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83화
제12장 마지막 독재자(4)
6
백산 용병단의 회의실.
콘크리트가 벗겨져 철골이 앙상하게 드러난 이곳에 단원들이 모였다.
이시백이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정식단원을 전원 소집한 것이었다.
“아주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지만.”
이시백이 각탁을 돌아다니면서 단원들 한 명 한 명에게 손수 술을 따라주었다.
윤시아, 순우경, 유현도, 장나래, 원서.
단원들은 말없이 두 손으로 공손히 술을 받았다. 삭막한 회의실 풍경에 술이 따라지는 소리가 또르르 스며들었다.
“그것 또한 계획의 일부. 우리의 작전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하세가와 노부유키는 평양에서 축출되어 중국으로 도주했다. 리을령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 본질은 상처뿐인 승리. 정예병을 서른 명이나 잃었고, 정작 사업적으로 이득을 본 구석은 전무하다.”
다소 역설적이게도, 단지 이시백의 취향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오늘 받는 술은 열도에서 공수해 온 일본주였다.
하세가와 노부유키가 이끄는 도천 용병단을 섬멸하고서 일본주로 축배를 들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비아냥거리는 것이라고 착각했겠지. 실제로 순우경은 실실 웃으면서 일본주를 받았다.
“패배자가 있고, 거짓된 승리자가 있다. 이번 항쟁에서 실질적으로 승리를 거둔 세력은 오직 하나, 우리 백산뿐이다. 하세가와 노부유키가 사라짐으로써 우리의 마약 사업과 밀주 사업을 방해할 카르텔은 증발했다. 그리고 리을령이라는 강력한 우군을 얻었지…….”
마침내 이시백이 원서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원서는 단장님이 가까이 다가오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는 이시백과 시선을 마주치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시백은 상대방의 마음을 깨닫는 일 없이, 마지막 술잔을 채워 넣은 다음 자신의 술잔을 쭉 내밀었다.
“이번에 수고해 주었다는 의미에서 여기 모인 모두한테 성과급 1억을 지급한다. 특히 우리 용병단에 새로이 들어온 저격수. 원서가 크게 활약해 주었으므로, 성과급 1억 5천만 원을 지급한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원서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당장에라도 휘발해 버릴 것처럼 작아서, 이시백에게만 간신히 들릴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시백은 전혀 개의치 않고 주변을 쓰윽 둘러보았다.
“우리의 유일무이한 승리를 축복하자. 건배.”
“건배!”
단원들이 술잔을 치켜들었다.
건배주가 몇 번 오가자 분위기가 좋아졌다. 이중에서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하물며 돈을 경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과급으로 1억씩이나 받자 모두가 기뻐했다. 어느새 윤시아와 유현도는 의기투합하여 평양의 유명 레스토랑을 전부 순례하자고 약속했다.
“…….”
오로지 원서만이 후덥지근한 공기에서 한 발자국 떨어졌다.
그녀는 도자기잔에 계속해서 사케를 따라 마셨다. 자작(自酌)이었다.
검은색 눈동자는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게 다만 흐릿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모두에게 알려줄 것이 있다.”
이시백이 상석에 앉아서 입을 열었다.
단원들은 대화를 멈추고 이시백을 쳐다보았다. 다음에 이어진 이시백의 말에 그들은 모두 침묵하게 되었다.
“우리 백산 용병단은 이제부터 리을령을 배신한다.”
단숨에 회의실이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어떤 사람은 으음 하고 침음을 흘렸다. 어떤 사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의 아군이 오늘의 적군이 되는 경우는 이 바닥에서 흔해 빠졌다.
단원들이 팽팽하게 굳어진 가운데, 이시백이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현재 10인 위원회에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여덟 조직만이 남았다. 그중 3곳이 리을령의 붉은 처녀 용병단을 지지하고 있다. 나머지 4곳은 딱히 연합하지 않았다마는, 리을령이 지나치게 성장하는 걸 방해하기 위해서 결국 협력할 것이다.”
점수는 4:4 동점.
이시백이 머릿속으로 그려둔 ‘최상의 시나리오’가 실제로 펼쳐졌다.
“양쪽이 충돌할 경우 어느 쪽이 승리하든 피해가 막심할 터. 평양의 호랑이들은 상처 입은 늑대들로 전락한다. 그리고 이때, 우리 백산 용병단이 경찰의 지원을 받아 단숨에 평양을 제패한다.”
“휘이, 어부지리인가.”
순우경이 휘파람을 불었다.
아마 순우경은 당장 내일 이시백이 평양 시장(市長) 자리를 노리고 출마한다 해도 어깨를 으쓱거리고 말겠지.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남자였다.
“그런데 광수대가 전가의 보도도 아니고. 이쪽 마음대로 움직이려면 떡값이 필요할 텐데? 형씨. 뭐 좋은 건수라도 잡았어?”
“광수대를 이용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순우경.”
이시백이 앉은 자세에서 상반신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나는 ‘경찰의 지원’을 받아 평양을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설마 광수대뿐만 아니라 경찰 전체를 우려먹겠다는 말이여?”
순우경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규모가 달랐다. 경찰 전체가 움직인다는 것은 곧 정부가 움직이는 걸 의미했다.
저번 납치 소동처럼 부장판사의 독녀를 가지고 장난칠 수준을 아득하게 뛰어넘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현도도 깜짝 놀랐다.
“다, 단장님. 경찰 전체는 위험하지 않을까요? 광수대까지라면 또 몰라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게 되어버려요.”
“현직 부산 시장은 다음 연도에 재선을 노리고 있다. 그렇지만 시민들의 지지도가 낮다. 이대로 가다가는 경쟁자한테 패배할 것이 분명하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인기를 얻으려고 할 거다.”
정계 사정에 빠삭한 유현도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만요. 하지만 그게 저희랑 무슨 상관이……?”
“그림을 더 넓게 봐라. 우리는 경찰에게 아부하려는 것이 아니야. 정치가들한테 아부하려는 것이다.”
“정치가들한테.”
유현도가 턱을 괴고 고민에 빠졌다.
끄응, 끄응 하고 열심히 신음을 내는 모양새가 귀여웠다.
40초 정도가 흐르자 유현도가 미심쩍게 눈썹을 째푸렸다.
“리을령 소좌를 배신하는 게 정치가들에 대한 아양으로 이어진다면……. 혹시 리을령 소좌를 빨갱이로 몰아서 넘겨 버리게요?”
이시백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괴짜는 그림을 보는 능력에 한정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저기, 그.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비약이 너무 심한데요, 단장님. 붉은 처녀 애들이 인민군을 자칭하고 있지만 그래 봤자 용병단 수준이라구요. 국가전복사태라고 호들갑을 떨기에는 너무 보잘것없어요.”
유현도가 자기 의견을 내놓으니 그제야 다른 단원들도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이 되었다.
대화가 쌍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건 즐겁군, 하고 이시백이 생각했다.
“그렇다. 자칭 인민군 칠십 명을 때려잡아 봤자 득보다 실이 많지.”
“네, 제 생각도 그래요.”
“만일 붉은 처녀 용병단이 더 이상 ‘자칭’ 인민군이 아니라면 어떨까.”
“……?”
유현도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시백이 단원들 전원을 훑어보며 말했다.
“리을령 소좌는 지금까지 김일성의 후손을 숨겨두고 있었다.”
“……!?”
단원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특히 유현도가 입을 떠억 벌렸다.
“마, 말도 안 돼요. 그럴 리가……김일성의 후손은 틀림없이 제4차 선양(瀋陽) 공방전에서 인도인 저격수의 총탄을 맞아서 사망했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리을령 소좌의 집안이 대대로 김일성의 핏줄을 수호해 왔다. 소좌의 부친도, 조부도, 모두 이 독재자의 혈통을 지키겠다고 분투한 모양이더군.”
“리을설 호위 사령관이…….”
유현도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설마 호위 사령부의 일단이 평양이 아니라 원산으로 칩거한 이유가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서……. 그런가요. 중앙 정부가 북방을 포기하고, 감시의 시선이 약해질 때까지 기다린 건가요……. 세상에.”
유현도는 멍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녀의 두뇌는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계산하고 있었다.
절실하게 재선을 노리는 정치가. 정치인들한테 점수를 따고 싶어 하는 경찰. 특보를 원하는 언론. 엄청난 이야기를 원하는 대중. 그리고 한가운데에 서 있는 백산 용병단.
유현도가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만약. 만약 그게 진짜 사실이라면…….”
“사실이다. 나를 믿어도 좋다.”
“……대박이에요, 단장님. 이 떡밥은 정치가들이 물지 않을 리가 없어요!”
유현도가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수십 년 동안 지하에 숨어들어 생존했던 김일성의 후손이라니요! 게다가 그걸 숨기고 있던 용병단이 인민군을 자칭하고 있었다! 이건 빼도 박도 못하고 쿠데타 시도예요. 실제로 그럴 의도가 없어도 국가 반역죄에 해당한다구요!”
“그래. 현아의 말이 옳다.”
이시백이 차분히 말했다.
“정부와 경찰은 군침을 흘리며 이 먹잇감에 접근하겠지. 평양이 발칵 뒤집힐 것이다. 그야말로 반도 전체가 소란을 피울 만한 주제이니 말이다.”
“…….”
“우리의 계획은 이러하다. 먼저 10인 위원회가 양편으로 갈려서 싸우도록 유도한다. 두 파벌이 모두 기진맥진해져서 지쳐 쓰러질 때, 우리는 광수대를 경유하여 정부와 경찰의 협력을 얻어낸다. 그리고 단숨에 평양을 토벌한다!”
쿵 하고 이시백이 탁자를 내려쳤다.
이시백의 목소리에는 기묘한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가능성을 논하는 게 아니라 마치 미래를 확정하는 듯한 단호함이 있었다.
단원들은 단장의 기세에 짓눌려서 말문이 막혔다. 그저 무언가에 사로잡힌 것처럼 이시백의 사나운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붉은 처녀 용병단이 숙청된 이후에도, 중앙 정부는 ‘빨갱이 잔당들이 부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평양에 감시견을 남겨두려고 할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 감시견이 되어준다. 우리 용병단에 적대하는 세력은 모조리 빨갱이 딱지를 붙여서 총살시킨다!”
“……!”
“알겠는가. 우리는 정부의 묵인 아래 평양을 공포로 지배할 수 있게 된다. 10인 위원회에 의해 공평하게 통치되던 무법 시대는 이제 끝난다. 백산 용병단의 말 한마디에 의해 목숨이 좌지우지되는 시대가 다가온다. 아니, 우리가 그 시대를 강제로 열어젖힌다.”
이시백이 귀기에 어린 얼굴로 정면을 노려보았다.
단원들은 등덜미가 서늘해졌다. 이시백은 진심이었다.
10인 위원회의 통치가 종막을 고하고 다음에 등장하는 것은 철혈의 독재.
반항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고 적대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력.
그 정점을 다름 아니라 백산 용병단이 차지한다…….
“김일성의 후손은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남자다. 다섯 살에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 불치병을 얻어 자그마치 십오 년 동안이나 병실에 머물렀다. 불운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지. 하지만 나는 우리 용병단이 권력을 얻기 위하여 그 남자를 희생시킬 작정이다.”
“…….”
“윤시아, 순우경, 유현도, 장나래, 원서. 내가 이 이야기를 숨김없이 들려준 이유는 간단하다. 여기가 우리의 갈림길이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 되어야만 한다.”
이시백이 술잔을 꾹 쥐었다.
“만일 단원들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나는 이 계획을 즉시 중단하겠다. 우리 용병단은 일심동체다. 단 한 사람의 배신이라도 용납할 수 없다. 처음부터 뜻을 한데로 모으지 못한다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 편이 월등히 좋다. ……부디 솔직하게 말해주도록.”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제일 먼저 입술을 연 사람은, 당연하게도 윤시아였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술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저는 단장님이…… 선배가 어떤 길을 가더라도 따라갈 거예요. 독재자의 애인. 좋네요. 재벌가 제3세의 애인보다 훨씬 멋져요. 제 취향이에요.”
순우경.
“뭐, 다 좋은데 암살당하지 않게만 조심하쇼. 내가 지켜주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유현도.
“단장님께서 저와 하신 약속을 계속 기억해 주시면, 언제까지라도 충성할게요.”
장나래.
“제 목숨은 이미 단장님께 빚졌습니다. 이의 따위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원서.
“……명령만 내려주세요. 실행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시백을 포함하여 백산 용병단의 여섯 명.
전원이 오른손에 술잔을 쥐고 앞으로 내밀었다.
별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시백은 그들과 작은 건배를 나누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일수불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베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베라. 우리 백산은 이제부터 평양을 접수한다.”
단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