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87화
제12장 마지막 독재자(8)
10
항쟁은 언제나 골목의 다툼에서 시작했다.
북한계 주민이 운영하는 도박장에서 러시아계 주민이 깽판을 부렸다.
마침 도박장에서 일하고 있던 붉은 처녀 용병단의 단원들이 말썽꾼을 흠씬 두들겨 팼다.
이야기가 여기까지라면 그저 평양의 일상 풍경에 녹아 사라졌겠지.
“가벼운 타박상으로 사람이 죽었다고?”
금수산태양궁전.
기다란 각탁에 앉은 리을령 소좌가 콧방귀를 뀌었다.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게 어디서 개자식이 짖는 소리야.”
“의사의 사망진단서도 확실하게 뽑아왔어, 노처녀 동지. 우리 애가 댁들의 인민재판을 받아서 억울하게 죽었다는 내용이 종이에 쓰여 있다고.”
러시아 마피아의 용병단장, 라라 안티포바(Лара Антипов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곳에 모인 용병단장들에게는 서류가 한 부씩 나뉘어 있었다. 사망진단서는 확실했다.
“나도 웬만하면 좋게 좋게 해결하고 싶지. 하지만, 알잖아? 우리 아이가 죽었는데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넘어가서야 이쪽의 체면이란 게 마리아나 해구보다 더 깊은 시궁창에 떨어져 버리거든.”
“어이, 시베리안 허스키. 조금 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로 왈왈거려.”
리을령 소좌가 서류를 두 쪽으로 찢었다.
“아까부터 묻고 있잖아. 무슨 개수작이냐고. 멀쩡하게 살아서 나간 양반이 ‘이제 보니 죽을 정도로 상처를 입었습니다’라니. 너무 고전적이라서 시체 냄새가 풍기잖아.”
“어머나, 진심으로 사과하진 못할망정 우리의 진의를 의심하는 거야? 노처녀라서 그런지 성격도 나빠. 나는 그냥 10인 위원회가 우리 둘 사이에 벌어진 해프닝을 적당히 해결해 주길 바랄 뿐이야.”
라라 안티포바가 슬쩍 상석을 쳐다보았다.
10인 위원회의 좌장인 마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위가 어찌 되었든, 우리 위원회에 가입한 두 용병단이 불미스러운 사건을 겪게 된 것은 사실이다. 10인 위원회에 중재를 요청한 것은 그릇되지 않았다. 본인은 위원회가 합의한 권위에 의거해서 권고한다. 리을령 소좌.”
“듣고 있어.”
“살해가 발생한 카지노를 안티포바에게 넘겨라. 그걸로 이번 사건은 불문에 부치는 것으로 하지.”
리을령 소좌가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냐.’
이건 전형적인 말려 죽이기 수법이었다.
이번에 사망한 단원은 틀림없이 저들이 죽였다.
일부러 희생자를 만들어서 이쪽에게서 양보를 얻어내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한 발자국 물러서 봤자 계속 건수를 만들겠지.’
리을령 소좌가 담배를 뻑뻑 피웠다.
마철과 러시아 마피아는 연합을 꾸려서 이쪽을 도발하고 있었다.
‘하세가와 노부유키를 죽이고 얻어낸 부산물을 자기네랑 사이좋게 나누든가, 아니면 전쟁을 치르든가, 둘 중 하나인가. 빌어먹을 년놈들이야.’
불안한 정적이 회의실을 짓눌렀다.
이제 리을령 소좌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모든 게 결정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10인 위원회의 모든 용병단이 항쟁에 말려들지 몰랐다. 최근 10년을 통틀어서 가장 잔인한 불꽃놀이가 터지리라.
“……보상금을 내어주지. 1억 정도는 건네줄 수 있어. 원한다면 해당 카지노 지배인의 사과도 곁들이겠어. 하지만 카지노를 아예 홀라당 넘기라는 건 언어도단이야. 단호히 거부한다.”
“10인 위원회의 중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인가?”
“비겁한 승냥이 새끼들이랑 상종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는데, 뭐. 그렇게 받아들이면 나야 어쩔 수 없지. 지들이 알아서 짐승이 되겠다는데.”
리을령 소좌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와 동조하는 용병단장 세 명도 일어났다.
“후회하게 될 거다, 리을령.”
“총알을 많이 준비해 두기를 기원하마. 버러지들아.”
마지막으로 마철과 날카로운 시선을 교환한 뒤, 리을령 소좌가 퇴장했다.
이로써 평양의 이권을 독차지하던 거대 용병단들은 서로에게 선전포고를 던졌다.
폭풍전야라. 첫 며칠은 아무런 일 없이 진행되었다.
나흘째가 되는 날에 비로소 총성이 울려 퍼졌다.
“죽여! 저 불곰 새끼들을 쳐 죽여!”
“개 같은 원숭이들이-”
타앙 하고 총소리가 아주 짧게 공중을 뒤흔들었다. 총성은 그러나 도시 전체를 가득 울리는 종소리와 같았다.
누군가가 골목의 지저분한 땅바닥에 쓰러졌으며, 검붉은 피웅덩이가 흘러내렸다. 헌터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첫 번째 총성이 터지기까진 4일이 필요했으나 두 번째 총성은 불과 4분 뒤에 발생했다. 세 번째 총성은 4초 뒤였다.
전쟁의 시작이었다.
11
백산 용병단도 당연하지만 항쟁에 참전했다.
정식 단원이 6명밖에 안 되는 용병단에 순수한 전투력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차라리 돈을 후원받아 하수인들을 고용하는 편이 나았다. 이시백은 수십억의 거금을 바치는 대신, 직접적인 전투에서 제외되었다.
“시백이 너는 백화를 지켜줘.”
다만 백산 용병단에겐 특별한 임무가 하달되었다.
리을령 소좌는 이시백을 비밀리에 불러들여서 말했다.
“백화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숨겼으니 설마 정보가 새어 나갔을 리는 없지만, 만약의 사태라는 건 항상 대비해 둬야 하니까.”
“백화 도련님을 지키는 것이군요. 알겠습니다.”
“……명령한 내가 이렇게 묻는 것도 우습지만, 아무렇지도 않아? 새파란 꼬맹이 하나 지키라고 강요하는 꼴인데.”
이시백이 고개를 저었다.
“소좌님께 백화 도련님은 아드님과 같은 분입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이지요. 그런 분을 지키라고 명령을 받았는데 도리어 기뻐해야 옳지, 제가 거기에 이의를 가지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아, 씨. 아들 같은 거 아니래도 계속 그런다.”
리을령 소좌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자기처럼 피만 묻히고 살아온 여자가 누군가의 어머니가 될 자격은 없었다. 리을령 소좌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에게 어머니란 조금 더 성스러운 무언가였다. 적어도 학살자가 아닌 여인.
반면에 리을령 소좌는 10살이 되기도 전에 첫 살인을 저질렀다.
자신은 어머니가 될 수 없었고 되어서도 안 되었다…….
“게다가 저도 좋아합니다. 백화 도련님.”
“어?”
“도련님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도련님의 천성이 따뜻하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이 임무에 어떠한 불만도 없습니다, 소좌님. 안심하시길.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도련님의 신변을 사수하겠습니다.”
“…….”
리을령 소좌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어휴, 시백이 너는 얼굴은 곰 새끼처럼 생긴 주제에 아부를 열라 잘해. 듣는 사람이 기분 좋아지는 말만 쏙쏙 골라서 지껄이는 재주가 있다는 말이지. 그것도 재능이다, 야. 아무튼 백화를 잘 부탁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응?”
“맡겨주십시오.”
이시백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죽음으로 지키겠습니다.”
“오버 떨기는……. 난 간다.”
그리하여 이시백은 항쟁이 일어나는 동안 대동병원에 틀어박혔다.
윤시아, 유현도, 장나래는 아지트에 남았다. 이시백이 부재하는 동안에는 자문사인 윤시아가 단장 대행으로서 모든 것을 지휘했다. 이시백을 따라온 단원은 순우경과 원서였다.
순우경이 병원의 로비에서 망을 보는 사이, 이시백은 원서와 함께 비밀스러운 시간을 보내었다.
제법 호화스러운 휴식이라 해도 좋았다. 평양 시내에서 30분 간격으로 폭발음이 들려오는 가운데, 이시백과 원서는 서로의 살결을 탐닉했으니.
전쟁이 일어나고 5일째.
양측의 피해가 어림잡아 300명이 넘었을 무렵, 이시백이 천천히 움직였다.
“…….”
이시백은 침대에 누워 숨을 색색거리는 원서를 내려다보았다.
정백화의 입원실 바로 옆에 마련된 병실에서, 두 남녀는 그동안 참아왔던 애정을 폭발시키듯 정신없이 몸을 섞었다.
병원 바깥에선 죽음의 행진곡이 이어지고 있는데 두 사람에겐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오히려 이시백에겐 지난 5일이 꿈결같이 달콤했다. 부끄럽게도, 이시백은 이 항쟁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마음속으로 바랐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끝내야 할 시간이다.’
이시백이 거울을 바라보며 정장을 차려입었다.
항상 윤시아가 챙겨주었는지라 스스로 넥타이를 매는 것이 어쩐지 무척 오랜만으로 느껴졌다.
이시백은 허리춤에 권총을 챙긴 다음,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
목적지는 정백화의 입원실이었다. 호위병이 이시백을 알아보고 경례했다.
이시백도 정중히 경례로 응답해 주고 정백화의 입원실에 들어갔다.
“아. 어서 오세요, 시백 씨.”
정백화가 이시백의 발소리를 알아보고 활짝 웃었다.
항쟁이 시작된 이래 이시백은 매일 정백화한테 찾아가서 말상대를 해주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병실 침대에서 보내야만 하는 정백화에게 있어 이시백은 기쁜 존재였다.
“오늘은 어떤 얘기를 들려주실 거예요? 외국에는 정말 대단한 헌터들이 많네요. 반도에 비해서 대규모 던전이 많아서 그럴까요. 뭐라고 할까, 우리들보다 조금 더 순수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오늘은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시백이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백화 도련님. 우리가 옥상에서 나눈 대화를 기억합니까?”
“예, 물론이죠. 지금도 제가 시백 씨를 위해 뭐를 할 수 있을까 기대되는걸요.”
정백화가 싱글벙글거렸다.
“이모가 말했어요. 이번 항쟁만 끝나면 저도 바깥에 나갈 수 있다고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저를 철창에 갇힌 앵무새처럼 키우지 않겠대요. 저만 할 수 있는 무언가, 세상에서 오직 저에게만 가능한 무언가가 있다고 말했어요. 그게 뭘지 궁금해요.”
“…….”
이시백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요 며칠 소년 아닌 소년을 상대하면서, 이시백은 몇 가지 알아낸 게 있었다.
정백화는 자기가 김일성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일찍 부모를 잃었기 때문이겠지.
어쩌면 리을령 소좌는 정백화가 아무것도 모른 채 평범하게 살다 죽는 것을 바랐을지도 모른다…….
이번 항쟁이 끝나면 평양은 명실상부 리을령 소좌의 손아귀에 들어온다.
정백화가 바깥에 나설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즉, 리을령에게 있어서나 정백화에게 있어서나 이번 항쟁은 인생의 크나큰 전환점이었다.
-만약 그 전환점에 이시백이라는 남자가 버티고 서 있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흘러갔을 수도 있었다.
“오늘은, 저번에 약속드린 것을 선물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정말요?”
정백화의 웃음이 더더욱 밝아졌다.
“뭐죠? 제가 뭘 하면 되죠?”
“우선 침대에 차분히 누워주십시오.”
“아하. 뭔가 의식 같은 게 필요한가요?”
“예.”
정백화가 미소를 지으면서 침대에 편안히 누웠다.
눈앞이 보이지 않은 소년은, 문득 자기 이마에 서늘한 물건이 닿는 감촉을 느꼈다. 금속 물질 특유의 서늘함이었다. 정백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뭔가요, 시백 씨.”
“백화 도련님.”
“네?”
티잉.
소음기에 여과된 총성이 장난스럽게 울렸다.
그러나 소리와 동시에, 새하얀 침대에 새빨간 핏물이 와락 튀었다.
정백화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죽었다.
이시백이 권총을 집어넣으면서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독재자의 마지막 핏줄.
그것을 간직한 소년은 병원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죽기 전에도, 죽은 다음에도, 소년의 눈에는 어떤 것도 비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