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88화
제12장 마지막 독재자(9)
“…….”
이시백은 의자에 앉아 조용히 시신을 쳐다보았다.
수많은 인간을 죽여 왔지만 이번만큼 기분이 나쁜 적은 드물었다.
정백화라는 남자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겠지. 하지만 죽어줄 필요가 있었다.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사살당했다.
‘역시 기껏해야 2류. 흉내를 내는 데 급급한 인형인가.’
이시백이 자조했다.
전생의 원서 아가씨라면 또 다른 방법을 고안했을 것이다.
무고한 희생자를 내지 않고 성공하는 지름길을 어떻게든 떠올렸을 터다.
이시백은 그게 불가능했다. 눈앞에 지름길이 놓여 있다면 당연하다는 듯 그걸 선택했다.
기껏해야 원서의 신념을 따라하는 것에 불과한 이시백은, 삶의 태도와 재능에 있어서까지 그녀를 모방하지는 못했다…….
“흐.”
이시백이 비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결을 잠깐 내뱉었다.
그는 휴대전화기를 꺼내어서 어디론가 통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이어지다가 피곤에 지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수현 팀장이었다.
-야아. 목 빼고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시백 단장님.
차수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약간 들떠 있었다.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2차 검사 결과도 정확하다 판정이 나서 말입니다. 부계 Y염색체와 모계 X염색체를 대조, 확인했더니 동일하게 나와서…… 뭐, 이런 건 단장님이 알 필요는 없습니다만. 하하.
이시백은 뇌물을 동원하여 병원 간호사 한 명을 끌어들였다.
간호사를 통해 정백화의 체액을 구한 다음, 개성에 머무르는 차수현 팀장한테 보냈다.
차수현 팀장은 곧바로 과학수사과와 국과수에 체액의 감정을 의뢰했다.
외국인에겐 우습게 들릴지 모르나, 반도의 중앙 정부에 있어 ‘김일성의 핏줄’을 지상에서 멸살시키는 것은 최우선 과제였다.
후손들은 모조리 사살되었으며, 유전자 정보가 기록되었다. 그중에는 정백화의 친부도 있었다.
-세상사에 100%는 없으니 단언하기 힘듭니다만, 98%쯤은 확실합니다. 저도 과학엔 영 소질이 없어서 솔직히 절반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여하간 저주받을 독재자의 혈통이 맞습니다. 정말 큰 건을 해주셨습니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별일 아니다.
이시백은 정백화의 시체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방아쇠를 당기는 것뿐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습니다.”
-방아쇠…… 설마, 이시백 단장님. 증거물을 사살했습니까?
얼굴도 보지 못한 남자애를 증인이 아니라 증거물이라 지칭한 차수현 팀장은, 다소 난감하다는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거 곤란하군요. 혹시 제가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증거물은 살아 있는 편이 압도적으로 써먹기 좋습니다. 정당한 재판을 거치는 편이 시민들의 이목을 더 잡아끌 테니까요. 정치적인 파급력이 한층 커집니다. 아니, 단장님이라면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기본적인 사항이었다.
사람들은 독재자의 마지막 혈통이 살아서 움직이는 모습을 더 보고 싶어 한다.
이미 죽어서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린 모습은,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거대한 화제의 돌풍을 일으키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약발’이 떨어졌다. 여러모로 아쉬운 감이 있겠지.
그래서 차수현 팀장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시백 단장 정도나 되는 양반이 이걸 간과했을 리 없다. 대체 왜…… 설마?’
차수현 팀장이 의아스러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단장님. 저번에 듣기로 증거물은 15년 내내 병상에 누워 있었던 스무 살 남자, 라고 들었습니다만. 설마 동정심 때문에 사살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아주 약간의 침묵이 있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2초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걸로 차수현 팀장은 추측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어차피 경찰에게 덜미가 붙잡힌 이상 정백화의 미래에는 어떠한 희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
중앙 정부는 다른 건 몰라도 ‘북괴의 재래’라는 사태에 대해선 거의 병적으로 과민하게 반응했다.
정백화는 특수한 법률에 의거하여 처형당할 운명이었다. 정치가들에게 실컷 이용되고 난 이후에.
이시백은 정백화가 정치적인 희극에 휩쓸리지 않도록 일부러 죽여 버린 것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증인이 낌새를 알아채고 반항했습니다. 제압하는 과정에 불가피하게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차수현 팀장님.”
-…….
한 발자국 늦게 튀어나온 대답, 아니, 대답이라기보다 정치적인 해명에 가까운 그 말을 듣고, 차수현 팀장은 한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서야 차수현 팀장은, 자기가 이시백이라는 남자의 일면만을 알아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시백은 단순히 냉혹한 실력자가 아니었다. ‘어설프게’ 냉혹한 실력자였다.
그리고 바로 이 어설픔이 차수현을 당황시켰다.
-……저는 지금 사리원에서 대원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습니다. 개성의 사건은 전부 해결되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저희 광수대는 꽤 오랫동안 평양에 머무르게 되겠지요. 지금부터 정확히 1시간 후에 평양을 습격하겠습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시백 단장님.
통화가 끊기기 전에 차수현 팀장이 말했다.
-제가 단장님과 작업하는 것을 귀찮더라도 결코 사양하지 않는 이유는, 물론 제 실적과 승진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 이외에도 단장님이 아직은 ‘인간’으로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갑자기 제 얼굴에 금칠을 해주시는군요. 그래봤자 떡값은 드리지 못합니다.”
-하하핫…… 뭐, 우리 사이에는 그 나름대로 신뢰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즈니스적인 신뢰 말고도 동지애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약간은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프 더 레코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차수현 팀장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가라앉았다.
-증거물의 친부와 친모는 우연히 죽임을 당한 게 아닙니다. 저희 광수대와 군병력의 합동 작전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
-리을설의 집안이 김일성의 후손을 보호하고 있었다는 사실쯤은 우리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걸 알아내라고 설립된 것이 저희 같은 사냥개들 아니겠습니까. 철저한 계획 아래, 다시는 이 반도에 독재자가 재래하지 않도록 사살했습니다. ……뭐, 저도 극비 문서를 봐서 아는 것입니다만.
이시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몬스터의 습격에 의해 증인이 상처를 입은 것은.”
-그것 역시 작전에 의해서였습니다. 다만 산속에서 작전을 펼쳤기 때문인지, 요란스러운 총성을 듣고 몬스터들이 꼬였습니다. 저희들은 임무가 달성되었다고 확신하고 철수했지요. 그런데…….
“어린아이는 생존자로 남았다. 그런 얘기군요.”
-예, 그렇습니다. 미처 고려하지 못한 변수였습니다. 저희가 경찰과 군이라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기껏 열심히 헌터들로 위장까지 했는데요.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실수를 저지른 것이지요. 이야아, 부끄럽습니다. 이시백 단장님이 제보해 주기 이전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시백은 어떻게 전생에서 유현도가 평양 집권을 성공했는가 눈치챘다.
이시백과 달리 유현도는 경찰에 인맥이 없었다. 그런데도 경찰은 유현도에게 협력하여 수사를 진행했다.
유현도의 무엇을 믿고 협력했는가? 단순히 장나래가 부장판사의 독녀라는 이유만으로 공룡과 같이 느릿한 집단이 움직일 리 만무했다. 무엇이 계기였는가…….
‘알고 있었군.’
중앙 정부에선 김일성의 후손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15년 전의 사살 작전에 미흡한 구석이 있었다는 것도.
그렇기에 유현도가 후손에 대해 제보했을 때 중앙 정부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일축하지 않고 ‘설마’ 하는 심정으로 다가섰으리라.
몇 가지의 우연한 행운이 겹쳐, 유현도는 평양을 접수하는 데 성공했다.
-아시겠지요. 저희는 그런 인간적인 감상을 품기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습니다. 부정할 수 없는 과거들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여차할 경우 이시백 단장님을 사살하는 계획들도 플랜 B까지 세워져 있습니다. 저희는 그런 종자입니다, 단장님.
“알고 있습니다.”
이시백은 입맛이 썼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새삼 중앙 정부의 끝없는 조직력이 보였다.
일개 용병단이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견고했다. 이것이 국가라는 집단의 힘이겠지.
과연 원서 아가씨와 윤시아를 저런 집단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까. 이시백은 단지 그것이 걱정되었다…….
-그러니 부탁드리겠습니다. 앞으로도 저희와 양호한 관계를 가져주십시오. 저는 입장상 헌터를 경멸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이시백 단장님과 같은 분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단장님이라면 ‘우리 회사’의 훌륭한 파트너가 될 겁니다.
“우정 어린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이시백도 똑같이 생각했다.
차수현 팀장처럼 적당히 유능하고, 적당히 출세욕이 넘치며, 적당히 자신의 의무에 충실한 인간이야말로 제일 믿음직스러운 파트너였다.
문제는 차수현의 상전들까지 중용의 미덕을 알지는 못한다는 점이었다.
정계에는 권력욕에 눈이 먼 괴물들이 살았다. 언젠가 그런 괴물들이 송곳니를 드러낼 때, 이시백과 차수현이 맞부딪치는 것은 필연적이리라.
차수현은 그걸 아직 몰랐으나, 이시백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아니요.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단장님 덕분에 오랜만에 제가 아직 인간이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하하, 국가의 안전에 위협이 된다면 갓난아기라도 망설임 없이 죽여야 하는데 말이죠. 제가 아직 미숙합니다.
“피차일반입니다. 어설픈 남자들끼리 잘 늙어가기를, 저 개인적으로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럼 평양에서.
“예, 평양에서 뵙겠습니다.”
통화가 끊겼다.
이시백은 곧바로 다음 전화를 순우경에게 걸었다. 명령은 간단했다. ‘연장을 챙겨서 위층으로 올라오라.’ 정백화의 시신을 담을 포대, 백산의 아지트까지 도망칠 차량편은 미리 준비해 두었다.
이시백은 정백화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핑계로 문 바깥의 경호원 두 명을 끌어들였다.
경호원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병실에 들어왔다가 순식간에 이시백의 권총에 사살되었다.
등을 보인 병사를 두 명 처리하는 것 정도는 이시백한테 손쉬운 준비운동에 속했다.
‘이제 서둘러야겠군.’
입원실 안쪽에는 감시 카메라가 없었지만 복도에는 쫙 깔렸다.
경호원들이 병실에 들어갔다가 한참 동안이나 나오지 않을 경우, 감시자가 이상하게 여길 위험이 있었다.
이시백은 정백화의 시신을 기다란 가방에 담았다. 곧이어 그는 순우경과 원서를 대동하고 병원을 빠져나갔다.
경호원을 살해한 지 5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이시백은 자동차에 올라타 있었다.
드르르릉-
백산 아지트에 도착할 무렵에 휴대전화기가 진동했다.
화면을 쳐다보니 리을령 소좌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갑작스레 이시백이 부하들을 데리고 외출했다는 보고가 리을령한테 전해졌겠지.
상당히 대응이 빨랐다. 그렇지만, 그 빠른 대응으로도 리을령 소좌는 자신에게 덮친 비극을 막지 못했다.
꾸욱-
이시백이 통화를 무시했다.
이후로도 리을령 소좌는 몇 번이고 이시백에게 전화했지만 그때마다 이시백은 무심한 눈빛으로 통화거절 버튼을 눌렀다.
여섯 번째로 거절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리을령 소좌는 더 이상 통화를 걸지 않았다. 그것은 이시백이 아지트에 도착한 것과 비슷한 시기였다.
아지트 정문에는 단원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윤시아, 유현도, 장나래, 그 이외에도 하세가와 노부유키와의 분쟁 때부터 길드에서 고용한 헌터들이 주르르 도열했다.
그들은 이시백을 보자마자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보스.”
이시백이 고개를 끄덕이고 건물 정면으로 걸어 올라갔다.
자연스럽게 윤시아가 이시백의 옆에 따라붙었다.
“어서 오세요, 단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진짜 수고는 이제부터 해야 할 거다.”
이시백이 말했다.
“전쟁을 준비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