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84화
제12장 마지막 독재자(5)
7
술자리는 아주 늦게까지 이어졌다.
“으으음. 저는,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아이고, 벌써 젊은 놈들 주량에 못 따라가겠네. 나도 퇴장이요.”
새벽 5시가 넘어서자 단원들이 한두 명씩 내려갔다.
침실이 똑같은 건물의 아래층에 위치했는지라 빠지기도 편했다.
유현도와 순우경이 빠지고 최고층 회의실에는 네 명만 남았다.
“으어어…… 선배는, 왜 이렇게 술이 강한 거예요…….”
윤시아가 식탁에 널브러져서 웅얼웅얼 중얼거렸다.
향금산 유곽에서 아가씨들한테 단련 받았다고는 하나 아직 어린애.
주량으로 이시백을 따라오기에는 한참 멀었다.
이시백이 술잔을 기울이며 윤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완전히 취했군.”
“갸르릉. 시아는 선배의 고양이라구요-? 고양이는 안 취해요-?”
윤시아가 이시백의 손등에 뺨을 부비적거렸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장나래가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자문사님을 침실로 모시겠습니다.”
“그래주겠나?”
“저도 슬슬 내려가려는 참이었습니다. 수고로울 것도 없습니다.”
장나래가 영차 하고 윤시아를 옆구리에 업었다.
장신의 장나래는 윤시아를 장난감처럼 가볍게 다루었다.
윤시아는 팔다리를 흐느적거리며 반항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직 마실 수 있는데……. 끄떡없는데…….”
“예, 자문사님. 아래층에 가서 2차를 즐깁시다.”
“2차……. 2차는 잘생긴 오빠들을 잔뜩 불러서어…….”
장나래가 이시백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 계단을 내려갔다.
회의실이 부쩍 조용해졌다.
각탁에 남아서 술잔을 홀짝이는 사람은 이제 단 두 명.
이시백과 원서뿐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대화를 나누는 일 없이, 각자가 묵묵하게 술을 따라 목구멍으로 넘겼다.
이시백이든 원서든 말수가 적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눈앞에서 핵폭탄이 떨어져도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 양반들이었다.
기묘한 적막감이 회의실에 축축하게 내려앉았다.
“…….”
그러나 두 사람은 각자 침묵을 받아들이는 감상이 달랐다.
먼저 이시백부터 말할 것 같으면, 그는 놀랍게도 기뻐하고 있었다.
‘원서 아가씨와 단둘이서 대작하는 것이 얼마 만인지.’
이시백은 그리운 감각에 발목을 담그는 기분이었다.
본래 원서 아가씨는 잘 취하지 않았지만 일단 취해버리면 술버릇이 고약했다.
평소에 그녀는 강철의 여제로서 본심을 숨기고 다녔다.
그 때문이겠지. 알코올이 들어가면 힘겹게 억누른 본심이 튀어나왔다.
원서도 자신의 주정을 잘 알기에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술을 삼갔다.
가끔씩 호위대장인 이시백과 대작하는 것이 전부였다.
‘여전히 술 마시는 모습이 아름다우시군.’
이시백이 흐뭇한 마음으로 원서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백자 도자기잔을 든 원서의 손가락에는 어딘가 귀족적인 차분함이 있었다.
반면에.
“…….”
정작 원서는 한없이 초조했다.
그녀는 지금 주량을 아득히 초월해서 과음하고 있었다.
다행히 속이 울렁거리지는 않았어도 의식이 흐리멍덩해졌다.
‘나도 내려가야 하는데. 아니, 아까 전에 같이 내려간다고 말했어야 했어. 왜 말하지 않았지? 왜 단장님이랑 둘이서 남게 되었지? 그보다 지금은 몇 시일까. 내일도, 아니, 오늘도 출근해야 했나? 단원들 전원한테 하루 휴가를 준다고 했었나? 나도 내려가야 하는데. 왜 아까 전에…….’
요컨대 엉망진창.
얼핏 차가운 눈동자로 술잔을 연거푸 들이켜고 있었으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이 열아홉 살의 아가씨는 가엽게도 ‘자기가 술에 취하지 않았다고 위장하기 위해 계속해서 술을 마시는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세상에 수없이 많은 주정이 존재했지만 이만큼 괴랄한 주정은 얼마 없으리라.
‘나, 똑같은 생각을 벌써 몇 번이나 한 거지?’
원서는 그녀의 인생이 시시각각 붕괴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보다 30분 전부터 똑같은 포즈만 취하고 있는 것 같은데. 손을 움직여. 발이라도 꼬아. 무언가 움직임을 보이라고. 아니, 이건 너무 어색하잖아. 최악이야. 자연스럽게. 맞아, 최대한 자연스럽게…….’
원서가 슬그머니 이시백을 쳐다보았다.
마침 이시백도 원서의 자태를 감상하고 있었는지라, 두 사람은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원서는 갑자기 심장이 덜컹거렸다.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실 거야.’
원서는 현재 자신의 모습이 끔찍한 술주정뱅이로 보일 거라 생각하며 절망했다.
이시백은 그녀가 이쪽을 바라보자 고개를 갸웃했다. 그 고갯짓이 원서에게는-신이시여, 그녀의 두뇌와 안구를 보호하소서-묘하게 귀엽게 보였다.
‘잠깐만. 원서. 진정해. 나는 저격수야.’
원서가 침착하게 생각했다.
‘단장님을 단장님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표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조준경에 맞춰서 저격해야 하는 표적. 그러면 긴장할 것도 없어. 단장님은 표적이야. 사냥감이야. 적군이야…….’
원서는 도리어 뚫어지라 이시백을 노려보게 되었다.
그렇게 30초 정도가 흐른 다음에야 원서는 자신이 얼마나 거하게 삽질을 하고 있는가 간신히 깨달았다.
‘아무런 해결이 안 되잖아!’
불쌍한 술주정뱅이 아가씨가 그곳에 있었다.
‘더 이상한 여자가 되어버렸어.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해야 하는 거야. 단장님한테 이상한 인상을 심어주면 안 되니까. ……이상한 의미는 아니야. 단장님은 단장님이니까. 상관이니까. 부하가 상관한테 조심하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아. 당연해.’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모든 필사적인 내적갈등은 바깥으로 표출되지 않았다.
즉, 다른 사람 눈으로 바라보면 원서는 아주 멀쩡한 것처럼 보였다. 검은색 장발은 여느 때처럼 흑단처럼 윤이 났고, 살결은 변함없이 새하얬다. 특히 눈동자에 초점이 뚜렷했다.
이시백이 이렇게 오해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원서 아가씨는 어릴 적부터 술이 강했군.’
그의 기억 속에서 원서 아가씨는 주당이었다.
설마 그녀가 평생을 통틀어서 오늘 밤만큼 취한 날이 없었다고는,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이시백이 느긋하게 말했다.
“원서. 똑같은 술만 마시니 질리지 않는가?”
“…….”
원서는 순간 당황했다.
자기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이시백의 말을 듣지 못했다.
이럴 때는 무조건 예스라고 대답하는 것이 좋았다.
왜 좋은가 하고 물어보면 원서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무튼 예스였다. 단장님께서 질문하시는 말에 예스 이외에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할까.
“예.”
“그렇겠지. 잠깐만 기다려 보게. 내가 맛있는 걸 만들어줄 테니.”
이시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회의실 벽면에 진열된 술들을 거침없이 꺼냈다. 거기에다 냉장고에서 재료까지 가져왔다.
각탁에는 순식간에 칵테일 재료들이 집결했다.
원서가 영문을 몰라 지켜보는 가운데, 이시백은 능숙하게 칵테일을 연성하기 시작했다.
‘진, 보드카, 럼, 데낄라는……. 그래도 이미 술을 많이 드셨을 테니 생략할까. 여기에 트리플섹과 라임주스, 콜라에 장식은 레몬으로 마무리할까.’
전생에서 이시백은 원서의 전담 바텐터나 마찬가지였다.
원서는 이런저런 칵테일을 상당히 좋아했기에 필연적으로 유일한 술친구인 이시백이 만들어주게 되었다.
덕분에 이시백은 몇몇 칵테일에 한정해서는 거의 준프로급의 실력을 갖추었다.
‘오랜만에 만들어봐서 불안했는데 실력이 녹슬지 않았군.’
술잔에 큼직한 얼음덩어리를 채워 넣고 마지막으로 휘젓기.
이시백이 흡족하게 칵테일을 제조하여 각탁에 쓰윽 올려두었다.
원서는 마술을 구경하는 어린애처럼 일련의 과정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롱아일랜드 아이스티다.”
그건 일찍이 원서 아가씨가 가장 좋아했던 칵테일.
과거, 고산(高山)의 한 칵테일 바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원서가 바텐더한테 주문한 술이기도 했다. 바텐터가 주문을 거절하긴 했지만.
원서가 떨떠름하게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단장님이 절 위해서 만들어주신 건가요?”
“자신 작이다. 마시고 감상을 남기도록.”
원서는 양손으로 조심스레 술잔을 쥐었다.
그리고 혓바닥으로 살짝 술을 맛보자.
“……!”
원서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그녀는 마치 소주를 원샷하듯 칵테일을 꼴깍꼴깍 흡입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칵테일잔이 비워졌다.
투명한 얼음만이 외로이 술잔에 남아 뒹굴었다.
“어떤가?”
“……이렇게 입맛에 맞는 술은 처음이에요.”
“만들어준 보람이 있군.”
이시백이 씨익 웃었다.
이시백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지은 미소였다.
원서는 그 미소를 보고 표정이 굳었다.
심장이 다시 요동쳤다.
“다음은 맨해튼이다. 칵테일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녀석이지.”
그런 원서의 상태를 전혀 모른 채, 이시백은 다음 칵테일을 제조했다.
“스트레이트급 버번 위스키에다가 스위트 베르무트, 비터를 섞어서…… 음. 체리가 있으면 좋으련만 평양에서 구하기 쉬운 과일은 아니지. 아쉬운 대로 이번에는 딸기로 장식하겠다.”
이시백이 솜씨 좋게 맨해튼 칵테일을 뚝딱 만들었다.
원서가 역시 공손하게 술잔을 받아 단숨에 마셨다.
딱 자신의 입맛에 맞는 풍미가 입안에 감돌았다.
“이것도…… 맛있어요.”
원서는 이런 술이라면 몇 잔이든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당연했다.
이시백이 가지고 있는 레시피, 정확한 비율 배합은 딱 원서의 입에 맞도록 특화되어 있었다.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레시피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 한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만족스럽지 않을 리 없었다.
물론 원서는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다만 모든 것이 마술과 같이 느껴졌다.
‘이런 것이 가능할까?’
생부에게 버림받았다.
경찰에게도 버림받아 변방으로 쫓겨났다.
희망이 사라졌다고 체념하는 와중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자신이 남몰래 갈망해 오던 사람이 나타났다.
유능하고, 냉철하며, 자신과 똑같은 이상을 가슴에 품고…… 어째서인지 자신을 그리움이 담긴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것이 마술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단장님은, 어떻게 전부…….”
“음.”
이시백이 눈썹을 작게 찡그렸다.
그가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나서 자신한테로 몸을 숙였다.
원서는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나 싶어 당황했다.
이시백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워졌고, 거리가 좁혀질수록 원서의 머리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이윽고 원서가 이시백의 눈썹 숫자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이 근접했다.
“입술에 술이 조금 묻었다.”
이시백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원서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무척 부드러운 손길.
그리고 이쪽에 대한 배려심이 묻어나오는 손길이었다.
“칵테일은 혀로 느껴지는 것과 다르게 도수가 제법 강하다. 맛에 속아서 급하게 마시다가는 한 번에 취해버릴 수도 있다. 물론, 자네는 술이 세니 노파심에 가까운 충고이다만.”
이시백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주 약간 입꼬리가 올라갔을 뿐이었지만, 누구보다 가까이서 그걸 지켜본 원서에게는 너무나 뚜렷한 미소였다.
“…….”
마술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시백이라는 남자는 틀림없이 눈앞에 존재했다.
그렇지 않다면, 경찰학교 동기들한테 냉혈한이라고까지 조롱받은 자신의 심장이 이렇게 두근거릴 리가 없었다.
‘안 돼.’
단장님에게는 이미 애인이 있었다.
‘표적이 아니야.’
자문사님은 진심으로 단장님을 사랑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자신이 이상한 짓을 저질러버리면, 정말로 안 되었다.
머릿속이 취기에 절여져서 정확히 왜 안 되는지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여하간 안 된다는 결론만큼은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그래도.
‘그래도, 만약 비밀이라면.’
원서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속삭였다.
‘비밀로, 남겨둘 수 있다면.’
이시백이 원서의 입가에서 손을 떼었다.
그는 살짝 젖은 손수건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도로 품속에 넣으려고 했다.
“음. 다 됐군.”
“…….”
“아무튼 급하게 마시지 않아도 괜찮다. 언제든지 또 만들어줄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럼 시간도 늦었으니, 오늘 술자리는 이쯤에서…….”
그때였다.
자신한테서 멀어지려는 이시백의 손목을, 원서가 붙잡았다.
이시백이 입을 열어서 무언가를 물어보기도 전에 원서는 얼굴을 움직여서, 이시백의 입술에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갖다 댔다.
부드러운 감촉이 원서의 입술에 감돌았다.
그녀 자신도 미처 자각하지 못하는 틈에 벌어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