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86화
제12장 마지막 독재자(7)
그날 이후로 아슬아슬한 나날이 이어졌다.
평소에 이시백과 원서는 상사-부하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실 두 사람은 눈길을 마주치는 일조차 거의 없었다.
‘선배가 제대로 조심해 주고 있어.’
어찌나 두 사람이 공적인 자리에서 철저하게 서로를 피하는지, 윤시아마저 낌새를 알아채지 못했다. 여기에는 원서의 치밀한 계획이 한몫했다.
원서는 백산의 자문사가 어린 나이에 비해서 매우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았다.
단 하나의 약점도 남기지 않기 위해 원서는 총력을 기울였다.
“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지면 안 됩니다. 일주일 단위로, 한 달 단위로, 주기적으로 만나게 되면 반드시 언젠가 들키고 말 거예요. 다음에 언제 만날지는 그때마다 새로 정해야 합니다.”
“장소도 마찬가지예요. 똑같은 장소를 이용하다가는 분명히 발각되겠지요. 그렇다고 아지트 바깥에 나가서 만나는 건 더 좋지 않습니다.”
원서의 의견들에 이시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머리가 비상한 두 사람이었다.
용병단 아지트에는 쓰지 않은 채 내버려 둔 빈방이 많이 남았다.
공손범 일당이 사용하다 백산이 새로운 주인이 되고서 버려진 장소였다. 이시백과 원서는 그런 곳들을 번갈아 사용했다.
허락된 시간은, 일주일에 기껏해야 1시간.
“응…… 단장, 님…….”
두 사람은 어두운 빈방에서 서로의 살을 탐닉했다.
인간이 오랫동안 살지 않아서 을씨년스러워진 잿빛 공간에 둘의 거친 숨소리가 내려앉았다.
이것이 겨우 1시간만 지속되는 마법이라는 사실을 이시백도 원서도 잘 알았다.
두 사람은 단 1초라도 무의미하게 흘려버리지 않으려고,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방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서로를 껴안았다.
열락을 나누기에 1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지만 이시백과 원서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갖고 있었다.
“……한 시간, 지났네요.”
“그래.”
두 사람이 천천히 입술을 떼면서 속삭였다.
이대로 시간이 영원히 지속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눈동자에 머물렀다.
어쩌면 그런 애틋함이 이 비밀스러운 장난을 더 뜨겁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모든 놀이가 그러하듯, 연애 역시 ‘규칙’이 사라지는 순간 허물어졌다.
끝없이 더 많은 시간과 끝없이 더 많은 애정을 강요하는 순간부터 연애는 차마 견딜 수 없는 지옥으로 전락했다.
‘일주일에 1시간’이 규칙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시백과 원서의 관계를 단단하게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윤시아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단지 여느 때처럼 활발하게 이시백을 북돋워 주었다.
이시백이 원서를 뒤로하고 침실에 올라오자, 윤시아가 깡충깡충 뛰어왔다.
“선배! 보고 싶었어요-!”
윤시아가 이시백의 팔뚝을 와락 껴안았다.
“오늘은 작업장에서 평소보다 일찍 돌아왔구나.”
“선배 보고 싶어서 빨리 끝내고 왔죠. 기특하다고 칭찬해도 좋아요. 선배는 어디 갔다가 오는 길이에요? 저 10분 정도 기다렸다구요.”
“잠깐 아래층을 걸었다. 생각에 잠겨서.”
이시백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위험했다. 만일 20분이나 30분 더 늦어버렸으면 윤시아가 이시백을 찾기 위해 움직였을 수도 있었다. 딱 시간을 맞춰서 헤어진 덕분에 만일의 사태를 회피했다.
죄책감?
당연하게도 이시백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시백은 자신의 죄책감이 얼마나 하잘것없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죄책감을 느낀다고 해서 뭐 어쩌겠는가.
‘시아한테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이시백이 진실을 고백하면 윤시아는 마음 깊이 상처를 입으리라.
윤시아는 재능과 능력, 인격, 시간을 모조리 이시백에게 바치고 있었다.
그걸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알면 윤시아는 결코 다시 일어서지 못하겠지.
‘그렇다고, 원서 아가씨와 관계를 끊을 의지도…… 없다.’
꿈에도 그리던 원서 아가씨와 맺어진 것이었다.
영원히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보물을 다시 접했다.
더 나아가, 그 보물은 이제 자신한테 입술을 맞추고 숨 가쁘게 살결을 섞었다.
이시백은 이 쾌락을 거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결국 그 정도 죄책감.’
이것도 저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바에야 괴로워하는 것도 쓸모없었다.
해답은 단순했다. 이시백 자신이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면 되었다.
이시백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었던 16세 소녀를 취했다. 그녀의 미래를 저당잡고 말았다.
그런데도 다른 여자와 외도를 저질렀다. 두 여자를 전부 좋아한다는 감정의 미명 아래.
‘그래. 쓰레기다.’
윤시아와 함께 침대에 누우면서 이시백은 생각했다.
원서 아가씨와 몸을 섞은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시백은 또 다른 여자의 살내음을 맡고 있었다.
‘그렇다면 끝까지 비밀로 남겨두는 거다. 끝까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시백의 신체는 아직 건강했다. 절정을 찍고 있었다.
연달아서 두 여자를 상대하는 것 정도는 고생도 아니었다.
그것을 다행이라고 느끼는 자기 자신을 조소하며, 이시백이 윤시아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9
완연한 가을 무렵.
이시백은 바깥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리을령 소좌와 향후의 계획에 대해 논의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드르륵-
한 손으로 햄버거를, 다른 한 손으로 신문을 읽고 있자니 등 뒤로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손님이 뒤쪽 좌석에 앉은 것이겠지. 이시백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 않은 찰나,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렸다.
“뒤를 돌아보지 말게. 자네와 대화하려고 여기까지 나왔으니.”
“…….”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이시백은 자연스럽게 신문지 다음 장을 펼쳤다.
맞은편에서 순우경이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해치울까 하고 순우경이 눈빛으로 물었다. 이시백은 작게 고개를 저음으로써 호위대장의 섣부른 행동을 제지했다.
“저희 아지트로 찾아오시면 언제든 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게 자네의 대답인가. 정식 루트를 밟아서 방문하라고?”
“리을령 소좌님의 의심을 유발시키려면 그쪽이 더 효과적입니다.”
정체불명의 남자가 잠시간 침묵했다.
남자는 평범한 손님처럼 감자튀김을 한두 개씩 집어먹었다.
입안을 콜라로 시원하게 씻어낸 다음, 남자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정식 루트를 통해서 저와 만나는 것이 곤란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연치 않게 최근 평양의 10인 위원회는 두 파벌로 갈려서 세력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저를 몰래 찾아오실 분이 아주 다양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남자가 작게 코웃음을 흘렸다.
“제법이군. 리을령의 앞잡이라고 생각했는데 잘못된 판단이었나.”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철(馬鐵).
평양의 10인 위원회에서 좌장을 맡은 거물.
한국인과 일본인의 핏줄이 섞여서 양측에 지지를 받고 있었다. 더구나 부인은 중국인이었다. 가족 관계부터가 극도로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다만 그것도 과거의 이야기로,지지 세력의 한 축을 이루었던 일본계 자본은 하세가와 노부유키와 더불어 평양에서 내쫓기다시피 축출되었다.
현재 일본계 사본이 소유하고 있던 카지노-창관-사업장은 급속도로 북한계 및 조선계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슬슬 몸이 달아오를 때가 되었다.’
이시백은 언젠가 마철이 접촉해 오리라 짐작했다.
용병단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항쟁은 기사도와 거리가 멀었다.
일단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 용병단은 가장 먼저 상대편 조직의 배신자를 찾아 나섰다.
배신자를 활용해서 공격하는 것이 제일 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붉은 처녀 용병단은 리을령에 대한 충성도가 남다르다. 배신자 따위가 쉽게 나올 리 없다. 자연스럽게, 리을령의 신임을 갑자기 받기 시작한 나한테로 시선이 돌아온다.’
그래서 이시백은 일부러 바깥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패스트푸드 음식점.
지금처럼 이시백한테 다가와서 밀담을 나누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자네처럼 명민한 청년이 과거의 유산을. 그것도 썩어빠져 구더기가 들끓는 시체에 충성을 맹세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이해하기 어렵군.”
“제가 충성을 바치는 것은 죽은 지 백 년이 다 되어가는 수령 동지가 아닙니다. 백 년이 흘러도 이백 년이 흘러도 여전히 죽지 않는 돈뿐입니다.”
“……과연. 만일 내 쪽에서 리을령보다 더 많은 돈을 안겨줄 수 있다면, 우리 사이에 ‘좋은 우정’이 성립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얘기로군?”
이시백이 신문지를 넘겼다.
“리을령 소좌님은 저에게 술과 마약의 레시피를 네 개나 헐값에 넘겼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제가 사업을 확장하는 데 방해가 되는 하세가와 노부유키까지 처리해 주었습니다. 저는 리을령 소좌님과 매우 돈독한 파트너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그쪽에선 저한테 지금까지 아무것도 선물해 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뭘 보고 우정을 믿겠습니까?”
“당장 현재만 바라보면 물론 리을령은 좋은 파트너겠지.”
중절모를 뒤집어쓴 마철이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리을령은 ‘일찍이 세계에서 제일 호화로웠던 유람선’이다. 지금 문제가 없다고 해서 안심하면 북대서양의 차가운 해수에 가라앉게 되겠지.”
“협박입니까.”
“진실일세. 어차피 나와 리을령의 충돌은 불가피한 시점이 다가왔어. 항쟁이 벌어지면 어느 쪽이든 크나큰 상처를 입고 말 것이야. 그렇지만 누가 승리하겠는가? 하세가와 노부유키를 정리하느라 정예병을 30명이나 잃어버린 리을령? 아니면 평양의 패권에 가장 근접했다고 말해지는 내가 이길까.”
마철이 햄버거를 한입 물었다.
한동안 우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판단은 자네의 몫이다, 청년. 자네가 정말로 시체에 기생하는 구더기가 아니라면 조금 더 냉정하게 전황을 읽을 수 있겠지. 그리고 리을령이 무너지면 자네는 아무것도 아닐세.”
“…….”
“석 달 만에 수십억을 벌어들이니 눈이 휘둥그레 커지던가. 세상의 돈이란 돈은 죄다 자기가 끌어 모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흥분되던가. 리을령만 믿고 쫓으면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릴 것 같아서 만족되던가. 전부 착각이다. 돈은 백 년이든 이백 년이든 영원하다. 하지만 그걸 손에 쥐는 인간은…… 특히 자네처럼 갑작스레 성공해 버린 청년은, 아무리 길어봤자 2년을 넘기기 힘들지.”
이시백이 침묵했다.
신문의 마지막 면을 바라보면서 그가 말했다.
“우선 조건부터 들어보겠습니다.”
“나에게 우정을 보여준다면 항쟁이 끝난 이후, 매달 순이익이 10억 이상 나오는 소규모 카지노를 세 곳 넘기겠다. 거기에 매달 순이익이 5억 이상 나오는 창관도 하나 넘기지. 평양에서 길게 살아남으려면 여러 사업장을 가지는 게 필수적이다. 마약과 술만으로는 영원히 권세를 누리기엔 부족하지.”
“…….”
“부디 잘 생각해 보게. 주의 깊게. 조심하게……. 만일 생각이 있으면 내일 오후 2시, 이곳에 부하를 보내게나. 나는 이만 실례하겠네.”
마철이 일어서서 음식점을 나갔다.
이시백은 신문지를 덮고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반쯤 먹다 남은 치즈버거와 감자튀김이 널브러져 있었다.
“순우경.”
“왜, 형씨?”
“나는 패스트푸드를 의외로 싫어하지 않는다.”
이시백이 감자튀김을 한 개 집어서 지그시 바라보았다.
노란 감자튀김은 기름기에 절여져 볼품없이 뒤틀려 있었다.
“빠르게 요리하고, 빠르게 처리한다. 이건 매우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시백이 감자튀김을 이빨로 씹었다.
퇴폐적인 기름의 냄새가 입안을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