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달의 제국-81화 (81/142)

건달의 제국 81화

제12장 마지막 독재자(2)

2

옷 같은 것은 챙겨 입지 않아도 괜찮다.

이시백은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리을령 소좌가 한 말을 이해했다.

“어서 오세요, 이모.”

대동병원의 최상층.

특별한 입원환자들만을 위해서 마련된 병동이었다. 오직 이곳으로만 통하는 엘리베이터가 두 대 마련되어 있었다.

이 병동에 근무하는 간호사들만 유별나게 예뻐 보이는 것은, 아마도 기분 탓이 아닐 거라고 이시백이 생각했다.

오직 평양의 VIP들을 위해서 지어진 장소였다.

소총으로 무장한 경호원들이 지키는 병실에 들어서자.

“오늘은 조금 늦으셨네요. 어제 연락이 안 되어서 걱정했어요.”

소년의 목소리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이제 중학생이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가냘픈 남자.

두 눈이 계속해서 감겨 있고, 시력을 모두 잃어버린 소년.

“미안, 조금 바쁜 일이 있었거든.”

“어제 아침에 총소리들이 들리던데…….”

“아, 응. 왜놈들이 평양을 휘젓느라 쥐어 패줬어.”

“왜놈이 아니라 일본인이죠. 이모.”

소년이 미간을 좁히며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사용하는 말에서 이미 적의를 드러내면 안 돼요. 대체로 이모는 욕을 너무 많이 써요. 다른 사람들을 조롱하는 언어 습관에 익숙해지면 세계관 자체가 협소해지는걸요.”

“미안, 미안해. 워낙 험상궂은 친구들 사이에서 일하다 보니까.”

리을령 소좌가 멋쩍게 웃으면서 소년한테 다가갔다.

리을령이 병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소년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오늘은 내 동료를 소개해 주려고 왔어.”

“안 그래도 이모 말고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려서 궁금했어요. 어떤 분이죠?”

“이시백이라고, 아주 믿음직스러운 친구야. 사람 한두 명은 점심거리로 해치우는 인간이지. 사실 어제 평양에 난리가 일어난 것도 저 친구가 벌인 짓이고.”

“이모의 동료답네요.”

소년이 작게 웃었다.

영차 하고 소년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소년은 리을령 소좌의 안내를 받아서 무사히 이시백한테 접근했다.

이시백이 다만 묵묵하게 장승처럼 서 있는 가운데, 소년이 이시백의 팔을 더듬거렸다.

“아, 죄송해요. 잠시간 실례해도 괜찮을까요?”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한동안 소년은 말없이 이시백의 신체를 조심스럽게 만졌다.

마치 머릿속에서 상대방의 윤곽을 천천히 그려 나가듯이.

소년이 중얼거렸다.

“보통 사람들은 장님한테 뭔가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는 거 같더라구요. 단지 살갗을 매만질 뿐인데 사람의 성격을 밑바닥까지 꿰뚫는다든가. 다른 장님들은 어떤지 몰라도 전 그런 재주가 없어서요. 응. 몸이 정말 근사하네요.”

“감사합니다.”

“저는 과격한 운동을 전혀 할 수가 없어서.”

소년이 한숨을 쉬었다.

“조금은 근육이 있는 남자가 되고 싶은데 여의치가 않죠. 그래서 부러워요.”

이시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설마 리을령 소좌가 꼭꼭 숨겨둔 핏줄의 아이가 맹인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어투를 들어보니 병원에 장기입원 하는 것 같았다. 안구뿐만이 아니라 다른 신체 부위에도 문제가 있다는 뜻이리라.

‘난감하군.’

이시백이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높게 쳐줘도 고등학생인데 일이 곤란하게 되었어.’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인간을 죽여 본 이시백이었지만, 그에게도 결코 넘지 말자고 결심한 일선이란 게 있었다.

바로 소년병이 아닌 이상에야 어린아이를 죽이지 않겠노라고 맹세한 것이었다.

본래 이시백은 리을령 소좌에게 접근, 독재자의 마지막 핏줄을 찾아내서 광수대에 팔아넘길 계획이었다.

광수대에선 어마어마한 건수를 올렸다며 환호하겠지. 정치인들도 덩달아서 축배를 들어 올릴 것이 분명했다.

「김일성의 핏줄이 아직까지 생존하여 북방에서 쿠데타를 준비했다.」

당장 신문들에 대문짝만하게 특보가 실릴 터.

경찰은 반란을 미연에 방지했다며 찬사를 듣는다.

정치가들은 시민의 관심을 엉뚱한 쪽으로 돌릴 수 있어서 좋다.

건수를 제공해 준 이시백은 막대한 이익을 보장받아 더더욱 좋다.

‘……정치놀음에 애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

윤시아처럼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경우라면 또 모를까.

장대한 논리가 있는 것도, 뚜렷한 윤리관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시백은 어린아이들을 가지고 노는 것을 태생적으로 혐오했다.

눈앞의 소년은 명백히 예상 밖의 사태였다.

그렇지만 이시백은 간단하게 대안을 찾아냈다.

‘3년. 길면 5년 정도를 기다려야겠군.’

이대로 기다린다.

소년이 성인이 되기를 얌전히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가장 빠른 지름길이 막힌 건 아깝지만 다른 방법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독재자의 후손을 경찰에 팔아넘기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었다.

단지 전생에서 유현도가 이미 한 번 성공했기에, 위험요소가 제일 적다고 판단했기에 그 길을 선택했다.

그걸 제외하면 크게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

이시백이 빠르게도 기존의 계획을 포기했을 무렵.

“쿨럭, 큽, 쿨럭!”

소년이 허리를 구부리더니 심하게 기침했다.

리을령 소좌가 당황하며 소년의 등을 쓰다듬었다.

“괘, 괜찮아? 미안해. 얼른 침대로 돌아가자.”

“……저야말로 죄송해요. 이모. 모처럼 동료분과 함께 오셨는데.”

“아니야. 누워서 푹 쉬어. 내일 또 들릴 테니까. 알았지?”

소년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을령 소좌가 너스 콜을 누르자 잠시 뒤에 간호사들이 달려왔다.

간호사들이 소년을 돌보는 사이, 두 사람은 제대로 작별 인사를 건네지도 못하고 병실을 나왔다.

3

리을령 소좌는 말없이 옥상으로 올라갔다.

금연구역이기 때문일까.

그녀는 평소에 피우던 담배 대신에 껌을 꺼내어서 어금니로 질겅거렸다.

“첫인상이 어때?”

“불행한 남자애로군요.”

“불행하다라. 그래, 확실히 불행하지.”

리을령 소좌가 옥상 철조망에 등을 기대었다.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공허했다.

“저 아이가 세 살이었을 때 친모가 죽었어. 친부는 진즉에 사망했고. 거의 나 혼자서 키운 것이나 다름없지. 그렇다고 기저귀를 갈아주거나 그런 생고생까지 한 건 아니니, 나 주제에 어미의 마음을 안다고 과장할 수는 없고…….”

“소좌님의 친척입니까?”

이시백은 진실을 알고 있었으나 아직 모르쇠로 일관했다.

리을령 소좌는 이시백한테 저 소년이 독재자의 혈통이라는 걸 알려주지 않았다.

이시백은 최대한 모르는 척 뻐기면서 재주 좋게 리을령 소좌의 호감을 사볼 요량이었다.

친척이냐는 질문에 리을령 소좌가 쓴웃음을 지었다.

“애송아. 난 친척이 없어. 내 아버지가 친척 따위는 대업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될 뿐이라며 모조리 숙청했거든. 생각해 보면 참 독한 사람이지. 그걸 옆에서 동조한 나도 독한 년이지만.”

“저도 친척이 없으니 소좌님과 비슷한 처지입니다.”

“푸웁. 뭐야, 그게? 지금 나를 위로하려는 거냐?”

리을령 소좌가 품속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동전을 던져 주었다.

10인 위원회의 일원씩이나 되는 여인이 직접 지갑을, 더군다나 자잘한 동전을 챙기고 다녔다.

이시백은 그녀가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을지 보이는 것 같았다. 가난한 시절이 뇌리에 습관처럼 새겨진 사람은 설령 금고에 10억이 있든 100억이 있든 상관없이 동전을 버리지 못했다.

“2층에 매점이 있어. 음료수 좀 사와 봐.”

“탄산이 좋으십니까, 이온음료가 좋으십니까?”

“당연히 김빠진 콜라지. 멍청아.”

이시백은 리을령 소좌의 명령대로 음료수를 사왔다.

재활용 유리병에 담긴 콜라를 두 개 가지고 돌아오니, 리을령 소좌는 그 틈을 참지 못하고 연초를 뻑뻑 태우고 있었다.

이시백은 조용히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섰다.

두 사람 사이에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갔다.

“선한 소년입니다.”

“저 아이 성깔이 깨끗한지 더러운지 네가 어떻게 알아?”

“소좌님을 보자마자 말투부터 걱정하지 않았습니까.”

이시백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쥐었다.

“영리한 소년이니 소좌님이 병원비를 전액 부담하고 있다는 건 진즉부터 알았을 겁니다. 독실에 장기입원 하는 만큼 금액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도요. 평범한 아이라면 소좌님께 아양을 부리거나, 최소한 잘 보이려고 노력이라도 할 텐데 오히려 소좌님을 책망했습니다. 건방진 소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 아이는 아마도 소좌님을 친가족으로 여기고 있을 겁니다…….”

“친가족인가.”

“아들이란 건 어미를 걱정할 수밖에 없다더군요.”

이시백이 담뱃갑에서 궐련을 한 개비 꺼내들자, 리을령 소좌가 자신의 연초를 가만히 들이밀었다.

이시백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이고 그녀의 담뱃불을 옮겨 받았다. 엽궐련 끄트머리가 타닥거리며 불티를 냈다.

“……난 저 아이의 어미 같은 게 아니야. 기껏 해봐야 보호자지.”

“요즘 세상에 혈연은 정말 무의미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핏줄 따위로 연결될 수 없으니 저희는 결국 사람 마음으로 연결되는 방법 이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연.

누군가가 이시백한테 ‘대체 뭘 남기겠다고 그리 열심히 사느냐’라고 질문한다면, 이시백은 잠시간 침묵한 다음에 ‘인연이다’라고 대답하리라.

누구를 지켰는가.

누구와 친해졌는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 한 번이라도, 그 누구를 위해서 그 누구를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이시백은 30살이 넘은 이후로 언제나 ‘그렇다’라고 대답할 준비가 되었으며, 앞으로도 ‘그렇다’라고 대답하기 위해서 이 비루한 인생을 이어나갔다.

‘원서 아가씨.’

국가를 적으로 돌려가면서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은 사람.

‘시아.’

삭막한 사막과도 같은 자신한테 끈질기게 다가와준 사람.

이 자그마한 세상에서 두 명과 같은 사람을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두 사람을 지켜나갈 힘이 자신의 손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시백은 살아갈 수 있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리을령 소좌에게는 저 소년이 그런 사람이겠지.’

이시백이 고개를 돌려 리을령 소좌의 옆얼굴을 힐끗 보았다.

이제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여인은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이름은 정백화야. 다섯 살 때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어. 고산 살모사라는 희귀 몬스터인데, 혹시 알고 있어?”

“가끔 강원도에 출몰하는 녀석 아닙니까. 체내에 있는 독이 무섭습니다.”

“그래. 정확히 알고 있네. 백화가 상처 입기 전에 몬스터를 퇴치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때 호위병으로 있던 헌터들이 멍청해서 고산 살모사의 위험한 점을 몰랐어. 몬스터가 터지면서 체액이 백화를 덮쳤지.”

“…….”

“그때 시력도 잃고. 몸도 엉망진창이 되고.”

리을령 소좌가 담담히 말했다.

거기에 담아낼 감정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지나치게 많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다행히 피부는 어떻게든 재생시켜 놨는데, 아 그놈의 눈이 말썽이더라고. 독이 뭐 특이하게 들어갔는지 절대로 회복이 안 되는 거야. 피부도 완전히 나은 게 아니라서 지금도 반년마다 살갗이 저절로 녹고 그래.”

리을령 소좌가 웃었다.

“야. 너, 사람 살이 녹는 광경 본 적 있냐? 그게 촛농 흐르는 것처럼 막 녹아내려. 기가 막히지. 정작 백화 걔는 아무런 감각이 없대. 아프지도 간지럽지도 않대요. 그래서 내가 막 울먹거리면서 다독여 주려고 하면…….”

괜찮아요, 이모.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오히려 걔가 나를 다독인다니까. 하여간 순서가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지. 의사들도 다 손을 놨어. 몬스터의 뭐가 세포를 어떻게 만든 것 같다느니 쉰 소리를 지껄이는데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이 생지랄이 벌써 십오 년이 되어간다.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고 하네.”

“……?”

이시백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이상했다.

리을령 소좌는 정백화라는 소년이 다섯 살 때 상처를 입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방금 입원한 지 십오 년이 되었다고 언급했다.

그렇다면 소년이 스무 살이라는 얘기인데 앞뒤가 안 맞았다.

“소좌님. 아이의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올해로 스무 살이야. 너랑 동갑이지.”

리을령 소좌가 씩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안 보이지? 뭐 때문인지 몰라도 상처 때문에 성장이 극도로 둔해졌대. 하긴 한창 바깥에서 뛰어놀아야 할 시기에 병실 침대에만 죽치고 누웠으니 성장이 이뤄지면 더 신기하지만.”

“…….”

“아무튼 나의 소중한 동생이야. 아들 같다고 말하기는 부끄러우니까, 동생 같다고 말할게. 이시백 너한테 저 애를 소개해 준 것은 만약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날 대신해서 지켜주라는 거야.”

리을령 소좌는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로.

이제까지 이시백이 본 적 없는 얼굴로 말했다.

“잘 부탁해. 잘 대해주고.”

이시백은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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