으으, 으으으!’ 하고 단원은 시체의 꺼림칙한 감촉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단원은 무장헬기의 기총들이 똑같은 자리에 적어도 세 번은 확인사살을 퍼붓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굵직한 총알은 시체를 뚫고 간단하게 이 단원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악, 끅……! 끄윽……!”

단원은 끔찍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발악하려는 듯-무엇을 위해 발악하는지는 본인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단원은 동료의 시체에 깔려 있었다. 그는 도저히 시체의 무게를 이겨 낼 힘이 없었으므로 서서히, 천천히 그대로 눈을 감았다.

단원은 최후에 자기가 총살당한 게 아니라 압살당한 것이라 느꼈다…….

총알 세례는 차량뿐만 아니라 지휘부 또한 우선 타깃으로 노렸다.

기총이 리을령 소좌와 간부들을 향해 뇌우와 같은 총탄을 퍼부었을 때, 호위대장은 앞뒤 생각하지 않고 소좌를 바닥에 쓰러뜨려 온몸으로 가렸다.

“동무! 정신 차리십쇼, 동무!”

호위대장이 리을령 소좌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직후, 호위대장은 ‘흡’ 하고 눈썹을 찡그렸다. 호위대장의 위에 또다시 간부들이 투신한 것이었다.

두 명, 세 명이 연달아 리을령 소좌의 몸을 가렸다. 올라타지 못한 간부들은 틈새를 막기 위해서라도 옆에 붙었다.

“소좌 동무!”

“…….”

리을령이 시체와 같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호위대장은 젠장 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다시 한 번 일갈하려 입을 크게 열었다.

호위대장의 목소리는 그러나 곧이어 쏟아진 소음에 간단히 파묻혔다.

“크흑!”

“느, 으아아악!”

투우, 투우 하고 짧은 충격들이 연거푸 리을령 소좌의 신체를 흔들었다.

가장 위에 올라탄 간부들이 먼저 비명을 질렀다. 그중에는 머리가 관통당한 간부마저 있었다.

간부들은 숨이 끊어지는 와중에도 이 인육의 탑을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들러붙었고, 이미 사지에서 힘이 빠진 동료 간부의 시체마저 아등바등 붙잡으려 들기까지 했다.

“읍……! 푸으, 크으읍……!”

호위대장은 복부에 총알이 들이박혔다. 그는 두개골에 갑자기 뜨거워지며 눈알이 빠져나갈 것 같은 통증에 휩싸였다.

동시에 호위대장은 무언가 끈적거리는 액체가 등줄기에서 흘러나왔지만, 복부에서는 느껴지지 않았기에 총알이 자신의 몸뚱어리를 관통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다행이었다. 관통상이 아니라면 총탄은 소좌님까지 닿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다행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주변이 적막해졌다.

스르륵-

누군가 한 사람이, 혹은 한 시체가, 균형을 잃고 말았다.

한 명이 미끄러지자 이윽고 인육의 탑은 전체가 조용히 무너졌다.

호위대장은 동료들의 압박이 사라진 덕분에 숨통이 한결 트였다.

물론, 그렇다 한들 등짝에 구멍이 뚫려 버렸으니 고통스러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크으윽…….”

호위대장은 이럴 경우에 출혈과다로 사망하기 십상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며,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는 편이 명줄을 길게 해주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 마지막으로 그 길어지는 명줄조차 기껏해야 오 분을 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동무. 무사하십니까?”

“……중앙 정부가 평양에 대대적으로 개입할 수는 없어.”

툭 하고.

여전히 초점이 흐릿한 눈동자로 리을령 소좌가 중얼거렸다.

“증거를 잡은 거야. 증거를…… 평양을 싹 쓸어버려도 된다는 증거를…….”

“소좌, 동무……?”

호위대장은 리을령 소좌가 내뱉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소좌는 정백화가 김일성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심지어 측근으로서 자신을 보호하는 호위대장한테조차. 바로 그렇기에 리을령 소좌는 망연자실했다.

어디인가. 도대체 어디에서 정보가 샜는가. 그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백화를 납치한 건 단순히 나를 배신하고 도발하려는 목적이 아니었어……. 저 새끼가 알아낸 거야. 중앙 정부는 딜을 받아들였겠지. 끝장이야. 하하, 어차피 이렇게 될 거…… 차라리…….”

차라리 백화한테 한 번이라도 바깥세상을 구경시켜 주는 것이었는데.

어차피 병실의 침실에서 싸늘하게 죽을 운명이었다면, 1시간이라도 더, 1분이라도 더, 백화가 그토록 눈에 담고 싶어 했던 세상을 안내해 주고 싶었다.

리을령 소좌는 눈물을 흘렸다.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지고 대신 텅 빈 구멍이라도 생긴 것처럼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었다.

“호위대장 동무. 지금까지, 나를 지켜줘서 고맙다. 하지만 우리는 어차피 지옥 끝까지 사냥당하게 되었다. 여기서 살아 남아봤자 기다리는 건 무간지옥과 같은 고문과 서커스단의 구경거리가 되어 농락당하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리을령 소좌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니까 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반복했는데도 다음 말이 뒤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호위대장이 전부 이해한다는 듯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영광입니다, 소좌 동무.”

“…….”

“공화국 만세.”

호위대장이 리을령 소좌의 손을 낚아채서 방아쇠를 꾹 당겼다. 타앙 하는 총성이 울리며 총알이 호위대장의 머리를 날렸다.

리을령 소좌는 따뜻하고 붉은 피가 자신의 가슴팍에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부르르 떨었다.

여기에 이대로 남아서 부하가 흘리는 피를 모두 받아주고 싶었다. 그것이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리을령 소좌는 눈물을 흘리며 움직였다. 아직 멈추면 안 되었다. 아직은 죽을 수 없었다…….

“살아 있는 놈들은 말해라.”

리을령 소좌가 시체 틈새에서 빠져나와 소리쳤다. 그러자 세 명의 간부가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리을령은 권총을 장전하여 한 명, 한 명, 또 한 명, 돌아가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세 명 모두 리을령과 눈을 마주한 채로 죽었다. 그리고 세 명 모두 리을령을 원망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헬기들은 여전히 하늘의 재앙으로 군림하며 두두, 두두두, 두 하고 울어댔다.

두개골 안쪽까지 파고드는 것 같은 그 소리에 리을령은 이를 까득 물었다.

그녀는 아까 자신이 떨어뜨렸던 무전기를 주워서 명령했다.

“아직 생존한 단원들.”

리을령 소좌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단원들한테 전해졌다.

“위대한 공화국의 마지막 전사들. 과거의 유산을 망각하지 않고 마음에 새긴 후예들. 붉은 처녀의 이름을 가슴에 달고 살아온 그대들한테 나, 리을령 소좌가 명령한다.”

리을령이 입술에서 피를 흘리며 말했다.

“지금 즉시, 자결하라.”

어떻게든 건물에 숨어들어 간신히 살아남은 단원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다시 한 번 명령한다. 지금 즉시 자결하라. 이 반도의 중앙 정부는 우리를 빨갱이로 규정하여 정치적으로 말살할 계획이다. 생존자는 고문실로 끌려가서 겪지도 않은 일들을 고백하고, 생각해 보지도 않은 것을 토로하며, 인간 이하의 축생으로 취급받을 것이다. 그리고 좋을 대로 이용당하다 남쪽의 돼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당하겠지.”

무장헬기들에서 병력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외줄을 타고 내려오는 광수대의 번견들을 올려다보며 리을령 소좌는 최대한의 증오를 담아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나는 그대들의 염원을 이루어주지 못했다. 따라서 지금의 명령은 무시해도 좋다. 다만 그대들의 상관이 아니라 동지로서. 한 명의 동무로 불리던 여자의 마지막 부탁이라 생각해 다오. 동무들…… 곧, 저승에서 보자.”

리을령 소좌는 무전을 끊었다.

무서우리만치 적막한 침묵이 일대에 가라앉았다.

그때 어디선가 타앙! 하고 총성이 울렸다.

또다시 탕! 하고 총소리가 적막을 찢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짧은 총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타아앙!

-탕!

-타앙!

-타앙!

그리하여 경찰 병력이 지상에 내려앉았을 때.

무장헬기의 기관총 세례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붉은 처녀 용병단 13명은 전원 자신의 입안에 총구를 들이밀어 스스로 머리를 날렸다.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이시백…….”

경찰들이 소총을 치켜들고 리을령 소좌를 향해 겨누었다.

리을령은 입술에서 새빨간 피를 한 줄기 흘리며 정면을 노려보았다.

“이시백……!”

그녀가 붉은 처녀 용병단 최후의 생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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